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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나를 잊는다'(物我)

by 답설재 2021. 4. 18.

연전에『소동파 평전』(왕수이자오)에서 제화시(題畵詩)에 대한 내용을 보았다.

평전을 쓴 왕수이자오는 소식(蘇軾)의 제화시 가운데에는 그의 고도의 예술적 표현력이 두드러진 것과 투철한 예술적 견해를 나타낸 것이 있다면서 후자의 예로 문동(文同)이 대나무를 그린 정황을 서술한 시를 보여주었다(203~204).

 

 

여가與可가 대나무를 그릴 때

대나무만 보고 사람을 보지 않는다.

어찌 사람만을 보지 않으리?

멍하니 자신의 존재조차 잊어버렸다.

그 몸이 대나무와 함께 동화되어

청신함이 무궁하게 솟아 나온다.

이제 장주莊周가 세상에 없으니

누가 이러한 정신 집중의 경지를 알리오.

 

與可畵竹時, 見竹不見人.

其獨不見人, 然遺其身.

其身與竹畵, 無窮出淸新.

莊周世無有, 唯知此疑神.

 

 

 

 

 

 

이 글을 읽는 중에 이번에는 화가 이우환의 수필이 떠올랐다. 그가 크로마뇽인의 벽화를 구경하는 장면이었다. 몰아지경에 도달했었다는 표현을 본 것 같아서 그 글이 실린 책을 찾았는데 '몰아(沒我)'라는 단어가 보이지는 않았다.

그의 글을 읽을 때 내가 그 생각을 했었던 것 같은 부분을 가려 몇 번 꼼꼼히 읽었다.

 

 

(…)

애초에 이러한 동물 그림은 무엇을 위해 그린 것일까? 아마도 이 의문은 영원히 수수께끼로 남을 것이다. 크로마뇽인에게 물어본다 해도 확실한 대답을 들을 수는 없을 것이다. 현대인인 나에게 "왜 그림을 그리냐"고 질문한들 명료하게 대답할 수 없다. 그건 그렇다 치고, 암흑 속의 동굴벽화 공간을 서성이다 보면 강하게 느껴지는 것이 있다. 그림은 어둠 속에 잠겨 있지만, 나 또한 어둠 속에 잠겨 그림과 함께 있다. 그림은 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있는 것이다. 그림은 많은 사람들에게 과시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일가족 모두가 등불로 벽을 비춘다 한들 그림 전체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도 아니며, 일부가 보였다고 해도 곧바로 눈을 감고 고개를 숙였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크로마뇽인들에게 벽화 속의 동물은 동물이면서도 동물을 넘어선 존재였을 것이다. 이는 두려움의 무리이자 살아 있는 생명체의 상징이며, 세계의 힘, 우주의 영혼으로 충만한 그 무언가이다. 암흑 속 희미한 빛을 통해 보이는 극히 일부분의 그림은 전율을 불러일으키는 경외의 대상이다. 벽화에 둘러싸여 귀를 기울이면 동물들의 웅성거림, 울음소리, 달리는 발자국 소리, 거친 숨소리가 들려온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것들이 환기되는 공간에서, 생명의 은혜 속에서 살아가는 힘을 기원하고, 나아가 세상의 불가해함과 죽음의 공포를 호소했던 것일까?

그림은 어둠 속에서 이쪽을 향해 소리친다. 그림 쪽에서 이쪽을 바라보는 것이다. (…)

 

    ― 이우환 「라스코동굴」(에세이, 성혜경 옮김, 『현대문학』 2018년 10월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