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손자와 손녀가 태어나면서 할아버지가 달라진 것이라고 추측했다. 내가 출판사에 편집자로 취직했을 때, 할아버지는 무척 기뻐했다. 모든 것을 직접 체험하면서 이 우주를 인식하기에 육신의 삶은 너무나 짧기에 인간은 말과 글을 통해 서로 협조함으로써 자신을 완성해나갈 시간을 단축해야만 한다는 할아버지의 말에 나는 백 퍼센트 동의한다. 덕분에 책은 우리의 나이 차이를 뛰어넘는 징검다리가 되어주었다. 그날도 나는 『알렉산드리아도서관의 불』이라는 신간을 들고 갔다. 고대 이집트에 있던 알렉산드리아도서관에 소장됐다가 도서관이 불타면서 유실된 책들을 다루는 내용이었는데, 얘기하다 보니 어느샌가 다산 정약용으로 이야기가 넘어가고 있었다.
'모든 것을 직접 체험하면서 이 우주를 인식하기에는 육신의 삶은 너무나 짧기에 (...) 말과 글을 통해 서로 협조함으로써 자신을 완성해나갈 시간을 단축해야만 한다'
이런 얘기를 읽으면 하릴없이 책이나 읽는 자신을 변호하고 싶어집니다.
'봐, 책을 읽는 건 결코 허사(虛事)가 아니란 말이야!'
그렇지만 한 인간으로서의 의지까지 책에 의존하거나 의탁하는 일은 그리 간단하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천지가 막막한 느낌인 날, 혹은 종종 눈앞의 일상이 마음을 어수선하게 하는 그런 시간에 책은 웬만해선 위안을 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도량이 좁은 인간답게 '내 신세가 앞으로는 어떤 것일까' 싶을 때도 있습니다.
추국청에서 고문을 받으며 한때의 벗이었던 그들이 서로가 서로를 부인하고 고발하는 중심에 정약용이 있었어. 그때 다산은 35년 뒤의 자신을 생각할 수 있었을까? 못 했겠지. 하지만 유배에서 돌아와 세상을 떠날 무렵의 다산은 분명 35년 전의 자신을 생각했을 거야. 과거의 우리를 생각할 수 있는데, 왜 미래의 우리는 생각할 수 없을까?
"한 치 앞도 모른다"라고 하듯이 일이 년은 고사하고 한 달, 한 주, 하루 앞도 안개 저 편처럼 느껴집니다. 이제 노인이 되었으니 살아봤자 다 어제오늘 같은 이런 날들이 되풀이되겠지, 짐작해볼 뿐입니다.
그렇지만 그것도 괜찮다고, 읽던 소설을 덮어두고 약을 받으러 병원 가는 길에 생각했습니다.
금방 하루가 가면서 창밖이 어둑어둑해지고 서너 번 깨어 뒤척이다 보면 아침이 되고 오늘은 어떤 느낌으로 지내게 되려나? 조금의 호기심이 스민 조금의 두려움 같은 걸 느끼게 되고, 그래서 스스로 조심스러운 마음을 갖게 됩니다.
하루하루가 다 '그날이 그날'이면 무슨 재미로 살겠습니까?
일어날 일들을 미리 알고 살아간다면 그것도 무슨 재미겠습니까?
조금씩이라도 하루하루가 다르고, 바로 내일 일도 다 모르고 살아가는 것이어서 하루 또 하루, 한 달 또 한 달...... 기대를 가지고 사는 것 아니겠습니까?
말하자면 코로나 백신을 개발하는 어느 유명한 제약회사 CEO라는 사람이 우리는 영원히 코로나와 함께 살아가야 할 것 같다고 해서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다 싶긴 했지만, 그러면서도 또 무슨 좋은 방도가 나오겠지 생각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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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색 글은 김연수(단편소설)「다시, 2100년의 바르바라에게」(『현대문학』2020년 11월호 34~56)에서 옮겼습니다. 소설을 읽으며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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