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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다시 온 봄

by 답설재 2011. 4. 2.

 

 

 

겨우내 눈밭에 뒹굴어도 괜찮을 만큼 '튼튼한' 점퍼 한 가지만 입고 지냈다. 문밖에만 나서면 '무조건' 그 옷을 입었고, 더구나 털모자까지 뒤집어썼다. 한심한 일이면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1969년 봄부터 딱 41년, 출근을 하는 날이면 '무조건' 정장을 하다가 그렇게 하자니 어색했지만, 그것도 며칠이지 곧 익숙해졌다.

 

이월에는 복장을 좀 바꿔 볼까 했다가 그만둔 건 신문기사 때문이었다. '봄이 왔다는 말을 믿었다가 뇌졸중으로 쓰러지는 사람이 많다'고 했다. '까짓 거'? 그렇게 가소롭게 여길 일은 아니었다. '핏줄에 스탠트라는 걸 집어넣었으니 이젠 괜찮겠지' 했는데 몇 달만에 다시 실려가 그걸 또 한 번 집어넣고 나니까 이건 예삿일이 아니었고, '내 핏줄은 걸핏하면 좁아질 수 있구나' 싶어 지레 겁이 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삼월이 되었다. 명실상부한 봄이었는데, 이것 봐, 이번에는 아침 방송에 심장병 환자는 삼월에 특히 더 조심해야 한다는 뉴스가 나왔다. 신문기사는 이월이라고 했지만 아침방송에선 심혈관질환이라면 삼월에 죽는 사람이 제일 많다고 했다. 그 뉴스를 본 사람이 일부러 전화를 해주기도 했다.  '그래, 조심하는 것보다 나은 건 없지.'  다시 한 달, 삼월 내내 그 점퍼와 털모자를 고수(固守)하며 지냈다.

 

그러면서 어느새 삼월의 마지막 날이 되었고, 개나리가 활짝 핀 걸 도로변에서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아, 벌써!'  좋은 곳에는 진달래도 보이고 매화며 목련도 흐드러졌을 것이다.

 

 

#

 

 

용인 성복동의 그 학교 교장으로 간 그 청명했던 가을 어느 날, 아침인데도 귀뚜라미가 울어대는 걸 보고 기사에게 얘기했더니 이렇게 물었다. "잡아버릴까요?"

 

교장실에서 내다보면 남쪽으로는 아파트가 솟아 그 꼭대기 위에 구름이 걸려도,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면 동산이 바짝 다가와 있어 분위기가 딴판이었다. 소나무가 주종인 그 동산은 가을이 깊어도 단풍 든 나무가 별로 보이지 않아 밋밋한 편이지만, 봄의 운치는 제법이었다.

 

한적한 그 방에서 앉아 있으면, 이내 뻐꾸기가 울었다.  "벅-욱, 벅-욱……"  감성이 무딘 것 같은 그놈들도 IQ가 아주 형편없는 새들은 아닌 것 같았다. 사람들이 별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뻑-욱, 뻑-욱" 하고 힘을 주어 울다가 "뻑뻑욱!" 하기도 했고, 사회가 좀 어지럽다 싶거나 교단에 무슨 짜증스러운 일이 있는 날 오전에는 아무래도 더 경망스럽게 외쳤다. "뻑-꾹! 뻑-꾹! ……"  그뿐이 아니었다. 그 작은 등성이 위로도 갖가지 구름이 지나갔고, 온갖 풀벌레가 날아와 교장실 창문을 기웃거리게 되는데다가 봄이 무르익은 날 오후에 퇴근하려고 나가보면 송화(松花) 가루가 자동차를 온통 노랗게 덮고 있었다.

 

 

#

 

 

송화가루……  고모가 만드는 부드럽고 달콤한 송화다식(茶食)은 일품이었다. 나는 그걸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채 이 나이가 되었고, 그때 그 사람들은 세상을 떠났다.  내 가슴속에 품고 있었던 그 사랑과 신뢰만큼 고모도 나를 사랑해 주지는 않았다. 고모뿐만도 아니었다. 그러므로 예순여섯 해가 될 때까지 지켜본 '인간의 사랑'은 이제 지칠 때가 되었다.  

 

송화가루……  궤간을 오가며 「윤사월」 같은 詩들을 암송하시던 우리 담임 선생님. 국어 선생님. 선생님께서 詩를 암송하시면 나중에는 아무도 웃지 않게 되었고 이내 진지해졌다. '또 저러시는구나…… 어떻게 저렇게도 詩를 좋아하실까……'  선생님들께서 주무시는 숙직실에서 담배를 피워 물고 바둑을 두다가 하필이면 그 선생님께 붙잡혀 간 날 저녁, 시내에서 만나 추어탕에 막걸리를 사주시던 우리 선생님…… 술도 詩처럼 드시던 우리 선생님……  새로 '교사'가 될 수 있다면…… 그 국어 선생님으로 환생하면 얼마나 좋을까……

 

 

 

윤사월

 

                         박목월

  

송화가루 날리는

외딴 봉우리

 

윤사월 해 길다

꾀꼬리 울면

 

산지기 외딴 집

눈먼 처녀사

 

문설주에 귀 대이고

엿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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