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의 터전이 논밭과 가정에서 공장으로 옮겨짐에 따라 아이들은 공장노동에 적응하는 교육을 받을 필요가 생기게 되었다. ……. 그래서 나타난 것이 모든 제2의 물결의 사회에 공통된 또 하나의 주요한 구조인 대중교육(Mass-education)이다.'
교장실 창 너머 마른 잎 몇 장이 붙어 있는 목련의 가지 사이로 초겨울 햇살이 화사한 아침나절, 참새 떼처럼 재잘거리며 아이들이 지나갑니다. 저 기막히게 아름답고 사랑스런 아이들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 생각하다가 『제3의물결』(앨빈토플러, 유재천 역, 주우, 1983, 24판, 49쪽)에서 찾은 구절입니다.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 채 폼으로 들고 다니던, 당대를 풍미한 그 책은, 펴본 적이 없는데도 지면이 노랗게 변했습니다. 이미 1980년에 그렇게 썼으므로 어언 30년이 다 되어 가는 그 지적을, 오늘 우리 교육이 제대로 받아들이고 있는가에 대해서 의구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는 이어서 이렇게 썼습니다.
'공장을 모델로 해서 설립된 대중교육은 초보적인 읽기와 쓰기, 산수(算數)를 중심으로 해서 역사와 그 밖의 과목도 극히 간단하게 가르쳤다. 그러나 이것은 표면상의 교과과정일 뿐 그 배후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숨은 교과과정이 있었는데 이것이 산업사회의 기반으로서 훨씬 중요했다. 이 교과과정은 세 개의 덕목(德目)으로 되어 있다. 대개의 산업주의 국가에서는 지금도 이 세 가지가 덕목으로 되어 있다. 그것은 첫째 시간 엄수, 둘째 복종, 셋째는 기계적인 반복작업에 익숙해지는 일이다.'
여러분의 학창시절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그렇지 않았습니까?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예를 들어 '시간 엄수'가 늘 나쁘다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 가령 약속시간을 지키는 것은 언제나 미덕일 것입니다. 토플러가 이야기하는 '한심한' 시간 엄수란 이런 것이 아닐까요? "이 문제를 주어진 시간에 다 풀어라." "다 해결한 사람 손들어. 아직도 못했나!" 더욱 한심한 '시간 엄수'도 있지요. "(생각할 시간도 주지 않고) 아는 사람 손들어." 시간 엄수, 복종, 기계적인 반복. 오늘 우리의 교육현장이 아직도 이와 같다면 얼마나 무서운 일이겠습니까. 학교교육이 구태의연하다는 지적은 아주 오래된 일입니다. 오죽하면 어린 시절 부적응아로 홀대받은 아인슈타인도 뮌헨의 루이트폴트 김나지움에서는 교사에 대한 절대 복종과 암송, 주입식 교육을 강요하는 권위주의에 염증을 느껴 교사를 '중위(中尉)'에 비유했겠습니까(알베르트 아인슈타인, 홍수현․구자현 역, 『나의세계관』, 중심, 2003, 15쪽).
토플러가 그렇게 주장했거나 말았거나, 다행히 우리 세대는 교과서에 담긴 핵심을 잘 암기하여 정확한 답 한 가지를 잘 고르면 진학도 하고 좋은 직장에도 갔습니다. 말하자면, '토끼와 거북'을 읽고 그 우화의 교훈이 '노력'이라는 것을 척척 알아맞히면 앞줄에 설 수 있었습니다. 그 외의 답을 하거나 그것에 의문을 제기하면 '쓸데없는 말을 하는 골치 아픈 학생'이었습니다. 직장에서도 허구한 날 똑같은 일을 했으므로 '성실' '근면' '협동'이면 그만이었습니다.
이제는 정말로 그렇지 않다는 걸 토플러는 일찍부터 경고한 것입니다. 그는 '제3의 물결'은 '사회의 근본으로부터 변혁되는 심오한 사건'으로, 제3의 물결 문명에서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결코 소모되지 않는 원료는 상상력을 포함한 정보'라고 했습니다. 누가 평범한 신발을 찾고 이름 없는 상표의 옷이나 화장품을 삽니까. 사람들은 이야기가 담긴 핸드폰을 고르고, 꿈이 스민 신발을 찾습니다.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들고 꿈을 가꾸어 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아이들을 20세기의 그 공장에서 부지런하기만 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무턱대고 순종하면 좋은 사람'으로 기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유치원부터 6학년까지 그 잘난 엘리트들이 만든 지식을 외우는 공부만 시킬 수가 없게 되었고, 그 지식을 스스로 발견하고 만들어낼 수 있는 공부를 시켜야 하게 되었습니다. "이걸 암기하라!"보다 "무엇이 문제인가?" "무엇을 알고 싶은가?"를 물어야 하게 되었습니다. 그 아이가 가려는 길을 잘 안내하는 교육을 시켜야 하게 된 것입니다. 성적이 좋은 아이는 학교를 마치자마자 학원으로 달려가 또 강의를 듣는 아이가 아니라 자기의 계획에 따라 혼자서 공부하는 아이이지 않습니까. 바꾸어 말하면, 이제는 조용하게 설명을 잘 듣고 다 외우게 하여 성적순으로 줄을 세우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아이들 하나하나가 가진 개성을 다 살려주는 공부를 시켜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교육을 우리는 '모두를 성공시키는 교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 아이는 비범하고 아름다우므로 이 아이야말로 제대로 교육받고 꼭 성공해야 한다는 마음이 없는 부모는 없습니다. '세상에 이런 일이'나 '놀라운 세상' 같은 TV 프로그램에 나오는 대여섯 살 아이는 우리 마을, 우리 학교에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마음을 비우고 한번 살펴보십시오. 예쁘지 않고 신통하지 않은 아이는 없습니다. 저는 이 아이들을 모두 성공시켜야 하는 무한 책임을 절감하고 있습니다. 간절한 기원은, 우리 선생님들은 물론 학부모들도 저의 생각과 똑같다면 이 아이들을 위해 얼마나 좋은 일일까, 바로 그것입니다.
<파란편지> 중에서 일부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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