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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1153

추억의 백자 목을 움츠리고 몸통을 크게 부풀린 항아리와 가장자리를 부드럽게 젖혀낸 그릇, 느긋한 자세로 때를 기다리는 듯한 연적 등, 그 절제가 가다듬어진 단순한 형태는 물론이고, 형용하기 어려운 유백색의 촉감은 도저히 인간이 만든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그래서 일전에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는 백자를 보고 인간이 아닌 다른 어떤 자재自在로운 존재가 만들어서 하사한 것 같다고 말했다. 화가 이우환 선생의「조선의 백자에 대하여」(《현대문학》 2021년 1월호 234~238)를 읽다가 또 그 술병을 떠올렸다. 평생에 "백자" 하면 나는 그 투박한 술병을 떠올리곤 한다. 그걸 챙겨두지 못한 자신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그렇지만 잘해야 초등학생 저학년이었거나 아직 학교에 들어가지도 않았을 아이가 뭘 보관하고 말고 했겠는.. 2021. 1. 24.
"내 남편이 술에 취해서 꽃을 사왔어요!" 보험 설계원인 70대의 필이 퇴근길에 쇼핑센터에 들렀다. 오랫동안 함께 살아온 70대 중반의 부인 낸시를 위해 꽃을 좀 사 가려고 그런 것이다. 꽃가게를 나서다가 사탕 가게를 발견한 그는 아내에게 줄 초콜릿도 한 상자 샀다. 집에 도착한 그는 꽃과 초콜릿을 양손 가득 들고 벨을 눌렀다. 낸시가 문을 열었다. 낸시는 필이 들고 있는 것들을 보고는 울기 시작했다. 필은 "왜 울어요?"라고 물었다. "오늘은 정말 끔찍한 하루였어요. 제일 좋아하는 케이크 접시를 떨어뜨려서 깼고요. 친구들 몇 명이랑 점심을 먹기로 했는데, 친구들이 아프다며 약속을 취소했어요. 전화기가 고장 나는 바람에 온종일 수리 센터에 연락하느라 진을 다 뺐고요. 그런데 이제 당신까지 술에 취해서 돌아오다니!" 《품위 있게 나이 드는 법》이라.. 2021. 1. 22.
하루 또 하루, 내일에 대한 기대 아버지는 손자와 손녀가 태어나면서 할아버지가 달라진 것이라고 추측했다. 내가 출판사에 편집자로 취직했을 때, 할아버지는 무척 기뻐했다. 모든 것을 직접 체험하면서 이 우주를 인식하기에 육신의 삶은 너무나 짧기에 인간은 말과 글을 통해 서로 협조함으로써 자신을 완성해나갈 시간을 단축해야만 한다는 할아버지의 말에 나는 백 퍼센트 동의한다. 덕분에 책은 우리의 나이 차이를 뛰어넘는 징검다리가 되어주었다. 그날도 나는 『알렉산드리아도서관의 불』이라는 신간을 들고 갔다. 고대 이집트에 있던 알렉산드리아도서관에 소장됐다가 도서관이 불타면서 유실된 책들을 다루는 내용이었는데, 얘기하다 보니 어느샌가 다산 정약용으로 이야기가 넘어가고 있었다. '모든 것을 직접 체험하면서 이 우주를 인식하기에는 육신의 삶은 너무나 짧기.. 2021. 1. 15.
지금 어디로 가고 있을까? 3·11(동일본대지진) 후의 어느 날, 폐허의 쓰레기 더미에 섞여 피아노가 내팽개쳐져 있는 영상을 보았다. 류이치 사카모토(坂本 龍一)는 텔레비전에서 "지금 우리는 여기서부터 음악을 생각해야만 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나는 그 후 작업을 시작하려고 하면 그 광경이 눈앞에 어른거리곤 한다. 그건 어쩌면 전 지구의 내일의 광경일지도 모른다고 여기다 보면 무얼 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는다. 이렇게(폐허의 쓰레기 더미에 내팽개쳐져 있는 피아노) 시작되는 이우환의 에세이 「틀어박힘의 저편」(《현대문학》 2020년 11월호 115~118)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의 재난으로 공포에 떨고 있는 인류 이야기로 이어지고 있었고 나는 저 풍경이 내다보이는 책상에 앉아 졸면서 그 글을 읽고 있었는데 그 졸음은 읽고 있었던 글.. 2021. 1. 13.
