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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1059

그리운 메타세쿼이아, 그리운 계수나무 위쪽은 메타세쿼이아, 아래쪽은 계수나무입니다. 사이로 보도블록이 깔려 있는 길을 나 혼자서 '오솔길'이라고 부릅니다. 오래전 D시 사범대학 부속초등학교에 근무할 때, 그 학교 앞으로는 그 시가지에서 가장 넓은 대로가 지나가고 그 대로변 학교 담장 안쪽으로는 수십 그루 나무와 맥문동 등 갖가지 풀들로 이루어진 한적한 곳이 있었는데 나는 우리 반 아이들과 함께 그 나무 아래 길을 '사색의 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는 우리 반 놈들이 다툴 때마다 "둘이서 손 잡고 사색의 길을 두세 번 왔다 갔다 하고 돌아와! 두 번 돌아야 할지 세 번 돌아야 할지는 너희가 돌면서 정해!" 했습니다. 그 산책로를 다녀온 그놈들은 그것으로 다 해결되었다는 듯 내 허락도 받지 않고 각자 자기 자리로 돌아가곤 했습니다. 나중에 .. 2023. 9. 7.
지나가버린 꿈의 나날들 나는 지금 자그마한 아파트에 삽니다. 처음엔 돌아눕기도 어렵겠다, 숨 쉴 곳도 없다 싶고 여러 가지로 불편하더니 지금은 이만해도 괜찮다고 여기며 살아갑니다. 이 아파트에서 이렇게 작은 집들은 3개 동입니다. 어쩌다가 젊은 부부나 어린아이와 사는 집도 있지만 다 늙어서 부부가 등산이나 다니거나 뭘 하는지 둘이서 들어앉아 있는 집이 많습니다. 젊은 아주머니가 어린아이를 데리고 엘리베이터를 타면 잠깐이라도 분위기가 달라지는데 늙어버린 부부가 타면 그들끼리나 서로 간에나 아무 말이 없고 무표정합니다. 주차장에 내려가보면 평일인데도 차가 별로 빠지지 않습니다. 출근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사 오는 집을 봐도 그런 사람들입니다. 들어갈 공간이 없어 버려져야 마땅한 서장, 저렇게 어처구니없이 큰 액자 같은 물건이.. 2023. 9. 3.
봉황을 따라 날아가버린 소사 부부 진(秦) 나라 목공(穆公)은 딸 농옥(弄玉)이 퉁소를 잘 불어 뜰에 공작과 백학을 불러들이는 소사(蕭史)를 좋아하자 그에게 시집을 보냈다. 소사는 날마다 농옥에게 퉁소로 봉황 울음소리 내는 방법을 가르쳐 몇 년 후에는 봉황이 그 집 지붕에 날아와 머물게 되었다. 목공이 그들을 위해 봉대(鳳臺)를 지어주자 부부는 그 위에 머물러 몇 년 동안 내려오지 않다가 어느 날 봉황을 따라 함께 날아가 버렸다. 신선 이야기《열선전》에 나오는 이야기. 봉황을 따라 그렇게 날아가며 소사는 얼마나 좋았을까, 농옥은 또 얼마나 행복했을까? 골똘하면 한 가지 일에 집중할 수 있고 신선이 될 수 있었을까? 마음과 몸에 상처가 많으면 길을 보고도 그렇게 할 수가 없었겠지? 날아갈 수 없으면 동전 한 닢을 가지고 강물 따라 가게 되.. 2023. 8. 31.
엿새간의 '황금연휴' 여당이 추석 연휴와 개천절 사이 징검다리 날짜인 10월 2일을 임시공휴일로 지정해줄 것을 정부에 공식 요청했다. 정부가 이를 받아들이면 추석 연휴부터 개천절까지 엿새간의 '황금연휴'가 가능해진다. '머니투데이'(2023.8.28) 기사 (「與 "10월 2일 임시공휴일 공식 건의"…올 추석 '목금토일월화' 쉰다」)를 보며 옛 일이 떠올랐습니다. 오랫동안 광화문 정부종합청사(현 정부서울청사) 18층에서 근무하다가 2004년 9월, 초등학교 교장으로 나갔습니다. 교육부 근무할 때는 연휴에도 그대로 쉬어본 적이 별로 없어서 느낌으로는 몇십 년 만에 맞이하는 듯한 가을이고, 아이들은 물론 좋아하는 사람이 많은 우리의 명절 추석이 다가와 교장 재량으로 연휴에 이틀인가 더 쉬게 했는데 마침 교장실에 들어온 학부모 대.. 2023. 8. 30.
