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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1159

'그 처자, 부디 바라는 바대로 살고 있기를!' 그러니까 그날이 1월의 첫째나 셋째 월요일이었을 테다. 터덜터덜 돌아오는데 눈이 쌓인 도서관 비탈 진입로 한복판에 카오스 고양이 한 마리가 당황한 얼굴로 우두망찰 서 있었다. 함초롬히 어여쁜, 이제 막 청소년이 된 듯한 고양이였다. 여기 웬 고양이지? 놀랍고 반가운 마음으로 마침 갖고 다니던 사료를 한 줌 공책 찢은 종이에 얹어 고양이 앞에 놓았다. 피하는 기색 없이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먹는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누군가 말을 걸었다. 웃는 얼굴이 따뜻하고 화사해 보이는 처자였다. 그 역시 나처럼 도서관이 휴관하는 걸 모르고 왔다고 했다. 이름이 혜조였던가. 길고양이 일로 얽히기도 하고 꽤 가깝게 지냈었는데 이름도 정확히 기억나지 않네. 넉넉해 보이지 않는 형편에 강인하고 의젓하게 자기 삶을 꾸려나.. 2021. 3. 21.
안녕? · 뭘해? · 사랑해! 사람들이 AI(인공지능)에게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사랑해!" "안녕~" "뭘 해?"랍니다. 2주 전인가, 주말 오후 교외에서 들어오는 자동차 안에서 'FM 풍류마을'이라는 라디오 프로그램 오프닝멘트로 소개되는 걸 들었습니다. 사람들의 외로움을 이야기했던 것 같습니다. 소개된 순서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사랑해!" "안녕~" "뭘 해?" 그건 간절히 듣고 싶은 말이 분명합니다. 그러니까 그런 말들을 스스로 로봇에게 해주면서 살아가는 것이지요. 로봇을 가지지 않은 사람도 많겠지요? 그런 경우에는 어떻게 합니까? 스스로에게 그렇게 인사를 건넬 수도 있겠지요. "파란편지, 사랑해!" "안녕~ 파란편지."(혹은 "안녕? 파란편지") "파란편지, 지금 뭘 해?" 지금까진 아무리 외로워도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 2021. 3. 19.
그리운 그 다방茶房 재작년 여름이었지요, 아마? 진고개에서 들어가 본 다방이 분명합니다.하여간 전철역에서 올라가 몇 걸음 걷지 않아도 찾을 수 있는 길가의 그 식당, 널찍하고 온갖 부침 세트가 인기여서 각종 모임이 잦다는 그곳에서 식사를 하고 나가 커피숍을 찾으면 바로 눈에 띄는 이층의 다방입니다.커피숍은 아닙니다. 다방입니다, 다방. 옛날식 다방. 이름요? 이름은... 글쎄요~전원? 정? 역마차? 대륙? 만남? 호수? 추억? 길? 팔팔? 도심? 진고개?모르겠네요. 생각할수록 점점 더 헛갈려 온갖 이름이 떠오르네요. 이것 같기도 하고 저것 같기도 하고...찾기 쉬워서 이름 걱정 하지 않아도 될 걸요? 좁은 계단을 조심조심 올라가서 문을 밀고 들어가면,붉은 우단으로 된 높다란 의자가 꽉 들어 차 있어서 첫 인상으로는 좀 답답.. 2021. 3. 13.
대화 # 1 "할아버지, 뭐 하세요?" "....." "여기 좀 보세요! 저희 예쁘지 않아요? 얘가 저 사랑하고 싶대요." "......" "아이, 뭘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러시면 제가 어떻게 해야 해요? 늘 저 좋다고 하시면서......" "......" # 2 "할아버지, 나무들도 대화를 해?" "그럼! 하고말고." "그걸 누가 알아들어?" "대화를 하는 건 분명한데 우리는 거의 알아듣지 못해." "......" "누가 식물에게 음악을 들려주고 심지어 물에게도 음악을 들려주어 봤다잖아." "그 얘긴 읽어봤어." "연구하면 조금이라도 알아들을 수 있겠지." "새들 이야기처럼?" "그렇지!" "생물학자가 되면 모든 생물과 대화를 할 수 있을까?" "그렇게 하면 더 어렵지 않을까? 조류학자가 되면 새 이야기를 .. 2021. 3. 11.
