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세상1162 약속 약 속 노란 차 옆, 다정한 남녀를 피해 걸어가고 있는 저 구부정한 늙은이가 내 친구입니다. 우리가 만나기로 한 장소로 오는 중입니다. 돈도 제법 많고 명예도 자랑할 만하지만 돈이 더 많은 사람이 수도 없이 많고 그보다 더 명예로운 사람도 수두룩하기 때문에 표를 내진 않습니다. 그.. 2017. 10. 21. 그리운 서울 오천 원 선불로 '오뎅우동'을 먹었습니다. 어묵을 익히느라고 "빨리빨리"(!!!) 나오진 않았지만 노란 면이 따스하고 맛있어서 먹는 게 참 재미있고 행복했습니다. 게다가 1인용 식탁들은 창가에 마련되어 있어서 밖을 내다보며 즐겁게 먹었습니다. 먼저 먹은 이들이 벽에 걸린 휴지통에서 빼어낸 두어 장 휴지로 자신의 식탁을 닦고 나가는 걸 봤습니다. 그 '고급스러운' 일은 '레스토랑'에서는 본 적이 없는 신기한 것이었습니다. 주방 쪽 커튼을 들추어 여 종업원에게 잘 먹고 간다는 인사를 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주문을 받고 음식을 내어주고 홀 정리도 하느라고 분주한 종업원이었습니다. 나도 나갈 때 저렇게 해야지 생각하며 먹었는데 그만 잊고 말았습니다. 그만큼 마음이 허접해서 그런 식당에 갈 자격이 없는 것일까요.. 2017. 10. 13. 봄여름가을겨울 그 미칠 것 같았던 봄여름가을겨울 텅 빈 채였던, 아무것도 없었던 봄여름가을겨울 나를 속이고 간 봄여름가을겨울 이제 와서 보이는 저 가을 그런데도 거기에 나는 보이지도 않는 가을 2017. 10. 9. 혼자인 날 대화할 일이 전혀 없으니까 적막했습니다. 하루가 이렇고, 이런 하루하루가 이어지면 나의 세상은 어떤 것이 될까 생각해보기도 했습니다. 잠시 밖에 나갈 일이 생겼습니다. 이쪽으로 걸어오던 한 여인이 하필이면 바로 옆을 지나면서 큰소리로 말합니다. "아니야!" 깜짝 놀랐는데, 다행히(!), 그녀는 그대로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귀에 걸린 이어폰이 보였습니다. "아니야!" 그게 내가 들은 한 마디 '사람의 말'이 된 날입니다. '이런 날이 있다니…….' 괜찮은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2017. 10. 2.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는 것들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는 것들 5년이 지나니까 수학 교과서에 무슨 공식으로 그렇게 나와 있기나 한 것처럼 '우르르' 이사들을 가버리고 낯선 사람이 우후죽순으로 늘어나 그 자리를 채웁니다. '나도 떠났어야 했나?' '이렇게 남은 사람들은 경제 감각이 좀 부족하거나 뒤졌다는 건.. 2017. 9. 30. 첫 출근 날 아침 아침에 저 골목길을 걸으면 일쑤 옛일들이 떠오릅니다. 1969년 3월 2일. 그럭저럭 50년이 되어갑니다. 그날 첫 발령을 받은 학교에 출근했습니다. 요즘 첫 발령을 받은 새내기 선생님들이 미리 학교를 찾아가 교장, 교감 선생님께 인사를 드리고 말씀도 듣고 학교를 둘러보기도 하는 걸 보면 나의 첫 출근은 한심한 것이었는데 그땐 그걸 몰랐습니다. 아직 추위가 물러가지 않은 이른봄, 그날 아침에 입었던 체크무늬의 캐주얼 상의가 생각납니다. 그것밖에 없었습니다. 누군가의 안내를 받아 교장실로 들어갔습니다. 그땐 교육대학이 2년제였는데 교장선생님께서는 "사범학교 출신이 대부분인 학교에 드디어 육사 출신이 왔다"고 치켜세웠고 난로 곁에 앉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곧 벌떡 일어서야 했습니다. 아마도 체육주임인.. 2017. 9. 28. 꽃집 새색시 비가 올 것 같았습니다. 지하철역이 가까워서 여유를 부리며 걷는데 바로 옆에서 고운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 길로 쭈욱 가셔서요……." 꽃집 새색시였습니다. 