"인생을 다시 시작할 경우" 결혼 65주년 기념일을 맞은 80대 후반의 부부 마사와 데이비드(부부의 사생활 보호를 위해 가명을 썼다)가 지역 라디오 방송국에서 인터뷰를 했다. 기자가 그들에게 물었다. "만약 결혼생활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면, 그래도 지금의 남편 혹은 아내와 결혼하시겠습니까?" 이들은 둘 다 "그래요., 당연하죠."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인생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그래도 지금과 똑같은 생활 방식으로 사시겠습니까?" 노부부는 이번에도 긍정적으로 답했다. "자녀는요? 인생을 다시 시작할 경우, 그때도 자녀를 낳으실 건가요?" 그러자 마사는 주저 없이 외쳤다. "그럼요, 하지만 지금의 자식들은 싫어요." 버나드 오티스 지음 《품위 있게 나이 드는 법》(박선령 옮김, 검둥소, 2020, 52~53) .. 2021. 1. 6.
마리안의 행복한 일상 마리안은 아들과 같이 산다. 화요일 아침 7시에 마리안은 아들에게 일어나서 학교 갈 시간이라고 소리쳤다. 그러자 아들이 징징거렸다. "학교 가기 싫어요. 선생님들도 싫고, 구내식당 음식은 형편없고 학생들은 유치하고 비열하게 군다고요." 이 말을 들은 마리안이 말했다. "그래도 가야 해. 네가 교장이잖니." 버나드 오티스 지음 《품위 있게 나이 드는 법》(박선령 옮김, 검둥소, 2020, 79~80) 2021. 1. 2.
2020년 돌아보기 마침내 2020년이 가네. 텅 빈 것 같은 한 해. 사시사철 시도 때도 없는 감기 때문에 '혼자서' 마스크를 상용하다가 돌연 그걸 구하기조차 어려웠던 봄이 속절없었던 한 해. 옆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이 무서워서 미안했던 한 해. 속은 것 같은 한 해. 어처구니없는 한 해. 허접한 한 해. 개구리 발로 편자라도 박으려 하듯 벅차고 무기력했던 한 해. 날로 눈부셨던 문화, 문명이 돌연 옛 사진처럼 흐릿해져 버린 해. 이런 세월을 잘 이용하는 사람도 있을까 싶었던 해. 새해가 온다고 해서 당장은 무슨 수가 날 것 같지 않아 힘이 나지도 않고, 그렇다고 가는 해가 아쉽지도 않은 한 해. 과학이라는 건 매우 고맙긴 하지만 아무래도 아직은 좀 시시한 수준이구나 싶게 된 해. 나는 철학이 빈곤한 인간이구나 싶게 된 해.. 2020. 12. 30.
미루나무 잎사귀에 매달린 내 눈물 나는 늘 혼자였습니다. 미루나무가 하늘 높이 솟은 방둑으로 소를 먹이며 가고 있었습니다. 저수지 물이 들판 가운데를 거쳐 그곳을 지나가는 방둑은 깎아 세운 절벽 같았습니다. 방둑 양쪽 논은 임자가 다르니까 누가 그 방둑을 두껍고 튼튼하게 만들겠습니까? 그 아슬아슬한 길의 양쪽으로 소가 좋아하는 풀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어서 소는 정신없이 먹고 있었습니다. 그 소를 바라보며 어린 나는 잠깐 흐뭇했을 것입니다. 낌새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어 고개를 들었습니다. 엇! 저 멀리 뒷산 기슭으로부터 고함소리와 함께 누군가 흰옷을 펄럭이며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아무래도 나를 가리키는 것 같았습니다. 아, 이런! 내가 소를 몰고 들어가 있는 방둑은 우리 ○○부네 논이고, 대머리가 반질반질한 우리 ○○부는 소가 들.. 2020. 12. 28.