명탐정은 좋겠다 우리 동네 중심지로 내려갈 때 바라보는 광고문입니다. 저쪽 길 차단벽에 붙은 "명탐정 사무소", 그 벽에 붙어 서서 몇 번이나 확인했습니다. 17년 수사 경력, 표창 등 32회 수상, 7회 연속 으뜸 형사 출신의 '명탐정'... 그때마다 고등학교 친구가 떠올랐습니다. 뭘 하는지, 지금도 서울 사는지, 건강한지... 이홍식. 우리는 상주고등학교 12회 졸업생입니다. 26, 7년 전 초겨울 저녁, 서울 어느 경찰서에 근무한다는 그를 딱 한 번 동기회에서 만났는데 내가 미쳤지, 이후 차일피일하다가 그만 연락을 못했습니다. 그의 부모님은 읍내에서 싸전을 했습니다. 가끔 뵈면 홍식이 친구라고 좋아해 주셨습니다. 그는 담배를 많이 피워서 나에게도 가르쳐주었고(심장병으로 들통이 날 때까지 47년을 피웠네요), 무슨 .. 2023. 8. 28.
직박구리에게 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너희들 존재조차 몰랐었어. 관심이 없었던 거지. 아직 날이 채 밝지도 않은 새벽부터 꽥꽥 쫵쫵 악착같이 떠들어대는 녀석들, '행동대장'이 꽥꽥거리며 지휘하는 대로 무리를 지어 다니며 달콤한 열매가 달린 나무를 점령하는 것들, 익은 열매를 거들낸 다음엔 익지 않은 것조차 감미만 돌면 흔적도 남기지 않고 먹어치우는 것들, 방조망 아래로 기어들어가서라도 실컷 따먹고는 나오지를 못해 푸드덕거리다가 꺼내주면 고마워하지도 않고 달아나는 것들, 꺼내줄 사람이 없으면 그 자리에서 말라죽어버리고 날개와 깃털, 해골만 남기는 것들, 이쪽저쪽으로 휙 휙 바람을 일으키며 위협 비상을 하는 것들, 이(李) 상무는 산까치로 부르지만 뭘로 봐도 직박구리가 분명한 것들, 뭔가 좋아할 만한 구석을 가지고 있겠지.. 2023. 8. 17.
"안단테 안단테 Andante Andante" 저물어 석양이 붉고 내일이 휴일이어서 차는 끝없이 밀리고 몸이 굳어버린 건 이미 한참 되었어도 주차해서 굳은 몸을 펴줄 만한 장소는 보이지도 않는데 "세상의 모든 음악"(93.1) DJ가 아바의 노래를 들려줍니다. 나는 그 시절에 듣던 노래들의 가사를 번역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냥 흥얼거렸습니다. 다행인 것은 아무도 무슨 노래냐고 묻지 않았습니다. ('뭘 알겠나?') 나는 세월도 그렇게 흘려보냈습니까? 아이들도 그렇게 가르쳤습니까? 다 망쳐놓았습니까? 생각만 해도 기가 막힙니다. 노래를 들으며 E대학교 영문과 교수를 지낸 P를 생각합니다. Take it easy with me please Touch me gently like a summer evening breeze Take your time mak.. 2023. 8. 15.
"HAPPY DAY, 좋은 일이 생길 거예요" 지난달에는 보건소를 찾아가 PCR 검사를 받아야 했고, 5일간 병원을 드나들었고, 검사 때문에 7일간 음식 제한을 받았다. 와중에 어느 진료실 출입구가 저렇게 디자인되어 있는 걸 보고 고마워했다. 이번 달에는 딱 두 번만 다녀왔고, 이제 한 번만 가면 되니까 그나마 다행이다. 아내에겐 미안하고 쑥스럽지만 나는 지금은 씩씩하다! 지난번에 다짐한 대로 지금 이 시간, 나는 행복하다고 생각하려고 한다. 2023. 8. 9.
