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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코로나 시대 철학자들은 언제 입을 열까?

by 답설재 2021. 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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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상황이 너무 오래가지 않습니까? 코로나 말입니다.

이게 사람이 저지르고 있는 짓이라면 뭐라고 해야 할까요. 일단 망나니짓 중의 망나니겠지요.

철학자들은 이 변화에 어이가 없고 상황 정리가 되지 않아서 단 한 줄도 쓰지 못하고 있는 것 아닐까요?

소설가들도 그렇겠지요. 이게 마무리돼야 주제를 잡고 스토리를 마련하고 할 텐데 아직은 그 터널 안에 있으니까 뭘 어떻게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 단계에서 할 말이 있는 작가를 생각해보라면 단 한 명만 생각납니다. 주제 사라마구Jose Saramago.

그는 《눈먼 자들의 도시》를 썼으니까 지금까지 살아 있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보라구! 내가 걷잡을 수 없이 감염되는 눈병 얘기를 괜히 했겠어?"

 

우선 사람들과의 관계는 어떻게 설정해야 합니까?

이웃 사람들, 회사 사람들과는 어떻게 지내고,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 대중교통으로 만나는 사람들과는 어떻게 지내야 합니까?

직계존비속도 5명도 안 되고 4명 이내!

나는 손자 손녀만 오라고 해서 그것들과 넷이서 차례를 지냈습니다.

거리는 멀어도 마음은 가깝게? 글쎄요, 헤어지면 못 견딜 것 같은 마음의 그 상처도 하루 이틀 지나면 아물기 시작하는 것이어서 거리가 먼데도 마음이 가까워지는 걸 나는 아직은 겪어보지 못했고, 오죽 답답하고 가슴 아프면 저런 말로라도 위로하고자 할까 싶었습니다.

 

가족들과는 어떻습니까?

나는 바깥 볼일을 보고 들어와서는 아내 옆에 다가가기가 망설여집니다. 내 몸 어디에 붙어서 들어온, 눈에 보이지 않는 괴물이 슬쩍 건너가면 어쩌지, 조바심이 일었습니다.

이 집이 스무 평 정도여서 우리는 좀 떨어져 있을 수도 없습니다. 숨소리까지 다 들릴 정도입니다. 이럴 땐 좀 널찍한 집에 살면 오죽 편리할까 싶었습니다.

소설《여자를 안다는 것》(아모스 오즈)에서 이런 장면을 봤습니다.

한 문단으로는 상황 전달이 미흡할 것 같아서 두 문단을 옮기겠습니다. (  ) 안은 '파란편지'의 주(註)입니다.

 

 

주말이 되어 식탁에 함께 모일 때면, 그들은 지적 능력을 가진 생명체가 우주에 존재하는가 하는 문제에 관한 이론들이나 기술의 장점을 상실하지 않고도 생태계를 구해 내는 방법은 없는가 하는, 일상적인 관심사와는 동떨어진 문제들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들은 이런 문제들에 관하여 서로 끼어들지 않으면서도 활발히 토론했다. 가끔은 겨울용 새 신발을 산다든가, 식기 세척기를 수리한다든가, 여러 난방 시설의 비용에 관해서, 혹은 욕실의 약 상자를 새것으로 교체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소위 실용적인 문제들에 관한 짧은 회의가 있기도 했다. 그들은 음악에 관해서는 서로 취향이 맞지 않아 별로 이야기하지 않았다. 정치, 네타(딸)의 상태, 이브리아(아내)의 논문, 그리고 요엘(남편)의 일에 관해서는 결코 언급하지 않았다.(19)

 

그 아파트에는 세 개의 오디오 설비가 있었는데, 하나는 이브리아의 서재에, 또 하나는 요엘의 방에,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네타의 더블베드의 머릿장에 있었다. 그래서 아파트의 문들은 항상 닫혀 있었고, 다른 종류의 음악이, 끊임없이 조심스럽게, 낮은 볼륨으로 흘러나왔다. 그래도 방해할 정도는 아니었다.

단지 거실에만은 가끔 이상한 소리들이 서로 뒤섞여 들렸다. 그러나 거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몇 년 동안 정갈했고, 깨끗했고, 텅 비어 있었다. 다만 할머니들이 방문하여, 모두가 각자의 방에서 나와 모였을 때를 제외하면.(20)

 

 

이렇게 살아간다면 코로나 바이러스가 다른 사람에게로 이동하기가 용이하지 않아서 가족 간 감염 확률은 아무래도 낮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살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필 코로나 때문만이 아니라 텔레비전 쳐다보고 앉아 있는 시간을 극도로 싫어하므로 저번 아파트에 살 때처럼 아예 다른 방에 가 있으면 될 것 같아서였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텔레비전 시청에 대한 혐오감이나 바이러스 감염에 대한 우려 때문에 아득한 저 옛날부터 정착시켜온 이 삶의 방식이나 태도를 완전히 바꾸어 영영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면 우리는 과연 어떻게 그런 미래를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지금 철학자들이나 시인, 소설가들의 생각을 갈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아무래도 나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 것 같은 간절한 희망 때문입니다. 철학자들이나 시인, 소설가들의 생각은 거의 언제나 놀라운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도 나처럼 별 수 없이 오로지 이 사태가 진정되기만을 고대하고 있진 않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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