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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학교장 컬럼

모딜리아니 『검은 타이를 맨 여인』

by 답설재 2008. 2. 18.

 

〈검은 타이를 맨 여인〉 1917. 캔버스에 유채. 65×50㎝. 개인 소장.

 

 

 

 

1968년 가을, 쓸쓸한 시절에 곧 졸업을 하게 된 우리는 역 앞 그 2층 다방에서 시화전(詩畵展)을 열기로 했습니다. 일을 벌일 생각은 잘 하면서도 누구는 뭐 맡고, 또 누구는 뭐 하고…… 남을 잘 동원하는 게 제 특성이어서 남에게만 좋은 시(詩)를 내라며 날짜를 보냈으므로 다 챙기고 보니 정작 제 작품은 없었습니다.

 

늦가을이고 또 한 해가 저무는구나 싶어서 거창하게 '사계(四季)'라는 제목으로 쓰고 보니 영 시원찮았지만 기한이 다 되어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것이 처음 써본 시였고 마지막 작품이었습니다. 별 수 없어 그림이라도 특별한 것을 넣어 그것으로 눈길을 끌자는 생각을 하다가 아메데오 모딜리아니의 『검은 타이를 맨 여인』이라는 그림을 보게 되었습니다. 모딜리아니의 그림은, 어젯밤, 그러니까 2월 17일에 방송된 고교생들의 「골든벨」에서도 소개되었습니다. 모딜리아니 특유의 우수에 젖은, 목이 긴 여인들. 그 그림 『검은 타이를 맨 여인』을 사진관에 부탁해서 흑백으로 인화해보았더니 희한하게도 그 표정의 우수가 더 짙어져서 의도대로 되었구나 싶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시화전이라는 걸 시작하자 사람들이 제 작품은 보는 둥 마는 둥하고 뚫어져라 그 목이 긴 여인에게만 관심을 보였습니다. "저 여인이 애인이죠?" 누군가 짓궂게 묻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하고는 그간 꼭 40년의 세월이 흘렀는데, 지난겨울 어느 날, 일산 '아람미술관'에서 『열정, 천재를 그리다 '모딜리아니와 잔느의 행복하고 슬픈 사랑展'』(2007.12.27~2008.3.16)을 연다는 신문기사를 보았습니다. '고양 일산?' 그 먼 곳을 일부러 가기는 어려울 것 같아서 그곳 K초등학교 C교장에게 작품전 도록을 좀 구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렇게 해놓았는데 공교롭게도 고양교육청으로부터 관내 전 초등학교 연구부장교사 연수회에 특강을 해달라는 부탁을 받게 되었는데, 그 교육청 옆이 바로 아람누리 문화회관이고 그 회관 안에 아람미술관이 있어서 모딜리아니의 작품을 직접 감상하는 행운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전시장에는 모딜리아니의 여인이 여러 그림 속에 들어 있었습니다. 그림 속의 그 여인들이 살아 있는 것 같아서 똑바로 쳐다보기가 부끄럽고 쑥스러웠으나 '그림인데…….' 하며 태연을 가장하고 오랫동안 그 앞에 서 있었습니다. 공허해 보이는, 언제까지라도 그렇게 쓸쓸할 것 같은, 감정을 건드리는 어떤 말을 하면 곧 젖어들 것 같은 그런 눈들이었습니다. 똑바로 쳐다보기가 미안한 고운 목, 그 목과 가슴 밑으로는 곱게 흐르고 있을 붉은 피가 생생하게 느껴지는 관능, 보고 싶으면 보라는 듯한 자세 때문에 누추한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전문가의 설명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모딜리아니는 시인이다. 그림으로 시를 쓰는 시인. 그의 작품을 대하면 시가 떠오르고, 나지막한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축축하게 젖은, 그리고 어쩐지 쓸쓸한 사랑의 시, 그러나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존경과 믿음을 절절하게 담은 생명의 노래…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많은 사람들의 호수처럼 깊고 푸르른 초점 없는 눈, 그 깊은 곳에 진하게 스며 있는 '사람 사랑'의 열정…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운명의 슬픔, 근원적 외로움의 시…."