"난 맛있는 건 나부터 먹어" 멋진 레스토랑 분위기의 식탁에 호텔에서나 보던 스테이크가 놓여 있다. 그 여배우가 스스로 차린 음식이다. 일흔이 넘었다는데도 아직 참 고운 그녀가 아름다운 옷을 입고 자리에 앉아 포크와 나이프를 집는다. "난 말이야, 맛있는 것은 나부터 먹어. 자식들만 챙겨주면 엄마는 이런 건 싫어하거나 못 먹는 줄 안다니까?" 그녀가 한 말은 꼭 이렇게는 아니었겠지만 아마도 비슷하긴 했을 것이다. 어쨌든 이보다 훨씬 더 자극적이었을 것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그녀가 아주 미웠다. 아니, 그녀를 사정없이 미워하기로 했다. 지금까지 자식을 위해 헌신한, 헌신까진 아니라 해도 맛있는 것 먹으면 가족들부터(가족들을 잠깐이라도) 생각한 사람은 허탈해하지 않았을까? 난 지금까지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아온 거지? 이제 와서 .. 2023. 8. 7.
세월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텔레비전에서 오십 대 중반의 연예인들을 보며 살아갑니다. 그들 중 단 한 명도 나를 모르지만, 나는 자주 그들을 의식하며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느낌일 때도 있습니다. 어제는 더 젊은 연예인들이 그들 오십 대 앞에서 조심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문득 저 오십 대 중반 연예인들은 활발하게 활동하는 지금을 시작이라고 여길 수도 있지만 그렇게 여기고 싶어 할 수도 있지만 곧, 시간이 너무 빠르게 흐른다는 걸 느끼게 되고 내일, 그새 시간이 이렇게나 흘러갔구나, 뒤돌아보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세월은 일흔에도 자식을 가져 세상을 놀라게 하는 한둘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여든아흔에도 열정으로 살아가는 몇몇 유능한 사람들을 위한 것도 아닐 것입니다. 세월은 성근 체에 담긴 고운 모래처럼 혹은 결국 긴 시간을.. 2023. 8. 3.
꽃이 진 자리 한때 파란 꽃이 더 많던 자리에 흰 꽃이 늘어나 주종(主種)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돌보지 않았던 저곳의 저 꽃들은 이미 세상에 없습니다. 이것도 저것도 다 저버린 곳에 지금은 다른 종류의 풀들이 자라고 있습니다. 가을 끝 무렵 그 풀들도 시름시름 앓다가 가버리고 다시 두어 가지 풀들이 새로 자리를 잡아 겨우내 근근이 혹은 꿋꿋하게 살아갈 것입니다. 저 꽃들을 들여다보던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 시간에 저 꽃들 중 어느 하나가 나에게 긴 세월에 비하면 남은 시간은 그리 길진 않다고 거의 다 지나갔다고 이야기해주려고 했었을지도 모릅니다. 2023. 8. 1.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에너지 늙는다는 건 무엇일까? 다시 직장을 구하거나 돈을 한 번 더 벌어보거나 다시 사람을 만나거나... 무엇을 새로 시작하거나 할 기회나 에너지가 소멸된다는 것이겠지? 그런 사람에게 뭘 달라고,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건 염치가 없고 도리가 아니고 예의가 아니고 있을 수 없는 일 아닌가? 전제가 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새로 시작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스스로 포기하거나 하는 사람은 게으르다느니 어떻다느니, 의례적인 헛소리를 하는 인간과는 일단 대화를 거부하고 싶다. 소설《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에서 본 장면이다. # 1 나를 바라보는 모리츠의 눈은 충혈되어 있었다. "너를 보내고 싶지 않구나, 스밀라." 모든 인생은 정화를 일으킬 수 있는 잠재력을 포함하고 있다. 모리츠는 그 기회를 잃어버렸다. 지금 의자에 .. 2023. 7.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