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늘 혼자였습니다.
미루나무가 하늘 높이 솟은 방둑으로 소를 먹이며 가고 있었습니다.
저수지 물이 들판 가운데를 거쳐 그곳을 지나가는 방둑은 깎아 세운 절벽 같았습니다.
방둑 양쪽 논은 임자가 다르니까 누가 그 방둑을 두껍고 튼튼하게 만들겠습니까?
그 아슬아슬한 길의 양쪽으로 소가 좋아하는 풀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어서 소는 정신없이 먹고 있었습니다.
그 소를 바라보며 어린 나는 잠깐 흐뭇했을 것입니다.
낌새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어 고개를 들었습니다. 엇! 저 멀리 뒷산 기슭으로부터 고함소리와 함께 누군가 흰옷을 펄럭이며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아무래도 나를 가리키는 것 같았습니다.
아, 이런!
내가 소를 몰고 들어가 있는 방둑은 우리 ○○부네 논이고, 대머리가 반질반질한 우리 ○○부는 소가 들어가면 그 둑이 무너진다고 고함을 지르며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큰일 났고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습니다.
소는 정신없이 먹고 있고, 가던 길로 계속 가면 그 길 끝은 그 들판이 끝나는 들판 건너편이어서 아득했고, 그러므로 들어온 길로 되돌아 나가면 좋겠는데 둑길이 너무 좁아서 덩치가 큰 소가 네 발로 버텨 되돌아 선다는 건 외줄 타기 곡예를 배우지 않은 어리석은 우리 소로서는 불가능했습니다.
어물어물하는 사이 고함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습니다.
그 달음질이 얼마나 빠른지... 펄럭이는 흰옷의 모습이 고함소리보다 더 빠른 것 같았습니다.
울먹울먹 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던 아이에게 ○○부는 지금 당장! 1초 내로! 소를 몰고 나가라고 고함을 지르며 다가옵니다. 소를 앞세우고 고삐를 쥔 채 훨훨 날거나 그 소가 나를 등에 태워서 하늘로 올라가면 좋았을 것입니다.
그날 그 시각, 내 어려움을 미루나무가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바라볼 데가 없어서 올려다본 그곳에 미루나무가 줄지어 서 있어서 수많은 잎사귀들을 '타르르르르르........' 흔들고 있었습니다.
햇볕을 받은 그것들이 바람에 흔들려 반짝이는 그 모습은 마치 눈물 같았습니다.
나는 노인이 된 지금까지 그 순간을 잊을 수가 없었고, 그 현장을 목격하고 있었던 그 키 큰 미루나무들에게는 부끄럽고 쑥스러워서 미루나무 같은 건 일부러 외면하고 살았습니다.
그렇지만 먼 그곳의 그 미루나무들은 나를 잊지 않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이 내게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고 어느 동시 한 편이 알려주었습니다.
'그 일을, 그 시절을 아직 잊지 못했니?'
'그렇게 어렵고 서러웠니?'
미루나무는 그들이나 나나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짐짓 그렇게 묻는 것 같았습니다.
앞산 미루나무
높다란 안테나처럼 가지를 곧게 뻗어
한 곳에 나란히 선 세 그루 미루나무
하늘로 송신을 해요
이따금 수신을 해요
무언가 재빨리 전할 얘기 있나 봐요
무언가 급히 받아 적을 일 있나 봐요
이따금 수신을 해요
하늘로 송신을 해요
-이정환(1954~ )
출처 : 카페 "오늘의 동시문학" http://cafe.daum.net/t-dongsimunhag/DH0W/494?svc=cafeapi
그렇지만 나는 다 괜찮습니다.
한 번이어야 할 이 삶에 그런 빛깔도 있는 게 다행이다 싶습니다.
그 눈물을 시인은 강물 같다고 했습니다.
미루나무(박재삼)
미루나무에
강물처럼 감기는
햇빛과 바람
돌면서 빛나면서
이슬방울 튕기면서
은방울 굴리면서.
사랑이여 어쩔래,
그대 대하는 내 눈이
눈물 괴면서 혼이 나가면서
아, 머리 풀면서, 저승 가면서.
출전 : "울음이 타는 가을江"(1991) 32.
내 불벗 sonagi님이 영국 세븐시스터즈에서 그려 온 미루나무 그림은 어떤지... 눈물 같은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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