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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1159

가을이 가는 걸 보셨습니까? 가을이 가는 걸 보셨습니까? 언제였습니까? 저렇게 걸어갔습니까? 언약은 있었습니까? 홀연히 떠났습니까? 인사는 나눴습니까? 그래, 괜찮습니까? 2019. 12. 6.
보증서 1 휴대전화를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휴대하지 않게 되었으니 손목시계에 대한 기억이 까마득한데, 돌연 향수가 일면서 다시 갖고 싶었다. 점원에게 물었더니 19,000원이라고 했고 아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2 시계는 잘 가고 있다. 정확하다.값이 저렴해서 혹 며칠 만에 엉터리라는 게 드러나지 않을까, 잠시 의심도 했지만 전혀 염려할 게 없다는 듯 노래처럼 강물처럼 잘도 흐른다.그게 신기해서 시계 가게를 찾아가 추가로 몇천 원 더 지불하거나 빈말로라도 고맙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언뜻 실없는 생각도 했다.      3 그 애정과 신뢰는 그렇게 시계만 봐도 확실했는데, 무엇을 좀 찾으려고 책상 위를 뒤적이다가 '보증서'라는 걸 발견하게 되자 더욱 깊어졌다. 아래쪽에 기종, 보증 기간(구입일로부터 2년간),.. 2019. 12. 3.
혼백이 오는 날 블로그 『봄비 온 뒤 풀빛처럼』에서 「배웅」이라는 글을 읽다가 최근에 『浮生六記』(沈復)에서 혼백이 오는 날에 대한 글을 본 것이 생각나서 두 글에서 일부를 각각 옮겨놓았다.  사돈의 팔촌보다도 인연이 없는 초면의 언니 시댁 형제, 조카들과 함께 화장장으로 갔고,같은 상에서 아침 식사도 했고, 모든 장례절차를 마치고 모두들 각각 헤어지기 전에 일반 식당에서 점심 식사도 같이했다.일반 식당에서 식사할 때는 그분들도 긴장이 풀려서 웃으면서 점심도 맛나게들 자셨다.한 사람이 태어나고 다사다난한 일생을 살다가 가시는 길에 한 사람이라도 배웅을 하는 사람이 더 있어야 할 것 같아서 그 어색한 자리에 함께했던 것이고. 「배웅」에서 ☞ https://asweetbasil.tistory.com/17952360  풍속에.. 2019. 11. 27.
유치원에서의 추억 1 유치원에서 '교원능력개발평가'를 실시했습니다.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원장 선생님, 원감 선생님, 담임 선생님, 체육 선생님 네 분을 평가하는 것인데 나는 우리 유치원이 너무나(!) 감동적이어서 항목마다 "매우 그렇다"에 표시를 했습니다. 네 분의 선생님께서 하시는 일을 안내해 놓았는데 우리 아이 담임선생님께서는 이렇게 적어놓으셨습니다. 유아들의 창의적인 생각과 즐거운 유치원 생활을 위하여 첫째, 만 5세 누리과정을 이해하고 다양한 교수·학습 방법에 대한 연구를 실시하여 유아들의 발달 수준에 맞게 적용하고 있습니다. 둘째, 국가수준의 누리과정을 ○○○반의 특성과 유아 개별적 수준을 고려하여 5개 생활 영역이 골고루 발달할 수 있도록 지도하고 있습니다. 셋째, 유아들에게 안정적이고 질문에 허용적인 태도를 .. 2019. 11. 17.
책 버리기 책 버리기는 '사건'입니다. 잊혀도 상처는 남습니다. 함께하기가 어려워 헤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도 손수레로 세 차례 실어냈습니다. "어허! 죽을 때 가지고 가시지 왜 자꾸 버리세요?" 재활용품을 정리하던 경비원이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누가 듣고 있지 않을까 싶어 얼른 주변을 두리번거렸습니다. '저 꼴에 책을 읽는단 말이지?' 단 한 사람이라도 보게 되면 그렇게 생각할 것이 뻔합니다. 지난주에 내다버릴 땐 아뭇소리 않고 바라보기만 했었습니다. 순간 나도 덩달아 외쳤습니다. "벅차서요! 남아 있는 것도 다 가져가지 못하겠는걸요!" 정말 그걸 다 갖고 가라면 그 먼길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강을 건널 땐 또 어떻게 하겠습니까? 죽을 수도 없을 것입니다. 경비원은 큰 소리로 웃기만 했습니다. "어~ .. 2019. 11. 7.
아들은 매정했나? 1 2014년 겨울에 나온 『문학동네』 창간 20주년 기념호를 뒤늦게 읽다가 연전에 홀연히 남녘으로 떠나버린 동향 친구가 생각났습니다. 「영자」(김훈)라는 단편소설에 나온 이 대목 때문이었습니다. 월급에서 방세 내고 밥 사먹고 마을 노인들 환갑 칠순 팔순 구순 잔치에 축의금 내고 초상 때 부의금 내고 경로잔치 때 떡값 보내고 나면 남는 것은 없었지만 아버지의 돈을 받지 않고도 연명할 수 있게 된 것은 다행이었다. 내 친구 J가 처가 곳의 남아도는 게 땅이라는 그 땅을 빌려 농사를 지으려고 내려가기 전에 이 소설을 읽었어도 그런 결정을 했을지 알 수는 없는 일이지만 J는 단편소설 같은 건 여간해서 읽지 않는 사람이어서 이러나 저러나 이미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했습니다. 2 그는 오랫동안 푸줏간을 하고 있었.. 2019. 10. 31.
