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반 고흐, 영혼의 편지』 )
인물화나 풍경화에서 내가 표현하고 싶은 것은, 감상적이고 우울한 것이 아니라 뿌리 깊은 고뇌다.
말 그대로 발걸음을 뗄 때마다 새로운 소재가 눈에 들어온다.
그림 속에는 무한한 뭔가가 있다.
결국 나를 감동시키는 것은 자연 안에 모두 들어 있다.
자연에 대한 정직한 탐구가 필요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나중에라도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를 것이다.
그 풍경이 나에게 말을 걸었고, 그것을 빠른 속도로 받아 적었다. (…) 그것은 누가 가르쳐준 방법이나 체계 안에서 습득한 인습적인 언어가 아니라 자연 그 자체에서 나온 언어다.
바다 풍경을 담은 스케치에는 황금색조의 부드러운 느낌이 있고, 숲 그림은 어둡고 진지한 분위기를 띤다. 인생에 이 둘 모두 존재한다는 게 다행스럽다.
바로 그때 받은 감동 덕분에 사소한 세부는 무시하고 뛰어넘게 되었고, 초원이나 구름을 그리는 일보다 인간 존재에 관심을 집중하는 것이 더 훌륭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인간이야말로 우리의 관심을 끌고, 생각하게 만들며, 직접적으로 우리를 감동시키기 때문이다.
규칙은 지켜졌을 때에만 인정받을 수 있고 가치가 있다.
위대한 일이란 그저 충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연속되는 작은 일들이 하나로 연결되어서 이루어진다.
사랑에 빠지면 태양이 더 환하게 비추고 모든 것이 새로운 매력을 갖고 다가온다.
늙고 가난한 사람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들을 묘사하기에 적합한 말을 찾을 수가 없다.
세상에는 '더 많은 것을 원하면서 모든 것을 잃는 자들'이 있기 마련이다.
극적인 효과란 '자연의 한 구석'과 '그 자연에 더해진 인간'을 가장 잘 이해하게 해주는 요소다. 렘브란트의 초상화에서도 같은 것을 발견할 수 있지. 그것은 자연을 넘어서는 것이다.
나는 내 그림을 제각기 다른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되며, 그걸 모두 합칠 때 하나의 작품이 된다고 생각한다.
많은 화가들은 텅 빈 캔버스 앞에 서면 두려움을 느낀다. 반면에 텅 빈 캔버스는 "넌 할 수 없어"라는 마법을 깨부수는 열정적이고 진지한 화가를 두려워한다.
밀레에 대해 이렇게 길게 쓰는 것은, 도시에 사는 화가가 농부를 아무리 멋지게 그려도 그 인물은 농부라기보다 파리 근교에 사는 사람을 떠올리게 할 뿐이라고 네가 지난 편지에 썼던 내용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농촌생활을 다룬 그림에서 향수냄새가 나서는 안 된다.
그래도 우리는 계속해서 진실하고 정직한 그림을 그려야 한다.
농부는 여러 가지 점에서 문명화된 세계보다 훨씬 더 나은 세계에서 살고 있는 것 같다.
전 시대 그림의 등장인물이 하지 않은 것, 그건 바로 노동이다.
나는 인물이 아카데미식으로 정확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밭갈이 하는 농부의 사진을 찍는다면, 사진 속의 농부는 더 이상 밭을 갈지 않을 게 분명하다.
(…)
대상을 변형하고 재구성하고 전환해서 그리는 법을 배우고 싶다. 그 '부정확성'을 배우고 싶다. 그걸 거짓말이라 부르겠다면, 그래도 좋다. 그러나 그 거짓말은 있는 그대로의 융통성 없는 진실보다 더 '진실한 거짓말'이다.
사람의 눈은, 그 아무리 장엄하고 인상적인 성당도 가질 수 없는 매력을 담고 있다.
거지든 매춘부든 사람의 영혼이 더 흥미롭다.
자살하는 것보다 유쾌한 삶을 사는 게 더 낫다.
문명화된 사람들 대부분은 우울증과 비관론이라는 병에 걸려 있다.
내가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은 좋은 초상화를 그리는 것이다.
우리를 돕거나 위안하기 위해 개입하는 어떤 힘이 우리 위에 존재한다는 믿음은 내가 받아들이기에도 또 다른 사람에게 권하기에도 꺼림직하다. 신은 이상한 존재여서 솔직히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걱정된다.
내가 가장 불안하게 생각하는 점은, 글을 쓰려면 공부를 더 해야 한다는 네 믿음이다. 제발 그러지 말아라. 내 소중한 동생아. 차리리 춤을 배우든지 장교나 서기 혹은 누구든 네 가까이 있는 사람과 사랑을 하렴.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것은 모든 것을 용서하는 것이다. 우리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면, 마음의 평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공부는 독창성을 죽일 뿐이다. 네 자신을 즐겨라! 부족하게 즐기는 것보다는 지나치게 즐기는 쪽이 낫다.
형(고흐)은 (…) 낡은 생각을 뒤집는 챔피언이라 해야겠지(동생 테오).
"소설가에게는 소설을 통해 자연을 더 아름답고, 더 단순하며, 훨씬 큰 위안을 줄 수 있게 과장하고 창조할 자유가 있다."(모파상)
"재능은 오랜 인내로 생겨나고, 창의성은 강한 의지와 충실한 관찰을 통한 노력으로 생긴다."(플로베르)
이 세상은 신이 뭘 해야 하는지 잘 모를 때, 제정신이 아닌 불행한 시기에 서둘러서 만들었음이 분명하다. 선량한 신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 그것은 자신의 습작을 만들기 위해 그가 많은 수고를 했다는 정도지.
인생은 너무 짧고 너무 빨리 지나간다. 화가라면 그래도 그림을 그려야겠지.
성경은 때로 우리를 절망에 빠뜨리고 분노하게 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전염될 수 있는 어리석음과 편협함으로 우리를 공격하고 혼란스럽게 하네. 결국 우리를 깊은 슬픔에 잠기게 만들고. 그러나 성경이 주는 위안도 있지 않은가. 막막한 껍질 속에 숨어 있는 쌉쌀한 과육과도 같은 위안.
뛰어난 선생 지엠에 따르면, 남자는 더 이상 발기할 수 없는 순간부터 야망을 품게 된다고 한다.
우리는 삶 전체를 볼 수 있을까 아니면 죽을 때까지 삶의 한 귀퉁이밖에 알 수 없는 것일까?
누군가 내 그림이 성의 없이 빨리 그려졌다고 말하거든, "당신이 그림을 성의 없이 급하게 본 것"이라고 말해 주어라.
작품 속에 있던 비바람이 계속해서 휘몰아칠 때면, 잠시 취하기 위해 한 잔 마시곤 한다. 그것은 미련과 후회 앞에서 미쳐버리는 것과 같다.
구더기가 득시걸거리는데도 아직 공식적인 전통이 유지되면서 세상을 지배하지만, 궁극적으로 볼 때 이제 전통은 무능하고 나태하다.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지만, 예술을 창작하는 데 드는 것보다 적은 경비로 생명을 창조할 수 있으리란 생각을 하면 우울해지지 않을 수 없다.
가족이나 조국은 현실보다 상상 속에서 더 매력적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고통에 대해, 그 양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다.
사람이 그림만 그리면서 살 수는 없다.
고갱과 베르나르에게도 썼지만 나는 화가들의 의무가 꿈꾸는 것이 아니라 사고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머니께) 저는 계속 고독하게 살아갈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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