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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1159

알 수 없는 분노 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 푸아예의 시끌벅적한 분위기와 함께 그때의 대화를 떠올리면, 그 당시와 마찬가지로 삶의 공허함과 무의미함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그때는 지금과 달리, 이 세상의 아둔함, 더 정중하게는 비논리를 슬플 만큼 경솔한 행동이라고 이해했고, 여기에 별로 신경을 쓰지도 않았으며, 뿐만 아니라 웃으며 자랑스럽게 받아들이기도 했다.(231~232) * 소설 『순수 박물관』(오르한 파묵)에는 "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이라는 표현이 자주 눈에 띄었습니다. "그때의 대화를 떠올리면, (...) 그 당시와 마찬가지로 삶의 공허함과 무의미함을 느끼게 된다." 삶의 공허함, 무의미함? 나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런 게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 그만큼 긍정적이었나? 천만에요! 사는 데 정신이 팔려서 이 생각 .. 2020. 7. 4.
아름답고 신비로운 여행 정말인지 몰라도 20년을 키우면 주먹만 하게 된다는 마리모 앞쪽으로 넓게 내려다보여서 비행기 조종석에서 내려다보는 아름다운 풍경이 그렇지 않을까 싶은 곳이었습니다. 나는 그곳의 왼쪽, 선생님은 오른쪽에서 1년간 아이들을 가르치며 지냈습니다. 다 지내놓고 보니까 우리는 서로 옆 교실에 있었습니다. 어떤 곳이라고 해야 할까요…… 우리는 어떤 곳에 있었다고 하면 좋을까요…… 우리가 1년을 보낸 그곳은 정녕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꿈속에서나 볼 수 있는 곳이어서 나는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아이들과 지낸 교실들은 다 그렇게 아름다운 곳이었을까요? 이제 나는 그곳을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그 길에 대한 걱정이 깊었습니다. 내려가는 길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자칫하면 그 낭떠러지에서 추락하게.. 2020. 7. 2.
시계 고치기 1 대개 여기저기서 선물 받은 것들입니다. 나도 저것들도 결국 허접해졌습니다. 나처럼 처음부터 허접한 것도 있었습니다. 허접한 나는 일쑤 허접한 그것들을 만집니다. 건전지를 갈아 끼우거나 0점 조정하듯 시간을 맞추고 게으름을 피운 침이 있으면 강제로(시침이 게으름을 피웠다면 분침을 붙잡아 고정시킨 채로) 좀 돌려주는 정도입니다. 건전지만 갈아 끼우면 되는 시계인데도 추가 달려 있으면 수평도 잡아줍니다. 기껏 그 정도지만 누가 보면 '이상하네. 허접한 사람이 저걸 고치네' 할 것입니다. 곤혹스러운 일은 시계 고치는 꿈을 꾸는 것입니다. 꿈속에서는 결코, 단 한 번도 시계를 고쳐놓은 적이 없습니다. 꿈이 시작되면 ‘아, 또 이 일이 벌어졌구나!’ 생각합니다. 가만 두었는데도 부속품들이 와르르 쏟아져 산산이 .. 2020. 6. 25.
언년이의 죽음 언년이가 죽었다는 건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물어보기도 그렇고 찾아가 볼 용기도 없지만 미심쩍은 점이 없지 않았다. 언년이를 괴롭혀오던 거시는 며칠 전 모조리 축출되었는데도 언년이가 죽었다? 그게 말이 되는가? 언년이네 아버지가 주변 사람들 말에 따라 작심하고 장날 그 핑크빛 회충약 1인분을 사다 먹였고, 언년이는 음식물 찌꺼기는 눈 닦고 봐도 보이지 않는, 순전히 하얀 거시만 소복하게 세 무더기나 쏟아냈다고 했다. 언년이가 쏟아냈다는 거시 세 무더기를 내가 직접 보았던가? 본 것 같다. 거시 무리가 서로 속으로 들어가려고 우글거리는 모습, 착하게 살아가는 척 위선을 떨다가 지옥 바닥에 떨어진 인간들이 벌거벗고 우글거리듯 혹은 수십 마리 뱀이 뒤엉켜 축구 공보다 더 크고 둥근 덩어리를 이룬 채 잠시도 .. 2020. 6. 16.
