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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노년일기302

"파충류" 혹은 "틀딱충" 1 불치병을 앓는 젊은 여성이 '경로석(?)'에 앉아 있는데, 한 노인이 다가가 다짜고짜 그 여성의 뒷덜미를 쳤답니다. 그 얘기는 아내가 텔레비전에서 보고 해주었습니다. 구체적인 얘기였는데 지금 내겐 경로석(혹은 장애인석, 임산부석, 영유아 동반자석……)에 앉은 여성과 그 여성의 뒷덜미를 쳐버린 노인의 이미지만 남아 있습니다. 2 강 하류의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부터 서서히 고개를 돌려 상류의 빅벤에 이르기까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런던의 아름다운 관광명소들을 바라보면서, 앞으로 두통과 피로는 계속되겠지만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건강을 유지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겉으로는 아무리 쇠약해 보일지라도 과거와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느낌이 든다. 이것을 젊은이들에게 설명하기란 쉽지가 않다. 우리 같은 .. 2018. 2. 11.
독서 메모 (1997) "안 돼요. 깨끗하게 해야지요. 당신은 북 세이버(book saver)니까, 책에 먼지가 끼는 걸 원하지 않을 거잖아요. 당신은 북 세이버 맞죠?" 북 세이버. 크로아티아에서는 그와 같은 사람들을 그렇게 부를까? 북 세이버라는 건 무슨 의미일까? 책이 망각 속으로 빠지지 않게 하는 사람? 읽지 않는 책에 집착하는 사람? 그의 서재는 마루에서 천장까지 책들로 빼곡하다. 다시는 펼치지 않을 책들이다. 읽을 가치가 없어서가 아니라 시간이 없어서다. 소설 『슬로우 맨』의 한 장면입니다(존 쿳시 J. M. Coetzee / 왕은철 옮김 《슬로우 맨 SLOW MAN》 들녘 2009, 65.) '이 사람도 그렇구나.' 생각하며 읽었습니다. 오랫동안 책을 모으는 일에 집중하며 살아왔고, '간간히' '한꺼번에' '많이'.. 2018. 1. 25.
지금 내가 있는 곳 (1) 위로 삼아 나의 경우 정년퇴직하고 나서 처음으로 행복감을 느꼈다고 말하자 동석한 부인은 자기도 그렇다며 맞장구를 쳐주었으나 정작 당사자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 유종호「어느 이산의 뒷얘기-한 시골 소읍의 사회사에서」(에세이),『현대문학』2017 3. 196. 저 자리에 동석했다면 저 '당사자'라는 사람을 보고 "그런다고 무슨 수가 날 것도 아니니까 포기하는 게 낫다"는 말을 해주거나 어쩔 수 없는 일 아니냐며 동병상련의 심정으로 위로해 주었을 것입니다. 우리는―저 '당사자'와 나는―지금 사람들이 잘 모르는 곳에 와 있습니다. 어떤 곳인지 설명하자니까 참 난처하고 애매합니다. 음…… 이렇게 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내가 있는 이곳을 '이쪽'이라고 부른다면, 내가 떠나온 곳,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 뭐.. 2018. 1. 18.
텔레비전이나 보기 2018.1.10 딸아이가 돌아갔습니다. 지난해 12월 9일에 와서 달포쯤 있다가 오후 6시 반에 이륙한 비행기를 탔는데 밤이 이슥하지만 아직 반도 가지 못했습니다(2018.1.13.토. 22:58). 항공로를 모르니까 어디쯤 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공항에서 돌아와 괜히 걔가 있던 방을 들여다보다가 텔레비전 앞에서 꼼짝 않고 세 시간이나 앉아 있었습니다. '내가 뭘 하긴 해야 하는데…….' 강박감인지 평생 텔레비전을 볼 때마다 그 느낌이지만 정작 꼭 해야 할 일은 없습니다. 오늘은 그 앞에 더 오래 앉아 있었을 뿐입니다. 시간은 이렇게 흘러가고 확인해보면 흘러갔고 또 흘러가고 하는 것이지만 사실은 쉬지 않고 그 걸음으로 가고 있을 뿐이고 나는 그저 평범한 인간이니까 이렇게 지낼 뿐입니다. 바보처럼 하고.. 2018. 1. 14.
"어~허!" "하이고~"… 1 앉았다 일어선다든가 자동차에서 내릴 때, 무슨 물건을 들 때, 어쨌든 몸을 좀 움직일 때 흔히 그런 소리를 냅니다. 요즘 나이로는 늙은이 축에도 들지 못하지만 꼴 같지 않게 지병을 얻은 후에 이렇게 된 것인데, 아내는 그걸 아주 싫어합니다. 그러는 나나 듣는 쪽이나 버릇이 되어서 듣는 쪽에서 귓전으로 들을 땐 별 반응이 없지만 의식적으로 들을 땐 즉시 한 마디 합니다. "저런 소리 좀 내지 않으면 안 되는지……." "아이, 듣기 싫어!" 2 그럴 때는 멋쩍게 웃으며, 말하자면 "파이팅!" 하며 하이파이브를 하거나 "하나 둘 셋!" 하고 무거운 물건을 번쩍 드는 것과 같다고 때마다 말을 바꾸어가며 변명합니다. 웃기는 설명이죠. 그러나 아내는 웃지 않습니다. 3 교사가 되어 처음 찾아간 학교에서 만난 K.. 2017. 12. 30.
