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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학교장 컬럼82

1학년 학부모님께- 외손자의 입학을 지켜보며 저에게는 둘째딸이 낳아준 외손자가 있습니다. 그 애도 오늘 초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제 부모와 있을 때는 '그놈의' 잔소리 때문인지 제법 말도 잘 듣고 질서 있는 생활을 하다가도 제게만 오면 그만 '엉망'으로 헝클어지고 맙니다. 우선 우리 내외에게는 존대어 반 반말 반이고, 도대체 스스로 하는 일이 없습니다. 현관에서는 신발부터 벗겨주어야 하고, 옷도 벗겨주어야 하고, 밥도 먹여주어야 하고, 화장실도 동행해야 하고 -자다가는 페트병 자른 것이 그 애의 화장실입니다- 그 외의 모든 일도 그렇습니다. 하다못해 제 어미가 한마디만 하면 아무것도 살 수 없지만 저와 함께 가게에 가면 이것저것 꼭 사야하는 물건이 참 많습니다. 예를 들어 그 애의 방은 크고 작은, 수많은 종류의 입니다. 그래도 제게는 이른바 '세.. 2008. 3. 3.
모딜리아니 『검은 타이를 맨 여인』 1968년 가을, 쓸쓸한 시절에 곧 졸업을 하게 된 우리는 역 앞 그 2층 다방에서 시화전(詩畵展)을 열기로 했습니다. 일을 벌일 생각은 잘 하면서도 누구는 뭐 맡고, 또 누구는 뭐 하고…… 남을 잘 동원하는 게 제 특성이어서 남에게만 좋은 시(詩)를 내라며 날짜를 보냈으므로 다 챙기고 보니 정작 제 작품은 없었습니다. 늦가을이고 또 한 해가 저무는구나 싶어서 거창하게 '사계(四季)'라는 제목으로 쓰고 보니 영 시원찮았지만 기한이 다 되어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것이 처음 써본 시였고 마지막 작품이었습니다. 별 수 없어 그림이라도 특별한 것을 넣어 그것으로 눈길을 끌자는 생각을 하다가 아메데오 모딜리아니의 『검은 타이를 맨 여인』이라는 그림을 보게 되었습니다. 모딜리아니의 그림은, 어젯밤, 그러니까 2월.. 2008. 2. 18.
고흐 『프로방스의 시골길 야경』 『프로방스의 시골길 야경』은, 초등학교나 중․고등학교 미술 교과서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그림입니다. 무슨 키가 큰 나무가 서 있는 시골길을 두 사람의 농부가 걸어오고 있고, 마차 한 대가 다가오는 저 뒤편으로 한적한 주택이 보입니다. 특징적인 것은, 그 나무의 좌우로 ‘이글거린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 같은 하늘에 역시 ‘이글거리는’ 태양인지 뭔지가 보이는데 그것이 하나가 아니고 둘이어서 ‘희한하다’는 느낌을 주었습니다. 어떤 미술 교과서에는 그 그림을 그린 화가와 나란히 소개되기도 했습니다. 밀짚모자를 쓰고 수염이 텁수룩한, 그러나 파랗고 날카로운 눈으로 이쪽을 쳐다보는 자화상입니다. “반 고흐는 정신이상(精神異常)이었고, 스스로 한쪽 귀를 잘랐다.”는 어느 선생님의 소개도 기억납니다. 『프로방스의 시.. 2008. 2. 8.
양지 예비 학부모님들께 저는 여러분의 자녀가 어떤 아이들인지 궁금합니다. 그 아이들의 부모들은 어떤 분들인지도 궁금합니다. 물론 여러분도 저와 우리 학교 선생님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궁금하시겠지요. 우선 그 소중한 자녀가 우리 학교에 입학하게 된 것을 축하합니다. 대부분의 남녀가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거지만, 그만큼 키워서 드디어 학교에 입학시키게 되었으니 특히 그 애를 낳은 어머니로서는, 그 기쁨과 살레임을 다른 사람이 잘 이해하지 못하고 평범한 일인 양 여기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그래서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고 있지만 태어나 자라고 결혼하여 아이 낳은 보람을 느끼시고 마음속으로는 이 세상 무엇보다 자랑스러워하는 일일 것입니다. 또한 그만큼 기대와 소망도 클 뿐만 아니라 그 기대와 소망만큼 불안하고 초조하고 걱정스럽기도 하시.. 2008. 1. 10.
