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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돈 : 내 친구 김교수의 경우

by 답설재 2023. 11. 30.

 

 

 

10월 25일 수요일에 그 카페에서 만났을 때 김 교수는 뜻밖의 주문을 했다.
"우리 스테이크 시킵시다."
"비싼 걸 뭐 하려고요."
"제가 살게요....."
김 교수는 미국에서 한 달에 1,000만 원 정도의 연금이 온다고 한다. 그러니까 좀 써도 된다는 것이다.

손바닥 1/3만 한 크기의 스테이크가 나온 걸 본 순간 '이게 5만 원짜리라고? 이걸 먹고 때가 되겠나' 싶었다. 먹고 나니까 보기와 달랐다.
김 교수는 반밖에 먹지 못해서 남긴 걸 보니까 좀 아까웠다.

식사를 마쳤을 때, 11월에 만나면 당연히 내가 사야 하고 나도 굳이 스테이크를 살 필요는 없으니까 요즘도 댁에서 치킨, 떡볶이 같은 것도 배달시켜 먹는지 물어보았다.
"아, 그럼요! 치킨, 떡볶이는 늘 최고죠!"
"그럼 다음에는 제가 그걸 살게요."
"좋아요!"

그래서 지난 11월 22일 점심 때는 당연히 내가 낸다고 생각했는데 김 교수는 어림도 없었다. 또 뜻밖이었다. 완강하게 자신이 낼 차례가 맞다, 분명하다, 다음이 답설재 차례라고 우겼다.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는 귀가 어두워져서 웬만한 소리로 이야기하면 일쑤 알아듣지 못한다. 언성을 좀 높여서 이야기하고 키워드는 영어 단어를 써서 이야기하면 대화가 훨씬 쉽지만 사방에 다른 사람들이 있으니까 이것도 저것도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나는 그만 알았다고 해버렸다.
만나기만 하면 자신은 며칠 후면 이제 만 90세가 된다면서 이런저런 노화 현상을 이야기했고 그런 건 나도 그렇다고 맞장구를 쳐주곤 했다. 아닌 게 아니라 귀만 좀 더 어두워진 게 아니고 일주일에 세 번 투석을 하고 손에 쥐도 더 자주 나고 허리도 더 굽었고 지팡이까지 짚고 다니게 되었다.
그렇긴 하지만 기억력이 엉망이 된 건 아닐 것이다. 이번 달에는 내가 낼 차례라는 걸 분명히 기억하면서도 착각을 하는 척 내 주머니 사정을 감안한 처사가 분명했다.

코로나 이후에 오랜만에 만났을 때 김 교수는 대뜸 이렇게 물었었다.
"지금도 사무실에 나갑니까?"
"아니요... 이젠 나갈 데도 없고요."
그 대화는 거기서 끝났는데 김 교수는 생각했을 것이다. '그럼 돈이 좀 궁하겠구나...'
우리는 새로 만나자마자 우리의 만남을 또 월 1회 정례화하기로 했다.
음식이 나오기 전 김 교수는 이렇게 덧붙였다. "돈이 없으면 불편하긴 하지만 행복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죠."
그러면서 그의 여동생은 미국과 서울, 전북 등 세 곳에 집이 있는데 한두 채 팔아버리라고 했더니 집 판 돈으로 뭘 하겠냐고 되묻더라, 남편이 생전에 근무하던 미국의 어마어마한 회사에서 돈이 많이 나온다, 서울에 머물 땐 매일 친구들 만나고 돈 들어가는 건 아예 혼자서 다 전담하는데도 외로워한다는 얘기를 했다.
 
전에 만날 때는 김 교수는 미국에서 많이 먹던 피자, 파스타 같은 걸 좋아해서 늘 그런 메뉴 두세 가지와 콜라를 곁들여 죽 늘어놓고 이것저것 먹고 싶은 대로 먹었었다.
다음 12월에 만나게 되면 이번에도 자신이 낼 차례라고 우기진 않을 테니까 고르곤졸라 피자와 매콤한 토마토 해산물 파스타, 적당한 샐러드에 콜라를 곁들여 먹자고 할 작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