은행나무 아래 그 소녀의 일기장 육십여 년 비밀을 지켰네. 철저히 그 비밀을 지켰네. # 추석이 지나고 은행나무잎에 물이 들고 운동회가 다가왔습니다. 운동회 연습 때문에 오후 수업은 없어졌습니다. 그래 봤자 사시사철 아프고 사시사철 일에 지친 우리 엄마는 학교에 올 수도 없는 운동회였습니다. 점심을 굶은 채 운동회 연습에 시달린 오후, 혼자 은행나무 아래로 들어갔습니다. 쉬는 시간의 그 운동장에 전교생의 반은 쏟아져 있는데도 거기엔 아무도 없었습니다. # 거기 그 소녀의 까만 가방이 보였습니다. 어른들은 농사를 짓거나 기껏해야 장사를 하는데 그 아이만은 그렇지 않았고 그걸 증명하듯 꽃무늬가 수 놓인 가방을 갖고 다니는 소녀. 요즘의 쇼핑백처럼 학용품을 넣고 꺼내기가 좋은 가방을 들고 다니는 그 소녀. 4교시 후에 선생님이 되돌려준 일기.. 2021. 3. 8.
"봄이 폭발했다" 오늘이 경칩(驚蟄)이죠? 개구리가 봄이 온 것도 모르고 늦잠을 자고 있다가 놀라 깨어난다는 날. 봄이 진짜 완연했습니다. 하기야 입춘 지난 지 한 달이잖아요? 그 사이에 우수(雨水)도 지났고요. 봄은 늘 이렇게 눈 깜빡할 사이에 왔던가요? 지난 1일에는 강원도를 중심으로 폭설이 내려서 눈에 갇힌 사람들은 오도 가도 못하고 일곱 시간을 추위에 떨었다는데 그렇게 오들오들 떨며 "봄인데 이 고생이네" 했겠습니까? "아무래도 아직은 겨울이야" 했기가 십상이지요. 그런데 사나흘 후 '완연한 봄'이라고 하면 이건 눈 깜빡할 사이가 아니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봄은 슬며시 오는 게 아니라 "짠!" 하고 불쑥 얼굴을 내민 거죠. 그러니까 개구리도 "앗! 봄이야?" 하는 것이겠지요. 말벌과 파리 떼들의 윙윙거리는 소리와.. 2021. 3. 5.
바다에서의 죽음 그는 거의 새벽 2시까지 자동차의 운전석에 앉아 있었다. 자동차의 문을 잠그고, 창문은 올려놓고, 불빛을 끄고, 라디에이터의 격자무늬가 절벽의 모서리 너머 텅 빈 공간으로 투사되게 해놓고서. 어둠에 익숙해져 있는 그의 눈은 바다 표면이 호흡하는 것에, 즉 광대하지만 들떠 있는 거인이 잠을 자면서 악몽 때문에 주기적으로 깨어나는 것처럼, 계속해서 부풀어 올랐다가 다시 가라앉는 호흡에 매료되었다. 가끔 화가 난 광풍처럼 소리가 달아나 버렸다. 가끔 그것은 열에 들떠 헐떡이는 것 같았다. 그리고 해안선을 갉아먹고는 그들의 전리품을 가지고 멀리 후퇴하는, 밤 파도 소리가 다시 들렸다. 여기저기 거품이 이는 잔 물결은 어두운 표면 위에서 반짝거렸다. 어떤 때에는 푸르스름한 우윳빛의 광선이 하늘 높이 별들 사이로,.. 2021. 2. 28.
TV가 27%밖에 안 되는 거예요 아직 공식 발표는 되지 않았습니다만 KBS 같은 경우 2019년 적자가 1,300억 원에 가까울 것으로 추정됩니다. 우리나라 국민 1,000명에게 저녁 7시면 어떤 매체를 보는지 설문조사를 했더니 56.7퍼센트가 유튜브를 본다고 대답했어요. 지상파가 18퍼센트, 그다음으로 케이블이 9퍼센트가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TV가 27퍼센트밖에 안 되는 거예요. 그것도 TV 본다는 분들은 대부분 50대 이상이었고요. 《코로나 사피엔스》(인플루엔셜 2020)라는 책에서 최재붕 교수(성균관대학교 서비스융합디자인학과)가 한 말입니다. "TV가 27퍼센트? 야호! 신난다!" 그럴 사람이 있을까요? "신난다고? 무슨 신?" 그러겠지요? "그렇지? TV 앞은 노인네 차지지" 그럴 사람은 있겠지만... 나는 신이 났습니다. 드.. 2021. 2. 26.
