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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아들은 매정했나?

by 답설재 2019. 10. 31.

 

 

 

1

 

2014년 겨울에 나온 『문학동네』 창간 20주년 기념호를 뒤늦게 읽다가 연전에 홀연히 남녘으로 떠나버린 동향 친구가 생각났습니다. 「영자」(김훈)라는 단편소설에 나온 이 대목 때문이었습니다.

 

월급에서 방세 내고 밥 사먹고 마을 노인들 환갑 칠순 팔순 구순 잔치에 축의금 내고 초상 때 부의금 내고 경로잔치 때 떡값 보내고 나면 남는 것은 없었지만 아버지의 돈을 받지 않고도 연명할 수 있게 된 것은 다행이었다.

 

내 친구 J가 처가 곳의 남아도는 게 땅이라는 그 땅을 빌려 농사를 지으려고 내려가기 전에 이 소설을 읽었어도 그런 결정을 했을지 알 수는 없는 일이지만 J는 단편소설 같은 건 여간해서 읽지 않는 사람이어서 이러나 저러나 이미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했습니다.

 

 

2

 

그는 오랫동안 푸줏간을 하고 있었는데 가계 운영이 어려워지지 당장 집어치우고 작은 빌딩 경비원으로 들어갔습니다. 뱃장은 편하다고 했지만 그렇게 매인 몸이 되자 이번에는 서로 만나기조차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 모임에 나오더니 수인사를 끝내자마자 나지막하지만 힘이 들어간 음성으로, 하필이면 내가 앉은 쪽을 향해 중대 발표를 했습니다.

"나도 이제 살게 됐네!"

 

일순, 우리는 숨을 죽이고 그를 바라보았습니다. 각자 머리를 굴리고 있었을 것입니다.'저 친구 왜 저러지?' 그는 웬만해선 그런 발표를 할 일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푸줏간을 접을 때도 아무 말이 없었고 빌딩 경비원으로 들어갈 때도 아무도 몰랐는데 중대 발표를 할 일이라면 어떤 일일지 짐작하기가 불가능했습니다.

"내 아들이 이번에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네!"

 

 

3

 

돌연, 우리는 순서 없이 한꺼번에 입을 열었습니다.

"대단하네!"

"그 어렵다는 시험을!"

"너도나도 머리를 싸매고 준비한다는 그 시험 아닌가!"

"자넨 성공했네! 축하하네!!!"

나도 좀 아는 양 거들었습니다. "그 시험이 바로 고시지!"

 

내가 그렇게 말한 것은, 정말 축하해야 할 일이기도 했고, 나는 돈은 없지만 국가공무원으로 41년이나 일하고 막 퇴임한 때였고, 그동안 친구들에게 조금이라도 잘난 척하지 않으려고 신경을 써왔는데도 그가 하필이면 나를 바라보며 그 중대 발표를 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우리의 술잔을 연거푸 받았고 구체적인 축하 메시지를 연달아 들으며 점점 더 흥분해서 나중에는 그 아들이 발령을 받았다는 지방 도시로 아들을 따라 이사를 하겠다는 발표까지 했습니다.

 

 

4

 

그러나 그러던 그가 격월로 열린 그 모임에 나올 때마다 점점 더 말수가 줄어드는 듯하더니 마침내 남해안 처가(妻家) 마을로 농사를 지으러 내려갔다는 말을 들게 된 것입니다.

아들이 봉급을 받아도 부모에게 돈 한 푼 주지 않는다는 것이었고, 자신도 살아가기가 어렵다며 온갖 핑계와 변명을 늘어놓더라는 것이었고, 이미 점을 찍어 놓은 사람이 있지만 언제 돈을 모아서 결혼을 할 수 있을지 막막하다는 말까지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그렇게 떠났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초겨울이었습니다. 쓸쓸한 바람이 불어서 더 쓸쓸했습니다. 친구들과 헤어져 돌아오는 내내 생각하다가 전철역을 벗어나서 버스를 기다리며 이번에는 내 젊은 날을 생각했습니다.

몇만 원 되지도 않는 그 봉급을 바라보는 '식구'가 참 많았습니다. 부모 말고도 동생이 일곱이었는데 모두들 고생을 하고 있지만 나만이라도 잘 살게 되었다고 했으며, 그렇게 말하며 모두들 나를 바라보았는데 나는 잘 살게 되었다는 그 말이 정말인 줄 알았습니다. 초봉이 2만 몇천원이었고, 여남은 명이 계를 결성해서 매달 한 명씩 돌아가며 곗돈을 받으면 그게 5만원이었고, 그건 목돈이었는데 그 목돈은 저절로 쓸 데가 미리 생겼습니다. 그래서 담배조차 외상으로 피우면서도, 거실 가득 무슨 봉투나 박스, 핀 같은 것들을 늘어놓고 밤새 그걸로 '부업'을 하는 아내를 바라보면서도 "돈이 없다"는 시시한 말은 평생 하지 않고 지냈습니다.

 

내 얘기로 마치려고 하니까 개운치는 않지만 그렇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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