― 장소현, 2000,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열화당미술문고, 8쪽.

 

"천국에서도 당신의 모델이 되어드릴게요." 모디와 잔느의 만남, 잔느가 사랑한 모디와 그의 작품세계, 죽음도 갈라놓을 수 없었던 그들의 행복하고도 슬픈 사랑 이야기.

― 「아람미술관 데일리뉴스」(홍보물)

 

 

우리가 아이들과 함께 이곳 남양주 오남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 서울 혹은 강남에서 사는 것과 어떤 점이 다를까요?

① 집값이 다를 뿐이다.

② 유명한 학원이 없고, 학원의 종류와 수가 적다.

③ 교통은 물론 생활 자체가 고급스러울 수가 없다.

④ 하여간 촌스럽다. …….

 

어떤 답이 제대로 된 것일까요? 그러면 이곳이 성남 분당이나 고양 일산 같은 곳과 다른 점은 어떤 것일까요?

 

우리가 아무런 생각 없이 살아간다면 이곳이 그런 곳보다 나을 게 별로 없지만, 우리가 아이들을 위해 어떤 배려를 하는가에 따라 이곳이 그런 곳보다 더 좋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직은 우리 오남에 모딜리아니 같은 유명한 화가의 작품을 가지고 와서 전시해줄 사람이 없습니다. 오남의 어느 시설에서 그럴듯한 연주회 한번 개최해줄 사람도 없습니다. 그 전시장이나 연주회장에 가서 주최 측을 만족시킬 수 있는 인원을 동원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아이들을 가능하면 자주 데리고나가 많이 보여주자는 제안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더러 이렇게 주장할 사람도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 학교는 행사가 너무 많은 것 같다. 6학년의 경우 1학기에 수련회 가고 2학기에 수학여행 가고 또 현장학습도 가고. 그러면 아이들은 좋아할지 모르지만 공부는 언제 하나? 또 부모로서는 몹시 힘이 든다. 그런 행사들 중에서 선택하여 좀 줄이면 좋겠다."

저는 학부모들이 힘든다는 것, 단지 그 이유 하나 때문에 조심스러울 뿐 "괜찮으니 마음 놓고 이야기해보라" 한다면 이것저것 합해서 최소한 한 달에 한 번만이라도 현장에 데리고 나가서 가르치게 하고 싶습니다. 이 생각이 틀렸다면, 오늘날 이른바 '살 만하면' 그 지역, 그 도시에 문화적 기반을 갖추려는 지방자치단체나 지식인, 문화인들의 노력과 헌신은 비생산적, 비현실적, 비교육적이어서 주민들로부터 비난받아 마땅할 것입니다. 또 이제는 문화가 부(富)의 기본이고 부가가치의 원천이라는 주장도 등장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모딜리아니의 그림이나 지난번에 이야기한 반 고호의 그림이나 그곳에 가서 직접 보면 교과서, 아니 교과서보다 인쇄 상태가 더 고급스런 어떤 책에 나와 있는 그 그림들의 사진이라 하더라도 얼마나 조잡하고 엉뚱한지 실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미술품이나 음악의 경우에는 그러한 느낌이 더욱 짙어서 그런 전시회, 그런 연주회 한번 가보는 것을 쓸데없는 일이라고 치부한다면, 저로서는 결국 이 외진 곳에서 살아가는 것에 한숨이 나온다고 실토할 수밖에 없습니다.

 

고양의 그 전시장에서는 강의 시간에 맞추느라고 점심도 굶은 채였는데, 구경을 다하고 얼른 건너편 L백화점 식당가에 올라가 옛날자장면을 시켜 먹었더니 시장해서 맛이 기가 막혔습니다.

 

마침 봄방학이 되어 이 이야기를 해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