어떤 여성일까? 45초간 수많은 사람과 건물 들이 땅속으로 사라진, 오르한 파묵의 이스탄불 지진 이야기에서 다음과 같은 문장을 보았다. "삶의 가장 은밀하고 잔인한 규칙이, 벽이 붕괴되고 넘어져 내부가 보이는 집 안에 있는 물건들처럼 드러났던 것이다." ‘삶의 가장 은밀하고 잔인한 규칙’이란 어떤 것일까? 그러한 드러남은 짧고 강렬한 지진의 경우에 더 심한 것일까, 아니면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강력한 힘으로 전 세계를 짓눌러 미증유의 변화를 강제하고 있는 코로나 19와 같은 현상에서 더 심한 것일까? 코로나 19 바이러스는 그 모습을 보여주지도 않고 내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현실적인 두려움이 되고 있다. 백신은 아무리 조급해도 절차에 따라 개발된다는 뉴스를 보며 초조해지고, 시인들은 시(詩)는 백신 .. 2020. 6. 9.
쓸데없는 기억 내 왼쪽 발등 바깥쪽 부분에는 대여섯 살 적의 한겨울, 꽁꽁 얼어붙은 논두렁에서 스케이트를 타다가 나보다 네 살이 더 많은 동네 형의 송곳에 찔려서 생긴 상처가 겨울 내내 아물지 않아서 생긴 검붉은 상처의 흔적이 남아 있다. 나는 살아오면서 그에게 단 한 번도 그 얘기를 꺼내지 않았는데 얼마 전에 그가 유명을 달리했다. 그는 나쁜 인간이 아니었고, 게다가 공교롭게도 나의 사촌 누나 한 명과 결혼까지 한 것이었다. 나는 나의 이 상처의 흔적에 대해 아무에게도 이야기한 적이 없고 마침내 이젠 이야기를 할 수도 없게 되었다. 그가 영영 죽어버렸기 때문에 이젠 그 흔적을 보여주며 얘기한다 해도 믿어줄 사람이 없게 된 것이다. 써먹을 수도 없는, 쓸데없는 기억이 된 것이다. 인공지능은 이미 저승으로 간 사람이 생.. 2020. 6. 2.
나의 바다 내가 그에게 가서 울고 싶었을 때 그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내가 모든 걸 감추고 의젓한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을 때 그는 내가 울음을 터뜨리게 했습니다. 내가 내 얘기를 다 하겠다고 했지만 나는 단 한 마디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가 거절한 것은 아니었고 내가 말을 꺼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이미 다 아는 것 같았습니다. 내가 가슴이 답답하다고 했을 때 그는 그의 너른 가슴을 보여주고 내 가슴을 찢어버리려고 해서 나는 얼른 가슴을 부여잡고 주저앉았습니다. 그는 생각과 움직임으로만 다가오고 웬만해선 말을 하진 않으려고 했습니다. 나는 늘 그를 생각하며 지내게 되었습니다. 2020. 5. 27.
L 형! 꽃 지는 날, 보셨습니까? L 형! 꽃 지는 날, 보셨습니까? L 형! 사진을 잘 못 찍어서 그렇지 저 속에 들어가면, 그러니까 저 아래를 걸어가면, 제정신이기가 어려웠습니다. 이태 동안 아이와 함께 저 터널 속을 걸어 다니던 그 시간은 정말 좋았습니다. 누가 "행복했던 순간 좀 얘기해 봐" 하면 저 시간을 떠올릴 것입니다. 아예 뭐라고 표현하기조차 싫은 그 시간들....... L 형! 코로나 사태는 그만 모든 것을 바꾸어버렸습니다. 심지어 아이들을 만나는 일조차 자유롭지 못합니다. 좀 기다리고 생각하며 참고 있으면 길이 보일 줄 알았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가고 계절이 바뀌고 또 바뀌려 하고... 이젠 이 가슴속에 남아 있는 게 거의 없습니다. L 형! 지난봄 어느 날, 창 너머로 저 벚꽃을 내다보며 무심한 벚꽃만 피었구나 했는데.. 2020. 5. 24.