저 포근한 겨울산 거실에서 내다보이는 건너편 겨울산이 포근해서 찍어본 사진이 저렇다. 눈이 거짓말을 했나? 휴대전화가 지쳤나? 다시 내다보았더니 오히려 더 포근하다. 옛사람들은 저 포근함 때문에 죽어서 거의 다들 산으로 갔나? 걸핏하면 쓸쓸하고 산은 말없이 포근하다. 2020. 12. 24.
한복 차림 서울여인 # 1966년 삼각지 로터리 어디쯤이었습니다. 몇몇 집에서 저녁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배가 더 고팠습니다. 만나기로 한 사람을 기다리는데 하필이면 부슬부슬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비안개가 자욱했습니다. 저기쯤 치마저고리를 입은 새색시가 보였습니다. 비를 맞는 건 똑같은데 그녀는 곧 사랑하는 이와 만날 것이어서 다 괜찮았습니다. 그녀가 사랑하는 그는, 저녁 준비를 해놓고 골목 어귀에 나와 기다리는 그녀가 부끄러워서 다정한 표정만으로 그녀를 포옹해주며 집으로 들어갈 것인데 나는 집도 없고 아무도 없었습니다. 나는 그렇게 예쁜 여인을 처음 보았습니다. 변함없이 암울한 한 해였고 세상이 돌연 다채로운 빛깔로 보이게 된 한 해였습니다. # 1971년 교사가 되어 시골 학교에 발령받은 나는 3년째에 6.. 2020. 12. 20.
눈에 갇히지 않으려고 애쓰기 지난 일요일, 새벽까지는 눈이 내리지 않았습니다. "눈이 와?" "오긴 뭐가 와?" 아내가 퉁명스럽게 대답합니다. 이런..... 일기예보는 분명했으므로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전날 일찌감치 저곳에서 나왔기 때문에 눈이 내리지 않는 건, 눈이 내릴 거라면서 얼른 나가자고 재촉한 내 촌스러운 입장을 난처하게 했습니다. 아침이 되자 마침내(!) 눈이 내렸습니다. '보라고! 창밖 좀 내다보라고!' 나는 말없이, 소리없이 외쳤습니다. 그렇게만 해도 충분했습니다. 아내는 더 이상 퉁명스러울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게다가 눈은 한꺼번에 내렸습니다. 그러자 마음이 더 더 더 풀렸습니다. "서둘러 떠나시기를 잘 하셨습니다. 저도 서둘러 들어오기를 잘했습니다." 저곳으로 들어간 친구가 저곳으로부터 탈출해온 나에게 저.. 2020. 12. 15.
미라보 다리아래 센 강이 흐르고 아침에 눈이 내렸습니다. 문득 고등학교 때 국어 선생님 생각이 났습니다. 그분이 우리들을 바라보다가 창밖을 내다보며 아폴리네르의 시를 암송하시던 장면입니다. 선생님은 청춘이었을 것입니다. 빛났어야 할 우리 선생님의 청춘...... 미라보 다리 아래 센 강은 흐르고 우리의 사랑도 흘러내린다 내 마음 깊이 아로새기리 기쁨은 언제나 괴로움에 이어서 옴을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세월은 가고 나는 머문다 손에 손을 잡고 마주 보면 우리의 팔 아래 다리 밑으로 영원의 눈길을 가진 지친 물살이 저렇듯 천천히 흘러내린다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세월은 가고 나는 머문다 사랑은 흘러간다 저 물결처럼 우리의 사랑도 흘러만 간다 ......................................... 선생님은 살아계.. 2020. 12.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