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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1153

"얘들아, 조심해! 행복해야 해!" 얘들아, 반갑다! 선생님 부탁 말씀 잘 들으며 부디 조심해야 해! 우리에겐 너희뿐이야. 너희가 모든 것이야. 어른들이 그걸 잠시 잊을 순 있어도 모르는 건 아니야. 모두들 행복해야 해! 믿을 게~ 잘 부탁할 게~ 2021. 4. 22.
렘브란트의 자화상 나는 여행지에서 가끔 렘브란트의 자화상을 만나곤 한다. 특히 말년의 작품 앞에 서면 왠지 숙연해진다. 대체로 어두운 그림이지만 불가사의한 빛을 내뿜고 있다. 몇 겹에 걸쳐 붓을 칠한 어두운 배경에, 희미하게 떨리는 듯한 붓의 터치가 겹쳐진 붉은 갈색의 짙은 음영이 드리워진 주름진 얼굴이 떠 있다. 할 말을 잊고 체념한 듯한 표정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이 묻어난다. 그림을 볼 때마다 렘브란트라는 화가를 넘어서 인간 존재의 마음속 깊은 곳을 들여다보는 기분이 든다. 자세히 보면 곳곳에 다시 그렸거나 명료하지 않은 붓질이 눈에 띈다. 어쩌면 그림 밑바탕에는 다른 그림을 그렸다가 지운 흔적이 있는지도 모른다. 다빈치의 「모나리자」가 그랬듯이 아무리 그리고 그려도 뜻대로 되지 않아 중간에 붓을 놓은 것처럼 .. 2021. 4. 20.
'나를 잊는다'(物我) 연전에『소동파 평전』(왕수이자오)에서 제화시(題畵詩)에 대한 내용을 보았다. 평전을 쓴 왕수이자오는 소식(蘇軾)의 제화시 가운데에는 그의 고도의 예술적 표현력이 두드러진 것과 투철한 예술적 견해를 나타낸 것이 있다면서 후자의 예로 문동(文同)이 대나무를 그린 정황을 서술한 시를 보여주었다(203~204). 여가與可가 대나무를 그릴 때 대나무만 보고 사람을 보지 않는다. 어찌 사람만을 보지 않으리? 멍하니 자신의 존재조차 잊어버렸다. 그 몸이 대나무와 함께 동화되어 청신함이 무궁하게 솟아 나온다. 이제 장주莊周가 세상에 없으니 누가 이러한 정신 집중의 경지를 알리오. 與可畵竹時, 見竹不見人. 其獨不見人, 嗒然遺其身. 其身與竹畵, 無窮出淸新. 莊周世無有, 唯知此疑神. 이 글을 읽는 중에 이번에는 화가 이우환.. 2021. 4. 18.
「봄 난리」/ 雪木 내 독후감(아모스 오즈《숲의 가족》)에 설목 선생이 써놓은 댓글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시인은 감흥이 남다를 것 같기도 하고, 코로나19 때문에 들어앉아 있어야 하는 사정을 생각하면 저 숲의 요동이 유난스럽게 보일 수도 있고, 거기에 "숲의 가족"이라는 책의 독후감이어서 '잠시' 그렇지만 '한바탕' 자신의 느낌을 전해주고 싶었겠지요. 이 글이 그 댓글입니다. 숲에 가면 난리도 아닙니다. 꽃이란 꽃들이 난리입니다. 어리둥절합니다. 매화, 산수유, 동백꽃 들이 온통 난리 치고 간 다음 지금은 목련, 개나리, 진달래, 벚꽃 들이 뒤를 잇고 있습니다. 앞으로 복사꽃, 살구꽃, 철쭉, 연산홍 들이 난리 칠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꽃들만 난리입니까. 잎눈들이 눈을 뜨고 세상을 내다보고 있습니다. 그 눈빛이 하도.. 2021. 4. 16.