우스운 스승의 날 스승의 날이란 게 지나갔습니다. 누가 그런 날을 정해달라고 했을까요? 1969년에 교사생활을 시작하면서 당장 '뭐 이런 날이 다 있나?' 했지요. 낯간지러워서요. 그렇게까지 생각할 필요는 없는가요? "누가 당신 좋으라고 정했나?" 하면 그것도 그렇고, '꼴에 한때 선생이었다고.' 해도 그러니까 그냥 '난 상관도 없네~' 하고 지나가면 그만일 수도 있으니까요. "스승님!" 하고 엎어질 사람이나 '우리 선생님!' 하고 절절하게 그리워할 사람도 있을 것 같지 않고요. 그렇게 오십여 년…… 퇴임한 지 오래되었는데도 그날만 되면 아침부터 전화가 오거나 문자 메시지가 도착했다는 신호가 울리거나 했습니다. '얘가 지금 어떤 생각을 하며 연락했을까? 아직 죽지 않았구나! 나도 곧 늙을 텐데 이젠 함께 늙어가겠네, 하고.. 2020. 5. 18.
반 고흐의 아포리즘 - '영혼의 편지'에서 - 「슬픔」(『반 고흐, 영혼의 편지』 ) 인물화나 풍경화에서 내가 표현하고 싶은 것은, 감상적이고 우울한 것이 아니라 뿌리 깊은 고뇌다. 말 그대로 발걸음을 뗄 때마다 새로운 소재가 눈에 들어온다. 그림 속에는 무한한 뭔가가 있다. 결국 나를 감동시키는 것은 자연 안에 모두 들어 있다. 자연에 대한 정직한 탐구가 필요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나중에라도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를 것이다. 그 풍경이 나에게 말을 걸었고, 그것을 빠른 속도로 받아 적었다. (…) 그것은 누가 가르쳐준 방법이나 체계 안에서 습득한 인습적인 언어가 아니라 자연 그 자체에서 나온 언어다. 바다 풍경을 담은 스케치에는 황금색조의 부드러운 느낌이 있고, 숲 그림은 어둡고 진지한 분위기를 띤다. 인생에 이 둘 모두 존재한다는 게 다행스럽다.. 2020. 5. 11.
2020 봄 저기 새로 돋은 나뭇잎들 좀 봐! 벌써 저렇게 활짝 폈네. 이제 어쩔 수 없지. 저걸 무슨 수로 막아. 그냥 두는 수밖에…… 2020. 4. 29.
아름답게 춤을 추는 사람들 "우리는 불경기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그 남자가 말했다. "유감이지만 여러분 모두를 내보내야 합니다. 이제, 여러분이 내 앞으로 줄을 서면 여러분의 이름과 전화번호, 주소를 적도록 하겠습니다. 사정이 좀 나아지면, 제일 먼저 여러분에게 연락이 갈 겁니다." 사람들은 줄을 서기 시작했지만, 얼마 안 있어 서로 밀치고 욕을 해댔다. 나는 그 줄에 끼지 않았다. 나는 동료 노동자들이 충성스럽게 자기의 이름과 주소를 불러주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나는 바로 저런 인간들이 파티 같은 데서 아름답게 춤을 추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사물함으로 걸어가서, 흰 작업복을 걸어놓고, 국자를 문에 기대놓고는, 그곳을 빠져나왔다. 찰스 부코스키 『팩토텀』(문학동네, 2017) 289~290. 동경만 해온 나라들이 '코로.. 2020. 4.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