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초간 수많은 사람과 건물 들이 땅속으로 사라진, 오르한 파묵의 이스탄불 지진 이야기에서 다음과 같은 문장을 보았다.
"삶의 가장 은밀하고 잔인한 규칙이, 벽이 붕괴되고 넘어져 내부가 보이는 집 안에 있는 물건들처럼 드러났던 것이다."
‘삶의 가장 은밀하고 잔인한 규칙’이란 어떤 것일까?
그러한 드러남은 짧고 강렬한 지진의 경우에 더 심한 것일까, 아니면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강력한 힘으로 전 세계를 짓눌러 미증유의 변화를 강제하고 있는 코로나 19와 같은 현상에서 더 심한 것일까?
코로나 19 바이러스는 그 모습을 보여주지도 않고 내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현실적인 두려움이 되고 있다.
백신은 아무리 조급해도 절차에 따라 개발된다는 뉴스를 보며 초조해지고,
시인들은 시(詩)는 백신 개발하듯 그렇게 쓰는 게 아니라는 걸 설명하고 싶은 것처럼 이 상황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한가로이 이미 써놓았음직한 시들만 보여주는구나 싶고,
계절의 변화는 속절없어서 서향 창문으로 초여름 햇살이 온 방을 침범한 저녁나절,
돌연 그 피아노 선율이 내 방을 방문했다.
평화롭고 망설임 없이……
아, 음악이 있었지!
위층일까?
아니지? 위의 위층? 서너 층 위?
밖으로 나가 그 선율이 오는 곳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하진 않았다.
그 흐름을 놓쳐버릴 것 같은 느낌으로 미동도 없이 앉아 듣기만 했다.
5분쯤? 놀라움과 즐거움 때문에 시간의 흐름을 놓쳤을 수도 있겠지? 그럼 10분쯤?
'선물'은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그런데 그 정도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이번에는 노래까지 불러주었다.
고운 노래. 좀 구체적으로는 결코 당당하지 않고 수줍은 듯 애절한 노래.
숨도 편하게 쉬지 않고 그 선율을 따라가보았지만 그건 내가 알고 있는 곡이 아니었고 암기할 수 있는 곡도 아니었다.
더구나 몇 번을 들어도 좋을 그 연주와 노래는 딱 한 번으로 끝나고 말았다.
어떤 여성일까?
KBS '열린음악회'에 출연했던, 이름이 뭐였더라?
그 예쁜 성악가가 우리 아파트로 이사 왔나?
그럴 리가... 나는 늙어서 작은 아파트를 찾았지만 그 성악가는 아직 젊은 분이었잖아. 그런 이가 하필 이렇게 협소한 집에 거주할 리가 없겠지?
이웃들 면면을 더듬어보았다.
아직 만나지 못했을 수도 있겠지?
내가 이 분통만 한 아파트로 이사한 것은, 지금 따져보니까 그새 반년이 지났다.
반년이라니! 두 달쯤은 어색해하며 지냈고 넉 달 이상을 코로나로 갇혀 살았잖아! 1주 2주도 아니고 한두 달도 아니고 반년이라니…… 게다가 아직 끝도 보이지 않잖아……
그렇긴 하지만 그 반년만에 나는 이런 이웃을 ‘만나게’(?) 된 것이다. 평화롭고 아름다운!
나는 왠지 ‘괜찮을 것 같다’ ‘괜찮겠다’는 느낌이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언젠가 저 여인은 또 그 노래를 들려주겠지?
이웃들을 잘 살펴봐야지. 마스크를 쓴 채로라도 노인다운 미소를 보내주어야지.
그러다 보면 백신도 개발되고, 사회도 안정되고, 사람들도 즐거워하고, 결코 2019년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단언한 매정한 그 학자도 "좀 잊고 살아도 괜찮을 것 같다"고 미소를 지으며 '양보'해 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