앞치마 차림으로 스마트폰 지도를 들여다보며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고, 그렇게 들어서 그 설명을 외울 수 있을까 싶은 할머니는 나 같으면 그 고운 설명을 꼼꼼히 들을 텐데 몸이 자꾸 앞쪽으로 나가려고 했습니다. 나는 일부러 그 새색시에게 물어서 찾아갈 만한 곳도 없고 그렇다고 꽃을 살 일도 떠오르지 않아서 안타까웠습니다. '어디 축하 화분을 보낼 데는 없나?' 퇴임한 지 오래되어 지금 그런 걸 보내면 상대방은 오히려 의아해하거나 어색해할 것입니다. '이 사람이 갑자기 웬일일까? 엉뚱하게 무슨 새 출발을 꿈꾸나?……' 축하 화분을 보낼 수 있었던, 그 수.. 2017. 9. 25. 가을 구름 하늘 같은 건 바라볼 새가 없을 것 같아도 "왜 그렇게 사는가?" 물어볼 만한 처지가 아니어서 그저 '저렇게 사는구나……' 했던 이가 "올가을은 구름이 유난히 곱네." 했는데 순간 그게 그의 말이었기 때문에 시처럼 음악처럼 들리는 한 마디가 되었고 그러자 가슴만큼은 곱다고 자처해온 나의 정서가 후줄근해지는 걸 느꼈지만 그래도 그 말을 들을 수 있게 된 올가을의 이런 날들이 하루라도 더 길어지면 좋겠다 싶은 마음 간절했습니다. 2017. 9. 20. 지금 이 자리 2017.8.7. 지금 여기 내가 있고, 아내가 있다. 끝나는 일이 없을, 찬란한 채널들의 대중문화도 있다. 부지런히 읽어도 끝내 읽지 못하고 말 책들도 있다. 이런 날들에 대해 눈물이 흐를 것 같은 때가 있다. 2017. 9. 17. 분꽃 기억 누나네는 우리 동네에 살았습니다. 누나들은 나이가 차면 한 명씩 한 명씩 차례대로 떠났습니다. 건넌방에서 혼자 지내면서 완전히 예뻐지면 마침내 마당에 동네 사람들이 다 모여 잔치를 벌였습니다. 그렇게 하여 그 누나가 사라지면 다시 그 아래 누나가 그 방에 들어갔고, 그렇게 두어 해 지내다가 떠나고 또 떠나고 했습니다. 누나들이 떠난 한적하고 썰렁한 방의 설합 속에는 늘 가루분이 흩어져 있었습니다. 나는 그 가루분이 분꽃 가루 같았고 그건 심각하게 따져볼 일도 아니었기 때문에 내내 그렇게 짐작하고 있었는데, 어제 어느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나오다가 마당 가의 분꽃 무더기를 보는 순간 누나들은 분꽃 가루로 분을 바른 건 아니라는 걸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 누나들은 나를 좋아하진 않았던 것 같습니다. 2017. 9. 14. 사랑의 여로 그는 물리학을 사랑했습니다. 어쩌면 명예와 화려한 활동도 사랑하지 않았을까 싶기는 합니다. 사랑이라니! 그가 사랑한 대상은 오래전에 떠난 그의 부인이었습니다. 우리가 마음속 얘기를 해도 좋을 때, 그런 장소에 앉게 되면, 그는 먼 나라의 유명한 대학에 아직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그의 연구실 얘기도 하고, 한시도 잊은 적 없다는 그의 부인 얘기도 합니다. 그가 지금 그 먼 나라에 있지 않고 여기 우리 동네에 와 있는 것도 사실은 그 부인과의 추억이 너무나 생생해서 도저히 그곳에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명예? 국가·사회적 활동? 분명히 그런 것도 좋아하긴 했습니다. 멋진 나라들의 음식 얘기도 하고, 부인과 함께 그런 나라의 한적하고 행복한 길을 걸은 얘기도 하고…… 여러 나라 대통령을 만난 .. 2017. 9. 12. 무화과 파는 가게 찾아가기 무화과 색깔이 참 좋았습니다. 덜 익은 걸 따다 파는 가게와 달랐습니다. 종류가 다르다느니 덜 익은 게 더 좋다느니 또 어떻다느니 하겠지만 어떤 과일이든 잘 익으면 더 좋을 것이라는 확신 같은 걸 가지고 있습니다. 이 가게를 쉽게, 헤매지 않고, 바로 찾아가는 방법을 알려드립니다. 아래 사진의 저 뒤쪽 소나무 건너편의 저 보일 듯 말 듯한 가게입니다. 잘 모르겠습니까? 이것 참……. 저 유모차 밀고 가시는 분이나 아이 데리고 스마트폰 보며 가는 분에게 물어봐도 됩니다. 뒤로 돌아서서 몇 걸음, 맞닥뜨린 곳에서 좌회전해서 두세 걸음, 바로 그 가게니까요. 이젠 아셨죠? 2017. 9. 7. 이전 1 ··· 52 53 54 55 56 57 58 ··· 97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