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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1064

꽃은 피네 꽃은 피네. 곱게 피네. 아랑곳하지 않고 그렇거나 말거나 피네. 그냥 피네. 2023. 4. 13.
눈 깜짝할 사이 나는 분명 저기에 있었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여기 있다. 이런 순간들이 반복된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이럴 때마다 내 정신은 아득한 곳에 머물다가 돌아온 듯하다. 방금 어제저녁의 양치질을 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돌연 오늘 저녁의 양치질을 하고 있다. 나는 공간과 시간을, 그 변화와 흐름을 객관적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인간이 되었다. 정신을 차린다고 되는 건 아닌 것 같다. 이건 결국 서글픔이겠지만 흥미롭기도 하고 이런 경험에 대한 감사함도 있다. 2023. 4. 11.
봄바람의 그림자 2023. 4. 8.
역시 덧없는 봄 눈 온 듯했다. 올봄은, 어제까지의 봄은 정말이지 무슨 수나 날 것 같았다. 끝까지 치솟을 것 같았고, 끝이 없을 것 같았고, 올해만큼은 이제 여름도 가을도 없을 것 같았다. 그러던 그 봄이 하룻밤 새 다 떨어져 무참히 깔려버렸다. 이제 이 허전한 봄을 어떻게 보내나... 덧없다. 이런 걸 가지고 덧없다, 속절없다 했는가 보다. 2023. 4. 5.
벚꽃잎 떨어져 사라져가는 봄날 일본 정신의 뿌리와 그 정체성을 찬양하기 위해 《무사도》(양경미·권만규 옮김, 생각의나무 2004)라는 책을 쓴 니토베 이나조(新渡戶稻造)는 그 책의 마지막을 비장하게, 서정적으로 다음과 같이 끝냈다. 무사도는 하나의 독립된 도덕의 규칙으로서는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힘은 지상에서 소멸하지 않을 것이다. 그 무용(武勇)과 문덕(文德)의 교훈은 해체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광명과 영광은 폐허를 뛰어넘어 소생할 것이 틀림없다. 그 상징인 벚꽃처럼 사방에서 부는 바람으로 꽃잎이 흩날려도 그 향기로 인생을 풍요롭게 하고 인류를 축복할 것이다. 백 년 뒤, 무사도의 관습이 사라지고 그 이름조차 잊혀지는 날이 올지라도 "길가에 서서 바라보면" 그 향기는 보이지 않는 머나먼 저편 언덕에서 바람과 함께 .. 2023. 4. 4.
겨우 손목뼈에 서너 줄 금이 갔다는데 지난 2월 말에 나는 이런 글을 써놓았었다. * 겨우 손목뼈에 서너 줄 금이 갔다는데 겨우 그 정도였는데 내 생활은 변했다. 운전을 못한다. 해도 될 것 같긴 한데 돌발상황이 일어날까 봐 엄두가 안 난다. 식사를 어린애처럼 한다. 포크로 하고, 왼손을 하고, 오른손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여서 음식물을 찢거나 자를 수가 없다. 이것쯤이야 싶던 칼질도 왼손으로 하니까 차라리 아예 안 하는 게 낫다. 양식 먹을 일이 없으니 다행이다. 스파게티는 좋다. 왼손으로라도 돌돌 말면 된다. 워드를 못한다. 손목이 비틀어지면 무슨 큰일이나 난 것처럼 신호가 오니까 '독수리타법'을 쓴다. 글씨 쓰기도 거의 술 취한 사람 수준이다. 왼손으로 해놓은 어제의 메모를 오늘 알아볼 수가 없어서 화딱지가 난다. 이런 바보! 왼손으로 .. 2023. 4. 3.