얘들을 그냥 졸업시켜야 하나? 방학을 시작한지 며칠 되지 않았는데 그날 12월 29일 토요일은 이미 지난해의 어느 하루가 되었습니다. 그날은 선생님들께 소박한 점심식사를 대접하며 미안했고, 그나마 대체로 고마워해서 더 미안했습니다. 선생님들께서 우리 아이들을 잘 지도해주신데 비하면, 오늘날 우리나라 어느 기관, 어느 기업체에서 그처럼 보잘것없는 회식을 할지 좀 서글퍼지기도 했습니다. 그날 아침에는 며칠간 스키 합숙훈련을 하고 돌아온 아이들을 만났고, 그 아이들 중 몇 명이 쓴 소감문도 받아보았습니다. 한 편만 보여드립니다. 스키 합숙 훈련을 마치고 내일도 눈을 뜨면 새벽 5시 30분에 일어날 것 같다. 늘 규칙적인 생활로 하루가 반복되었지만, 스키 실력만은 날이 갈수록 좋아지고 있는 듯하다. 스키장 코스 언덕을 오를 때면 숨 가쁘고 .. 2008. 1. 2.
우리가 이 아이들을 바라보는 방법 '노동의 터전이 논밭과 가정에서 공장으로 옮겨짐에 따라 아이들은 공장노동에 적응하는 교육을 받을 필요가 생기게 되었다. ……. 그래서 나타난 것이 모든 제2의 물결의 사회에 공통된 또 하나의 주요한 구조인 대중교육(Mass-education)이다.' 교장실 창 너머 마른 잎 몇 장이 붙어 있는 목련의 가지 사이로 초겨울 햇살이 화사한 아침나절, 참새 떼처럼 재잘거리며 아이들이 지나갑니다. 저 기막히게 아름답고 사랑스런 아이들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 생각하다가 『제3의물결』(앨빈토플러, 유재천 역, 주우, 1983, 24판, 49쪽)에서 찾은 구절입니다.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 채 폼으로 들고 다니던, 당대를 풍미한 그 책은, 펴본 적이 없는데도 지면이 노랗게 변했습니다. 이미 1980년에 그렇게 썼으므.. 2007. 12. 24.
꼭 경험시켜야 할 ‘발견’ 1990년대 초에 저는 유니세프(국제연합아동기금) 한국지부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이 국제기구가 6․25전쟁 때 헐벗고 굶주리는 우리나라 아이들을 위해 많은 일을 했으며 전쟁이 끝난 후 점심은 아예 굶는 것이 정상인 줄 알았던 그 시절에 학교에 가서 분유와 장난감 같은 걸 배급받은 경험을 되살리며 ‘모든’ 어린이의 보건, 교육, 평등, 보호를 위한 인류애의 실천이라는 그 민간기구의 사업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이야기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우리가 6․25전쟁 이후 오랫동안 그렇게 헐벗고 굶주리는 생활을 한 것을 ‘우리가 언제 그랬냐?’는 듯 아주 우습게 여기는 못된, 못난 습성을 가지고 있으며 가슴 아프게도 그 경험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경우가 너무나.. 2007. 12. 18.
신념의 표상(表象) ‘자신이 “발견되지 않은 지식인”이며 사랑에 빠졌다고 믿고 있는 사춘기 소년의 비틀리고 익살맞은 일기’라고 소개된, 스우 타운센드의『비밀일기』(김영사, 1986)라는 번역본 소설의 첫머리에는 1월 1일 새해의 결심 여덟 가지가 이렇게 소개되어 있습니다. 1. 길을 건너는 장님을 보면 꼭 도와주겠다. 2. 바지는 벗어서 꼭 걸어두겠다. 3. 레코드를 듣고 나면 반드시 판을 껍데기에 집어넣어 두겠다. 4. 담배는 절대 배우지 않겠다. 5. 여드름을 절대 짜지 않겠다. 6. 개한테 더욱 친절히 대해 주겠다. 7.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들을 돕겠다. 8. 어젯밤 아래층에서 싸우는 소리를 듣고 술을 절대로 마시지 않겠다는 결심을 덧붙이기로 했다. 이처럼 옆에 두거나 써놓고 그것만 바라보면 ‘아!’ 하고 새로운 각.. 2007. 12. 10.