"그 멍청한 아이스크림 트럭만 오지 않았다면..." 제이슨은 95세인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할머니를 위로해 드리려고 90세 된 할머니를 만나러 갔다. 할머니 댁에 도착한 그는 어떻게 된 일인지 물었다. 할머니는 섹스를 하던 중에 할아버지가 죽었다고 설명했다. 깜짝 놀란 제이슨은 할머니에게 두 분이 그 연세에도 섹스를 했다는 걸 알고 충격을 받았다고 말하면서 그것이 "상당히 바람직하지 못한 상황"임을 넌지시 내비쳤다. 할머니는 노인들도 교회 종소리에 맞춰서 성관계를 하면 안전하다는 사실을 몇 년 전에 알게 됐다고 말했다. 한마디로 리듬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딩' 소리가 울릴 때 들어가고 '동' 소리가 울릴 때 나온다면 매우 편안하면서도 안전하다고. 할머니는 이렇게 덧붙였다. "그 멍청한 아이스크림 트럭만 오지 않았다면, 할아버지는 지금도.. 2021. 4. 13.
사기꾼 아저씨의 요지경 아버지께서 요지경 구경을 허락하신 건 우리가 참으로 무료한 곳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시인한 결과였을까? '이 세상에는 이 벽지 같은 곳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색다른 곳이 너무나 많아서 요지경 같다는 걸 알아두어라.' 그때 나는 요지경이 어떤 것이라는 설명을 들은 것은 아니었지만 짐작은 하고 있었다. 사전에는 두 가지 의미가 나와 있다. '알쏭달쏭하고 묘한 세상일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이 설명은 본래의 요지경을 설명한 건 아니다. 예를 들어 "그 집 살림은 요지경이야"라거나 "세상은 혼탁한 요지경 속"이라고 할 때의 그 요지경이어서 이 비유적 설명을 읽어봐야 의문은 그대로 남는다. '그런데 그 요지경이 뭐지?' 다른 하나의 설명은 '확대경이 달린 조그만 구멍을 통하여 그 속의 여러 가지 그림.. 2021. 3. 31.
저승 가는 길 저승 가는 길을 그려봅니다. 저승은 분주한 곳이 분명하지만 경계가 삼엄하고 조직이 치밀한 한 곳이 아니라 쓸쓸하거나 썰렁하다 해도 이미 그곳을 찾아가야 할 사람은 찾게 되어 있으므로 무슨 대단한 환영식 준비하듯 여럿이 나를 데리러 오진 않을 것입니다. 만약 "저승으로 오라!"는 그 통지를 무시하면 어떤 조치가 내려지는지에 대해서는 이미 시지프의 신화에서 읽은 바 있습니다. 가야 할 사람은 어떻게든 가야 하고 가는 길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까만 두루마기에 갓을 쓰고 기묘하게 화장을 한 저승사자가 데리러 오는 방법이 있긴 하지만 그래 봤자 한두 명일 것이고, 십중팔구 혼자 가야 할지도 모릅니다. 누구라도 쉽게 찾을 수 있도록 안내될 테니까(초등학교도 나오지 않은 내 엄마도 갔고, 중학교 1학년 봄 .. 2021. 3. 23.
'그 처자, 부디 바라는 바대로 살고 있기를!' 그러니까 그날이 1월의 첫째나 셋째 월요일이었을 테다. 터덜터덜 돌아오는데 눈이 쌓인 도서관 비탈 진입로 한복판에 카오스 고양이 한 마리가 당황한 얼굴로 우두망찰 서 있었다. 함초롬히 어여쁜, 이제 막 청소년이 된 듯한 고양이였다. 여기 웬 고양이지? 놀랍고 반가운 마음으로 마침 갖고 다니던 사료를 한 줌 공책 찢은 종이에 얹어 고양이 앞에 놓았다. 피하는 기색 없이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먹는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누군가 말을 걸었다. 웃는 얼굴이 따뜻하고 화사해 보이는 처자였다. 그 역시 나처럼 도서관이 휴관하는 걸 모르고 왔다고 했다. 이름이 혜조였던가. 길고양이 일로 얽히기도 하고 꽤 가깝게 지냈었는데 이름도 정확히 기억나지 않네. 넉넉해 보이지 않는 형편에 강인하고 의젓하게 자기 삶을 꾸려나.. 2021. 3. 21.