어디까지가 나인가? "미흡함, 거북함, 수치감, 아픔, 고통, 절망스런 그 어떤 기억이라도 지금에 뒤돌아보니 리얼함이 묻어 있는 살았다는 증표가 아닐까." 이달엔가 지난달엔가, 월간 "현대문학"에 연재되는 김채원 작가의 글에서 옮겨 써놓은 문장이다. 그런가? 정말 그런가? 그러면 그런 미흡함, 거북함, 수치감, 아픔, 고통, 절망들을 털어놓을 수도 있을 것인가? 살았다는 증표이므로. 그렇지만 나는 나의 그런 것들을 털어놓을 수가 없다. 사람들이 '아, 답설재에게 그런 일이!.....' 할 것이 어렵게 다가온다. 나를 바라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수도 있는데도 그렇다. 나 자신에게부터 그게 어려운 것일까? 아니면 내가 '아직도 덜 된 인간이어서'일까? 2023. 4. 2.
"좋은 아침" 아파트 앞을 내려가는 사람들을 내려다본 아침에 나는 직장에 다닐 때의 아침을 생각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그렇게 인사하는 사람도 있었다. 좋은 아침. 어제와 같으면 내겐 좋은 아침이다. 모든 것은 흘러가서 어제와 같을 리 없지만 그렇게 창문을 내다보는 아침에 나는 일쑤 어제 아침과 같은 아침이라는 착각을 하게 된다. 그러면서 좋은 아침이라는 단순한 행복감을 느낀다. 그렇지만 '좋은 아침'이던 그 아침은 이미 사라지고 없다. 그게 아쉽다. 막막하다. 2023. 3. 29.
온갖 봄 온갖 봄이 한꺼번에 왔네! 어디든 다 이 봄이 와 있으면 더 좋겠네~~~ 2023. 3. 27.
봄은 어김없이 오네 온갖 사정을 막론하고 봄은 오고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봄은 오고 생각은 사람마다 다 달라도 봄은 오네 2023. 3. 24.
노인의 시간 새벽에 쓸데없이 일찍 잠이 깨어 오랫동안 뒤척였다. 그 시간이 꽤 오래 흘러 마침내 일어날 수 있었다(잠시, 왜 눈을 떴느냐는, 늙었으면 죽어야지 왜 살아 있느냐는 구박을 받더라는 씁쓸한 우스개가 생각났다). 어제저녁에는 고요해서 책을 읽을 수도 있었는데 괜히 '적막하구나...' '적막하구나...' 하며 두어 시간이나 헛된 시간을 보냈고 마침내 잠들 수 있었다. 오늘은 또 그렇게 해서 일어난 새벽부터 이 저녁까지 뭘 했는지 뚜렷한 기억이 없다. 그런데도 또 저녁이 되었고 두어 시간 후에는 구처 없이 잠자리에 들어야 한다. 이 저녁에도 책을 읽으면 좋을 텐데 나는 적막하다고, 한탄할 일도 아닌 걸 가지고 한탄처럼 생각하며 어정대고 있다. TV만 켜놓지 않는다면 나의 세상은 사실은 늘 이렇게 적막할 수밖에 .. 2023. 3. 23.
버려진 책장 : 먼지 대신 책 버리기 적어도 서너 곳일 이 아파트 폐기물 처리장에는 걸핏하면 멀쩡한 책장이 나와 있다. 물론 다른 가구도 나온다. '저렇게 나와 있으면 자존심 상하지 않을까?' 'AI 시대가 되어 책장 같은 건 구식 가구가 된 걸까?' '내겐 저걸 들여놓을 만한 공간이 없지?' '요긴하게 활용할 수 있을 텐데...' 책을 모으고 틈틈이 분류하고 흐뭇한 마음으로 살펴보고 하던 시기는 지나가버렸다. 그 시절엔 그렇게 하는 것이 지상의 목표였다. 솔직하게 말하면 지위나 돈 따위와는 비교할 수가 없는 가치였다. 그런 책이고 책장이었다. 그 책, 그 책장들이 바로 나라고 해주면 그보다 고마울 일이 없었을 것이었다. 이젠 그렇진 않다. 뭐가 변했나? 아니다. 세월이 갔을 뿐이다. 세월이 간 것이어서 그런 흐름에 무슨 관점이 필요할 것도.. 2023. 3.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