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749

시몬 드 보부아르 《노년》 시몬 드 보부아르 《노년》 홍상희·박혜영 옮김, 책세상 2002 붓다가 아직 싯다르타 왕자였을 때이다. 부왕에 의해 화려한 궁궐 속에 갇혀 살던 그는 몇 번이나 거기서 빠져나와 마차를 타고 궁궐 부근을 산책하곤 했다. 첫 번째 궁 밖 나들이에서 그는 어떤 남자와 마주치게 되었다. 병들고 이는 다 빠지고 주름살투성이에 백발이 성성하며, 꼬부라진 허리로 지팡이에 몸을 지탱하고 서 있는 그 사람은, 떨리는 손을 내밀며 무어라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지껄여댔다. 왕자가 깜짝 놀라자 마부는 싯다르타에게, 사람이 늙어 노인이 되면 그리 되노라고 설명해주었다. 그러자 싯다르타 왕자는 외쳤다. "오, 불행이로다. 약하고 무지한 인간들은 젊음만이 가질 수 있는 자만심에 취하여 늙음을 보지 못하는구나. 어서 집으로 돌아가.. 2022. 9. 3.
에드워드 윌슨 《지구의 정복자》 에드워드 윌슨 《지구의 정복자》 이한음 옮김, 사이언스북스 2013 신화가 인류의 기원과 의미를 해석할 수 있다는 세계관과 그렇지 않다는 세계관을 서로 화해시킬 수 있을까? 솔직하게, 그리고 짧게 대답하자면, 아니다. 둘은 화해시킬 수 없다. 둘의 대립은 과학과 종교, 경험주의적 태도와 초자연적 존재를 믿는 태도의 차이를 정의한다.(17) 이것이 전제다. 호모 사피엔스를 이 수준으로 밀어붙인 것은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늘어난 장기 기억, 특히 꺼내어 작업 기억에 집어넣을 수 있는 장기 기억과 단기간에 시나리오를 짜고 전략을 세우는 능력이 아프리카를 탈출하기 직전과 이후에 유럽을 비롯한 각지에서 호모 사피엔스가 정복 전쟁을 수행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는 데에 동의한다. 복잡한 문화의 문턱까지 밀고 간.. 2022. 7. 14.
왜 책읽기에 미쳐 지냈나? 지금은 들어앉아 있지만 최근까지 나는 '삼식이'는 아니었습니다. 그럴 때 몇 시간짜리 나들이를 하게 되면 기차표 구입 다음에는 꼭 가지고 갈 책을 골랐습니다. 시내에 나갈 때도 매번 책을 갖고 나갈 수 있는 상황인가를 판단했습니다. 집에서는 내가 책을 읽는 걸 아내가 '승인'해 주는지 아닌지를 늘 느낌으로 판단하며 지냈고(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밖에 없다는 걸 인정해주고 있지만), 혼자 앉아 있는 자유시간 중 얼마만큼을 독서시간으로 할애할 수 있는지부터 계산하곤 했습니다. 교사로서 교육행정가로서 일할 때에도 그게 단 5분, 10분이어도 늘 '지금 이 시간은 책을 좀 읽어도 되는가?'를 염두에 두며 살았고, 최근에는 세상을 떠날 때에도 '나는 일생 동안 얼마만큼의 시간을 할애하여 읽었나?'를 계산하며 .. 2022. 6. 29.
셰릴 스트레이드 《와일드wild》 셰릴 스트레이드 《와일드 wild》 우진하 옮김, 나무의철학 2012 허풍쟁이에 유아독존적인 어느 위인이 영화 "와일드"를 보고 뭐 어쩌고 저쩌고 한 걸 읽고 '당신이 영화를 보고 감동했단 말이지? 도대체 어떤 얘기야?' 하고 사 둔 책을 8년 만에 읽었다. 이 책만 보면 그 사람이 떠오르는데다가 부피도 550페이지가 넘어서 얼른 펼쳐지지가 않았는데 '이러다가 결국 못 읽는 것 아닐까?' 싶었다. 내가 그 허풍쟁이의 허풍 때문에 책을 읽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나는 결국 그 허풍쟁이의 속임수에 넘어간 꼴이 되었겠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긴장을 느끼며 읽었다. 다른 일이 있어 책을 덮을 때마다 다음 부분도 결국 고생스러운 얘기겠지 싶은데도 그게 어떤 고생인지 궁금해서 시간만 나면 책을 펼쳐 들었다. .. 2022. 6. 25.
이서수 소설 「몸과 여자들」 이서수 소설 「몸과 여자들」《현대문학》 2022년 3월호   저의 몸과 저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이것은 실로 부끄러운 고백이어서 저는 다 한 번밖에 말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그러니 가만히 들어주세요. * 저는 1983년생입니다. 그런 탓에 이 사회가 여성의 몸에 얼마나 냉혹한 잣대를 들이댔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지요. 물론 1959년생인 저의 어머니보다야 훨씬 나은 환경 속에서 자랐지만, 작금의 젊은 여성들을 볼 때마다 부조리한 억압과 불평등에 짓눌려 살아왔다는 것을 깨닫습니다.저는 평생에 걸쳐 마른 몸으로 살았지만, 저의 몸에 대한 타인의 평가에서 자유로웠던 것은 결코 아닙니다. 저 역시 몸 때문에 트라우마랄까, 피해의식을 늘 갖고 있었습니다. 지금부터 그것에 대해 말해보려고 합.. 2022. 6. 14.