안녕? · 뭘해? · 사랑해! 사람들이 AI(인공지능)에게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사랑해!" "안녕~" "뭘 해?"랍니다. 2주 전인가, 주말 오후 교외에서 들어오는 자동차 안에서 'FM 풍류마을'이라는 라디오 프로그램 오프닝멘트로 소개되는 걸 들었습니다. 사람들의 외로움을 이야기했던 것 같습니다. 소개된 순서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사랑해!" "안녕~" "뭘 해?" 그건 간절히 듣고 싶은 말이 분명합니다. 그러니까 그런 말들을 스스로 로봇에게 해주면서 살아가는 것이지요. 로봇을 가지지 않은 사람도 많겠지요? 그런 경우에는 어떻게 합니까? 스스로에게 그렇게 인사를 건넬 수도 있겠지요. "파란편지, 사랑해!" "안녕~ 파란편지."(혹은 "안녕? 파란편지") "파란편지, 지금 뭘 해?" 지금까진 아무리 외로워도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 2021. 3. 19.
그리운 그 다방茶房 재작년 여름이었지요, 아마? 진고개에서 들어가 본 다방이 분명합니다.하여간 전철역에서 올라가 몇 걸음 걷지 않아도 찾을 수 있는 길가의 그 식당, 널찍하고 온갖 부침 세트가 인기여서 각종 모임이 잦다는 그곳에서 식사를 하고 나가 커피숍을 찾으면 바로 눈에 띄는 이층의 다방입니다.커피숍은 아닙니다. 다방입니다, 다방. 옛날식 다방. 이름요? 이름은... 글쎄요~전원? 정? 역마차? 대륙? 만남? 호수? 추억? 길? 팔팔? 도심? 진고개?모르겠네요. 생각할수록 점점 더 헛갈려 온갖 이름이 떠오르네요. 이것 같기도 하고 저것 같기도 하고...찾기 쉬워서 이름 걱정 하지 않아도 될 걸요? 좁은 계단을 조심조심 올라가서 문을 밀고 들어가면,붉은 우단으로 된 높다란 의자가 꽉 들어 차 있어서 첫 인상으로는 좀 답답.. 2021. 3. 13.
대화 # 1 "할아버지, 뭐 하세요?" "....." "여기 좀 보세요! 저희 예쁘지 않아요? 얘가 저 사랑하고 싶대요." "......" "아이, 뭘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러시면 제가 어떻게 해야 해요? 늘 저 좋다고 하시면서......" "......" # 2 "할아버지, 나무들도 대화를 해?" "그럼! 하고말고." "그걸 누가 알아들어?" "대화를 하는 건 분명한데 우리는 거의 알아듣지 못해." "......" "누가 식물에게 음악을 들려주고 심지어 물에게도 음악을 들려주어 봤다잖아." "그 얘긴 읽어봤어." "연구하면 조금이라도 알아들을 수 있겠지." "새들 이야기처럼?" "그렇지!" "생물학자가 되면 모든 생물과 대화를 할 수 있을까?" "그렇게 하면 더 어렵지 않을까? 조류학자가 되면 새 이야기를 .. 2021. 3. 11.
은행나무 아래 그 소녀의 일기장 육십여 년 비밀을 지켰네. 철저히 그 비밀을 지켰네. # 추석이 지나고 은행나무잎에 물이 들고 운동회가 다가왔습니다. 운동회 연습 때문에 오후 수업은 없어졌습니다. 그래 봤자 사시사철 아프고 사시사철 일에 지친 우리 엄마는 학교에 올 수도 없는 운동회였습니다. 점심을 굶은 채 운동회 연습에 시달린 오후, 혼자 은행나무 아래로 들어갔습니다. 쉬는 시간의 그 운동장에 전교생의 반은 쏟아져 있는데도 거기엔 아무도 없었습니다. # 거기 그 소녀의 까만 가방이 보였습니다. 어른들은 농사를 짓거나 기껏해야 장사를 하는데 그 아이만은 그렇지 않았고 그걸 증명하듯 꽃무늬가 수 놓인 가방을 갖고 다니는 소녀. 요즘의 쇼핑백처럼 학용품을 넣고 꺼내기가 좋은 가방을 들고 다니는 그 소녀. 4교시 후에 선생님이 되돌려준 일기.. 2021. 3.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