"귀가 가장 늦게 닫혀요" 1 주말 신문에서 "대통령 3명 염한 '무념무상'의 손"이라는 대담 기사를 봤습니다.1두 면에 걸친 기사를 부담스러워하다가 "귀가 가장 늦게 닫혀요"라는 소제목을 발견했습니다. ―마지막 인사할 때 유족은 어떻게 준비해야 하나요. "염할 때 참여하시라고 권합니다. 마지막엔 얼굴 보고 만져 드리고 아무 말 하지 않는 게 나아요. 울음은 전염됩니다. 고인 수의에 눈물 떨구는 거 아녜요. 그럼 무거워서 못 떠납니다. 귀가 제일 나중에 닫히니까." ―무슨 뜻인가요? "1996년에 말기 암 환자 두 분을 염한 적이 있습니다. 한 분은 부자였고 한 분은 그렇지 않았어요. 그런데 부자는 인상을 쓰고 돌아가셨습니다. 다른 한 분은 표정이 맑았습니다. 알고 보니 돌아가신 뒤에 유족이 좋은 말만 하고 염불도 들려 드렸대요... 2017. 12. 25.
교사와 교육과정 교사와 교육과정 지난가을, 어느 학교에서 거의 잊힌 사람을 초청해 주었습니다. 그나마 늘 하던 얘기를 해야 할 것 같아서 이 파일을 준비했었습니다. 그런데도 당장 올라오는 열차 안에서 '무얼 얘기했는가' 자책감이 들었습니다. 다만 염치없는 소풍을 다녀온 것 같았습니다. 2017. 12. 23.
미련 미 련 이렇게 앉아 있다가 문득, 정리된 게 아무것도 없고 정작 무얼 어떻게 정리할 수 있는지 도무지 알 수조차 없는 삶이었지만, 지금 떠나야 한다면 기꺼이 그 사자(使者)를 따라나설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우선 생각나는 건, 내 것으로 되어 있는 물건들은 얼마 되지 않으니까 누군가.. 2017. 12. 13.
이슬방울에 햇살이 지나는 순간 #1 여직원 두엇이 앉아 있는 강당 출입구 안내 데스크를 지나자 길을 안내하는 학생이 단정하게 서 있었다. 이런 일은 필요가 없는데도 굳이(생각도 없이) 관례에 따르고 있다는 생각을 하며 걷는다. 안내해주지 않아도 그 길로 갈 수밖에 없는 복도를 지나자 잘 차려입어서 더욱 아름다운 L위원장이 꽃다발과 무슨 두루마리 같은 걸 가지고 분주히 나오고 있었다. 나를 맞이하려고 그렇게 나오는 건 보나 마나이고 내가 알은체 했는데도 '저렇게 허접한 차림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그냥 지나쳐 가고 있었다. #2 이동하라는 발령을 받고 나서 그동안 근무한 곳의 주변을 살펴보며 그곳 경치가 아름답다는 걸 발견한다. 울긋불긋 단풍이 들기도 한 풍경에 감탄하며 나중에 정선하기로 하고 여기저기 멋진 사진이 될 듯한 곳들을.. 2017. 12. 10.
'일상(日常)' '일상(日常)' (…) 얼음같이 차가운 물에 하루에 열두 번도 더 손을 담그고 소다 비누로 씻어내는 통에 난생 처음 동상에 걸리기도 했다. 개인이 구입해야 하는 구두는 지독히도 발가락을 죄었다. 모든 유니폼이 그렇지만 교육생 유니폼은 개인의 정체성을 잠식했으며, 치마 주름을 다리고.. 2017. 12. 7.
김중일 「불어가다」 불어가다 김중일 그해 그는 바람이 되었습니다. 그해 나는 바람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내가 지금껏 전국 곳곳에 떨어뜨린 머리카락들이, 밤마다 한데 모여 바람이 되었습니다. 바람이 되어 다시 길어지는 내 머리카락 끝에 부딪혔습니다. 첩첩산중 키 작은 나무 한 그루, 이파리 한 잎의 그늘이 되었습니다. 밤새 불어나 더 세차게 흘러가는 물결이 되었습니다. 바람이 얼굴에 부딪히는 건 내가 불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세상의 첫날부터 바람은, 지금껏 우두커니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는 공중이 입은 옷깃으로, 항시 멈춰 있었습니다. 그 바람이 몸에 부딪힌다는 건, 바람이 아니라 내가 불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람이 머리카락에, 얼굴에, 목덜미에, 손등에 스치는 건 내가 아주 빠르게 불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2017. 12. 2.
눈 온 날 아침 마침내 2017년의 눈까지 내렸다. 첫새벽에 내려서 눈이 내린 것도 모르고 있다가 날이 다 밝은 뒤 창문 너머 눈 풍경을 보았고 늦잠을 잔 것이 아닌데도 무안한 느낌이었다. 너무 멀어진 날들의 겨울방학과 방학책들이 생각났다. 내가 아이들을 가르칠 때 본 방학책이었는지,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 받은 방학책이었는지, 이젠 그것조차 구분하지 못한다. 그런데도 눈이 내려 저렇게 쌓였다. 그새 눈이 내려 저렇게 쌓이다니……. 이렇게 내린 눈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아이들을 가르치며 지낸 나는 눈이 내렸다고 이러고 있지만 눈 같은 건 내려도 그만 내리지 않아도 그만인 채 지내고 있을까? 2017. 11.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