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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돈 : 나의 친구 J의 경우

by 답설재 2023. 11. 19.
정말 행복이 뭘까? 돈이 많은 것? 형제지간 부자지간 모자지간에도 싸우니까 차라리 없는 것?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정쩡한 것?

 
 
 
내 친구 J는 저세상으로 간지 한참되었다.
평생 돈도 못 벌어본 채 한 많은 생을 비감하게 마감했다.
 
서울에는 나보다 훨씬 먼저 올라왔다. 작심하고 푸줏간을 운영했다. '되겠지' '되겠지' 했겠지만 점점 더 되지 않았다. 대형 마트에 가서 고기를 사는 사람들이 늘어나서였는지 그의 푸줏간을 찾는 발길은 아주 드물게 되어버렸다.
그는 그렇게 살면서도 부인의 행색만은 남루하지 않게 해 주었고, 밖으로는 결코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았다. 초등학교 동기 모임이 있는 날엔 단정한 모습으로 나왔고, 점잖은 용어로 조용조용 얘기했고, 친구들이 호들갑을 떨어도(가령 어떤 교사가 학생을 두들겨 팼거나 아이에게 두들겨 맞아서 신문에 난 날 모임이 있으면 그들은 다짜고짜 내게 덤벼들었다. "야, 임마! 교육부 놈들 다 뭐하냐! 응?!") 그는 살며시 웃기만 했다. 언성을 높이거나 하는 짓은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자리에 앉으며 그의 얼굴에 화색이 도는 걸 발견했다.
과연!
모두들 도착해서 인사가 오가고나자마자 그가 오래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꺼냈다.
"나도 이제 살게 됐네!"
그는 하필이면 나를 바라보며 그렇게 선언했다.
예사롭지 않은 그의 선언을 따라 일순간 모두들 숨을 죽였다.
"우리 아이가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어!"
그는 그 말도 나를 바라보며 했고, 모두들 거의 한꺼번에 왁자지껄 축하한다고 했다.
물론 나도 축하한다고 했고, 그러면서도 생각했다.
'저 사람 보게, 공무원 시험 합격? 살게 됐다고? 그걸 집안이 일어나는 것으로 여기네?'
 
그는 매달 회비를 모아 회식을 하는 우리 친구들을, 내가 광화문 정부중앙청사(교육부)에서 근무할 때 음식 맛 좋기로 유명한 인근 식당으로 불러 딱 한 번 그럴듯한 '요리'를 사 준 걸 부러워했을까? 하기야 그날 나는 식당 아주머니에게 몇 번이나 호기(豪氣)를 부리긴 했다. "사장님! 여기 오리고기 없네요!" "저긴 술도 없네요!"...
나도 별 수 없는 교사 출신 공무원이고 근무 중에 휴대전화로 주식 같은 걸 사고팔거나 업무로 얽혀 있는 교원들에게 음험한 손을 내밀거나 하지 않으면 결국 근근이 살아갈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대한민국 공무원'이니까 대부분 초등학교만 졸업한 초등학교 동기들에게 저녁 한 번 사주지 못할까 싶어서 그리한 걸 짐작하지 못했을까?
 
정말 그랬다.
나는 1969년 교사 발령을 받은 그날부터 2001년 3월까지는 늘 돈이 없었고, 선친이 세상을 떠난 2001년 4월 이후 집안 행사 때 말고는 부모형제와 내 아이들에게 돈 들어갈 일이 없어져서 정년퇴임을 할 때까지 겨우 8년 10개월, 그 기간에 마침내 숨 좀 쉬게 된 걸 거의 아무도 몰랐다.
내가 친구들에게 그 '요리'를 대접한 건 2001년 어느 봄날이었고, 주머니에 돈이 남아 있는 게 신기해서 친구들 생각과 그 요리 생각을 연결하게 된 것이었다.
 
그는 그러나 "나도 이제 살게 됐네!" 호기롭게 선언한 그 직후 다시 입을 닫았다.
강원도 어느 동네 주민센터로 발령받은 딸을 따라 아예 이사까지 가버렸는데 그 딸이 결혼 준비를 해야 한다며 단 한 푼도 내놓지 않더라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서울로 되돌아왔고, 얼마 후 다시 처가가 있는 경남 어느 산촌으로 농사를 지으러 간 이후에는 안부 묻는 전화조차 싫어했고 곧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들렸는데 그 소식조차 어렴풋해서 우리는 그가 죽은 날짜조차 알지 못했다.
 
나는 J가 그렇게 가버린 건 다 돈 때문이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단 한 가지, 말할 만한 것이 있다면 그는 나쁜 짓은 결코 하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나는 내 친구 J가 두고두고 불쌍했다.
이러다가 내가 죽으면 '답설재'도 거의 J처럼 불쌍했다고 할 사람이 있을까?
 
지난여름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교사들 때문에 몇몇 사람은 슬퍼했는데 그때 뉴스에는 5년, 10년 근무한 교사도 봉급이 200만 원 안팎이라는 이야기도 나왔다. 나는 그 봉급을 받았어도 "돈이 없다"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이런저런 일로 나를 바라보는 식구가 열셋이어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지만(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나를 흡족한 눈으로 바라보지 않는 세상이었지만) 2년제이긴 하지만 대학을 나오고 오로지 책 읽는 걸 업으로 삼는 한국의 교육자(선비)가 겨우 "돈이 없다"는 소리를 할 수는 없었다. 담배를 피울 때여서 매달 동네 구멍가게 아주머니에게 아내를 보내 "어느 학교 아무개 선생이 담배를 외상으로 달라고 하더라" 전하라고 했다.
 
그러므로 내가 사라지면 '답설재'도 불쌍했다고 할 사람이 있게 될까?
그때 세상은 이 남루한 답설재조차 사라지고 없는 보다 정결한 세상일 것이므로 먼저 저승으로 간 내 친구 J가 겨우 그 봉급으로 힘들었겠구나, 그러면서도 우리에게 '요리'를 냈구나, 해줄 수는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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