우리 동네 도서관 우리 동네 도서관은 참 좋은 곳. 집에서 '열 발자국'도 되지 않고 늘 가고 싶은 곳이긴 한데 갈 일이 생기질 않습니다. 가고 싶지 않을 때가 없는 곳, 그런 곳은 세상에 거기 밖에 없을 것입니다. 지금 보는 책들이 영 끝날 줄을 모르고, 그것들을 다 본다 해도 집에는 읽지 않은 책이 수두룩합니다. 그리움만 쌓이는 우리 동네 도서관. 가고 싶지 않을 때가 없는 곳. 2019. 10. 27.
겨울걱정 겨울걱정 '뭘 봐!' '아니야, 그냥 눈에 띄었을 뿐이야.' '아, 그래? 추운데 어디 가? 괜찮아? 난 걱정이야.' '사실은 나도 그래.' '늙어가니까 말을 꺼내기도 어렵지?' '응, 그걸 어떻게 알아?' '나도 늙었어…….' '다녀오는 거야? 난 이쪽으로 옮겼어. 바람이 덜 부는 것 같아.' '오늘은 거기서 .. 2019. 10. 18.
"이 행성은 아주 아름답고, 아직은 살 만하다." 출처 : 연합뉴스(2019.10.12) "우리은하, 이웃한 大마젤란서 위성은하 6개 이상 강탈" 1 1광년(光年)은 빛이 1년간 가는 거리라고 해서 그게 정말이냐고 기회 있을 때마다 물었습니다. "그렇다!"는 대답을 듣고 또 듣고도 미심쩍어서 인터넷 서핑을 해보곤 했는데, 이번에 아무래도 그게 사실이라는 걸 인정해야만 할 기사를 봤습니다. 2 "외계행성은 너무 멀다. 아직 살 만한 우리 행성부터 보존하라." 태양계 밖 외계행성을 처음 발견한 공로로 올해 노벨 물리학상을 받게 된 스위스 천체물리학자 미셸 마요르(77)가 지구를 망치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외쳤다는 기사였습니다. 마요르 박사는 스페인에서 열리고 있는 학술회의에 참석 중이었는데 AFP 통신 기자가 "인류가 외계행성으로 이주할 수도 있느냐?"고 묻.. 2019. 10. 12.
세 유명 일본인 해방 전 학교교육을 받은 사람 치고 가와카미 하지메〔河上肇〕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1879년 생으로 교토대 교수가 되었고 1917년에 낸 『가난 이야기貧乏物語』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후 점차 마르크스주의로 기울어 대학에서 쫓겨나 지하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5년의 선고를 받았다. 출옥 후에는 국내 망명생활로 들어갔고 종전 후 1946년 6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그의 『자서전』도 고평을 받았고 한시도 많은데 그중 다음과 같은 것도 있다.     지조를 지켜 세상 밖으로 노닐고가난을 감수하며 글을 팔지 않았다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 없이힐난의 눈과 푸른 구름을 대했다     그는 많은 일화를 남겼는데 그중 널리 알려진 것은 그의 옥중생활의 삽화다. 우리 사이에서도 널리 알려진 모리나가.. 2019. 10. 11.
가을문 1 가을로 들어가는 걸 개별로 그러니까 내 마음대로 정할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들어가겠습니까, 말겠습니까?" "……." "잘 생각해서 결정하십시오. 들어가겠다고 결정하고 나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합니다. 말하자면 일방통행입니다. 후회 없는 결정을 하시기 바랍니다." 2 그 문 앞에서 오랫동안 망설이며 생각에 빠질 것 같습니다. '내가 마음만 먹으면 이 가을 속으로 들어가 버릴 수 있단 말이지?' '다시는 돌아 나오지 못할 길을 가게 된단 말이지? 그 가을 어디쯤에 앉아서 좀 쉬다가 귀가(歸家)하거나 그럴 수는 없단 말이지?' '가버릴까? 아무래도 가는 게 낫겠지?' '그렇지만 말도 하지 않고 나왔는데……. 어수선한 자리도 그대로 두었고…… 소지품도 없이? 신용카드 한 장도 없이?…….' 3 문지기는.. 2019. 10. 8.
오십 년 전 # 1. 이우학교 방문 이우학교를 방문하게 되었다. 방문단은 내일 아침 일찍 개별로 그 학교 앞에 집결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그 시각에 도착하려면 어떻게 해야 좋을지 걱정스러웠다. 새벽에 일어나서 출발하는 방법, 아예 오늘 오후에 그 학교 인근의 숙소에 가서 하룻밤을 지내는 방법을 생각했고, 아무래도 오늘 출발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이우학교? 내가 교장이었을 때, 나는 내가 직접 가 본 적이 없는 이우학교에 우리 학교 교감과 부장교사 등 열세 명을 보내 관찰하고 오게 했었다. 그때 나는 학교에 남아 있었는데 교무부장을 맡고 있는 교사가 그 학교를 참관하는 중에 문자 메시지를 보냈었다. '교장선생님꼐서 이 학교 교장인 것 같은 느낌이에요.' 말하자면 내가 강조하는 것들을 그 학교에서 실제로 볼 수 .. 2019. 9.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