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한복 차림 서울여인

by 답설재 2020. 12. 20.

 

 

 

# 1966년

 

삼각지 로터리 어디쯤이었습니다.

몇몇 집에서 저녁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배가 더 고팠습니다.

만나기로 한 사람을 기다리는데 하필이면 부슬부슬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비안개가 자욱했습니다.

저기쯤 치마저고리를 입은 새색시가 보였습니다.

비를 맞는 건 똑같은데 그녀는 곧 사랑하는 이와 만날 것이어서 다 괜찮았습니다. 그녀가 사랑하는 그는, 저녁 준비를 해놓고 골목 어귀에 나와 기다리는 그녀가 부끄러워서 다정한 표정만으로 그녀를 포옹해주며 집으로 들어갈 것인데  나는 집도 없고 아무도 없었습니다.

 

나는 그렇게 예쁜 여인을 처음 보았습니다.

변함없이 암울한 한 해였고 세상이 돌연 다채로운 빛깔로 보이게 된 한 해였습니다.

 

 

# 1971년

 

교사가 되어 시골 학교에 발령받은 나는 3년째에 6학년을 담임했습니다.

소풍, 운동회, 수학여행, 졸업식... 거북한 일들은 줄을 이었습니다.

수학여행은 서울, 인천이 목적지였는데 내가 '앞잡이'(?)를 맡는 것으로 정해졌습니다.

앞잡이는 기가 막히는 일이었습니다.

경복궁을 일주(!)하고 광화문으로 나와서 가까운 어느 신문사로 가는 길은 복잡해서 빨간 모자를 쓴 나는 호각을 팩팩 불어대며 앞장서 걸었습니다.

 

골목 어귀의 기와집 앞을 지나다가 달력에 나올 듯한 '서울여인'을 만났습니다.

고운 한복에 뽀얀 앞치마를 곱게 차려입은 그 서울여인은 마침 대문 옆에 쓰레기를 내놓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시골에서 올라온 여러 아이들을 두루 구경하면 될 텐데 하필이면 아이들보다 더 크지도 않은 주제에 빨간 모자를 쓰고 호각을 팩팩 불어대며 걸어가는 나를 바라보며 게다가 예쁜 미소까지 지었습니다.

나는 그 서울여인에게 그때도 부끄러웠지만 날이 갈수록 점점 더 부끄러워하며 살아왔습니다.

 

 

# 그후의 서울여인

 

나를 부끄럽게 하던 그 여인들은 어디로 갔는지, 나는 모릅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