나는 왜 아플까? 심장병이 걸려 응급실에 실려가고 두 차례 핏줄도 뚫고 했다는 걸 주변에서 알게 되고, 무슨 자랑거리나 생긴 것처럼 "이렇게 지낸다"며 이 블로그에 쓰고, 그렇게 지내다가 내 건강을 기도한다는 사람도 만났습니다. 기도? 나를 위해? 놀라웠습니다. 우선 나는 정말 기도를 필요로 하는가, 공연한 일 아닌가 싶었습니다. 절실하면 종교를 갖지 않는 사람도 흔히 기도를 하게 된다는 것도 알고는 있고 쑥스럽지만 간절히 기도한다고 해서 효과가 나타나는 건 아니라는 걸 오십 년 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날 때 단 하루이틀만이라도 말미를 달라는 기도를 하며 직접 확인해 본 적도 있었습니다. 구태여 효과를 바라지 않거나 효과가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기도를 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지만 기도를 한다고 해서 그.. 2021. 2. 21.
저승 가는 길에 듣는 알람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나는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그 침울한 분위기에 자신의 입장을 더해서 두어 명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우지 마라! 울 것 없다! 너를 위해서라면 몰라도 나를 위해서라면 울 것 하나도 없다! 나는 이만하면 됐다!'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서투르고 어색한 채로 마지막 아침이 진행되고 있다. 그때 내 휴대전화기에서 심장약 복용 시각을 알리는 알람이 울렸다. 7시 40분! 매일 아침 그 시각에 1초도 어김없이 울리는 알람이었지만 그 아침에는 그게 참 엉뚱한 멜로디였다. 그 곡은 아주 단순하고 간단하고 좀 평화로운 느낌의 멜로디가 반복되는 것으로, 그렇게 누워 한두 번, 이어서 서너 번 듣고 있을 때까지는 예전에 아내와 내가 젊은 부부였던 일요일 아침나절 그 동네의 교회 종소리처럼 아늑하.. 2021. 2. 16.
코로나 시대 철학자들은 언제 입을 열까? 이 상황이 너무 오래가지 않습니까? 코로나 말입니다. 이게 사람이 저지르고 있는 짓이라면 뭐라고 해야 할까요. 일단 망나니짓 중의 망나니겠지요. 철학자들은 이 변화에 어이가 없고 상황 정리가 되지 않아서 단 한 줄도 쓰지 못하고 있는 것 아닐까요? 소설가들도 그렇겠지요. 이게 마무리돼야 주제를 잡고 스토리를 마련하고 할 텐데 아직은 그 터널 안에 있으니까 뭘 어떻게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 단계에서 할 말이 있는 작가를 생각해보라면 단 한 명만 생각납니다. 주제 사라마구Jose Saramago. 그는 《눈먼 자들의 도시》를 썼으니까 지금까지 살아 있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보라구! 내가 걷잡을 수 없이 감염되는 눈병 얘기를 괜히 했겠어?" 우선 사람들과의 관계는 어떻게 설정해야 .. 2021. 2. 14.
'현을 위한 세레나데'(차이코프스키) 음악은 어떻게 듣습니까? 정석(定石)이라는 게 있지 않겠습니까? 내 말은, 음악을 들으며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이야 하는 것이겠지만, 그렇게 생각하며 주로 그려보는 장면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입니다. 답답하다고 할까 봐 먼저 이야기합니다. 나는 주로 오케스트라의 합주 장면을 그려봅니다.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인데 때로는 혼신을 다하는 지휘자가 떠오르기도 합니다. 그렇게 하면 음악을 제대로 듣는 것이 아닙니까? 연주회장을 그려볼 것이 아니라 밖으로 나가야 합니까? 눈 오는 거리를 걸어가거나 광활한 산야를 누비고 다니거나 어느 정원에서 누군가의 손을 잡고 끝없는 얘기를 나누거나, 그렇게 하는 것입니까? "솔로이스트"라는 소설에 차이코프스키의 '현을 위한 세레나데'를 듣는 장면이 나와 있었습니다. 칼럼을 주.. 2021. 2.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