“아이는 우리의 소유물이 아니라네요?” 그럭저럭 살다 보니 제자들의 나이도 오십 줄이 되었습니다. ‘그따위로 가르쳐 놓았는데도 이렇게 성장했으니 미안하고도 고맙구나.’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별 것 아닌 일로도 마음이 상할 때도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한 녀석이 식당 개업을 했다기에 다른 제자와 함께 방문하기로 하고, 먼저 꽃집에 들렸다가 들어가겠다고 했더니 “화물차를 보낼까요?” 하고 농담을 했습니다. 으레 하는 농이려니 생각하면 됩니까? 저는 결국 교육자로서 일생을 마칠 사람이어서 그런지 이성적으로는 그렇게 생각해야 한다고 다짐하고, 이런 일로 제 아내로부터 늘 충고를 받으며 살아왔으면서도 감성적으로는 그렇게 하지 못하고 속이 상했습니다. “야, 이놈아, 넌 장사를 하니까 이런 일로 어디 방문할 일이 있을 때 큰 화분을 사도 .. 2007. 12. 3.
You Will Never Walk Alone 「You Will Never Walk Alone」 Mormon Tabernacle Choir When you walk through the storm, hold your head up high, And don't be afraid of the dark At the end of the storm is a golden sky, And the sweet silver song of a lark. Walk on through the wind, walk on through the rain, Though your dreams be tossed and blown, Walk on, walk on with hope in your heart. And you'll never walk alone, You'll never wal.. 2007. 11. 26.
K 선생님의 우려에 대한 답변 학교를 옮겼을 때의 서먹서먹하고 서글픈 심정을 좀 이해하실는지 모르겠습니다. 세 번째 글에서 밝혔지만 저는 자신이 교장이 되어 있는 것에 그리 대단한 느낌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남들은 대체로 자부심을 가지고 있고, 교장이 되기 위해 오랫동안 그렇게 노력했으므로 교장 노릇을 의욕적으로 하겠다는 것을 떳떳이 이야기하고 있지만 저는 왠지 ‘이제 나이도 제법 들었으니 교장이나 하라.’는 명을 받은 것 같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의 경우, 처음부터 서글픈 느낌 같은 것은 전혀 가지지 않았다거나 이 자리에 앉자마자 의욕적으로, 그리고 이 학교의 구성원들에게 친밀감을 느끼며 그야말로 한 가족이 된 느낌 속에서 지냈다고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지금은 어떤지 묻고 싶습니까? 그냥 짐작에 맡기겠습니.. 2007. 11. 19.
참 어처구니없는 교육의 획일성 지난봄에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교육계 인사가 새로 부임해 와서 관할 학교의 교장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교장을 할 때 있었던 일들을 얘기했습니다. 우선 '숙제 없는 날'을 정해서 그날은 창의성 교육이 중점적으로 이루어지게 했답니다. 또, 아이들에게 효孝 교육을 잘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부모에게 꼭 존댓말을 쓰게 하고, 등하교 때는 꼬박꼬박 인사를 드리게 했으며, "나는 효자다."라는 리본을 달고 그 아래에 장래 희망을 적어서 달고 다니게 했답니다. 그는 또 그러한 일의 실천 여부에 대한 부모의 확인을 받아오게 했더니 아이들은 설거지를 하는 어머니의 엉덩이에 대고 사인을 해달라고 조르는가 하면, "나는 효자다. 대통령", "나는 효자다. 운전사" 같은 리본을 달고 다니게 되었으며, 음식점 같은 .. 2007. 11.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