위수정 단편소설 「우리에게 없는 밤」 위수정 단편소설 「우리에게 없는 밤」 《현대문학》 2022년 2월호 안나가 본명이에요? 당연히 아니겠지. 남자는 자신의 질문에 스스로 답하고는 몸을 돌려 모로 누워 지수를 보았다. 지수는 감았던 눈을 떴다. 특징 없는 베이지색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시선을 조금 아래도 내리자 숫자에 불이 켜진 디지털 벽시계가 보였다. 숫자 사이의 파란 콜론이 깜빡깜빡 말을 걸었다. 시간이 가고 있다고. 남자의 손이 지수의 어깨에 닿았다. 지수는 몸을 일으켰다. 저 이제 학교 가야 해서. 욕실로 향하며 지수는 그의 시선이 따라오는 것을 느꼈다...... 처음부터 따분한 소설이 있고 눈길을 끌어놓고는 곧 힘이 빠지거나 주체를 못 하고 마는 소설도 있고 차라리 철학을 읽겠다 싶게 하는 소설도 있고... 이 소설처럼 처음 부분.. 2022. 6. 12.
오구니 시로 《주문을 틀리는 요리점》 오구니 시로 《주문을 틀리는 요리점》 김윤희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2019 주문을 틀리는 요리점 '주문을 틀리다니, 이상한 레스토랑이네' 당신은 분명히 그렇게 생각하실 겁니다. 저희 홀에서 일하는 종업원은 모두 치매를 앓고 있는 분들입니다. 가끔 실수를 할 수도 있다는 점을 부디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 대신, 어떤 메뉴든 이곳에서밖에 맛볼 수 없는 특별하고 맛있는 요리들로만 준비했습니다. '이것도 맛있어 보이네 뭐, 어때' 그런 당신의 한마디가 들리기를. 그리고 그 여유롭고 넉넉한 마음이 사회 전체로 퍼져나가기를 간절히 바라 봅니다. 많은 사람들의 참여와 지원, 면밀한 준비와 단단한 각오로 이 요리점을 이틀간, 그리고 다시 사흘간 연 이야기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요리점은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2022. 6. 4.
헤르만 헤세 《데미안》 헤르만 헤세 소설 《데미안》 에밀 싱클레어의 청춘 이야기 안인희 옮김, 문학동네 2013 "새는 힘겹게 투쟁하여 알에서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다."(110) "우리는 고대 종파들의 의견과 신비적인 합일을, 합리주의의 관점으로 바라볼 때 흔히 그러듯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의미에서의 학문이란 고대에는 아예 없었다. 그 대신 철학적이고도 신비주의적인 진리를 향한 깊은 탐색이 있었는데, 그런 탐색은 매우 높은 수준으로 발전했다. 부분적으로는 거기서 마법과 농간이 생겨났고, 그것은 자주 기만과 범죄로 발전하기도 했다. 하지만 마법도 고귀한 기원과 깊은 사상을 지녔다. (...) 아.. 2022. 5. 22.
"내향적이어도 좋아"《콰이어트 Quiet》 수전 케인 《콰이어트 Quiet》김우열 옮김 RHK 2012     내향적인 사람들은 외향적인 사람들과 대화할 때 좀 더 유쾌한 주제를 선택했는데, 실험이 끝난 뒤 대화하기가 좀 더 쉬웠다고 이야기하며 외향적인 사람과 대화하는 것이 "신선하다"고 표현하더랍니다. 반면에 외향적인 사람들은 내향적인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 좀 더 마음이 편안했고 자기 문제를 좀 더 쉽게 털어놓을 수 있었다고 말하더랍니다. 그건 거짓으로 낙관적인 척할 필요를 못 느꼈다는 뜻이었답니다.(367) 나는 교사였으므로 이 부분을 결론으로 삼고 싶었습니다.(153) 연구 결과들에 따르면 가장 효율적인 팀은 내향적인 사람과 외향적인 사람이 건전하게 섞여 있고, 리더십의 구조도 다양하다.또 사람들이 만화경처럼 변하며 자유로이 교류할 수 있고.. 2022. 5. 1.
책을 낸다는 것 책을 낸다는 건 얼마나 허망한 일일까요? 자비출판(자신의 돈으로 책을 내어 지인들에게 뿌리는) 경우에는 아예 자신의 돈으로 그 책을 미리 다 구입한 거나 다름없으니까 그럴 일이 없지만 저작권료를 받기로 하고 출판한 경우, 책이 팔리지 않으면 본인도 비참하고 출판사에서도 실망스러워할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책은 팔리지 않는 물건인 것 같습니다. 작가들은 출판을 거듭하면서 실망을 거듭하는 사람들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책이 나오기 전에는, 매번 실패했음에도 '이번에는 대박이 터질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되는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 기대는 마치 카드놀이와 흡사하겠지요. 저 같은 경우에는 '매절'(원고료만 받고 출판사가 마음대로 하는 경우)로 넘긴 원고가 대박이 나서 출판사가 15년 간 떼돈을 벌었고, '이런 .. 2022. 4. 22.
알베르 까뮈 《시지프스의 신화》⑤ 알베르 까뮈/민희식 옮김, 《시지프스의 신화》⑤ 육문사 1993 중판 이 책 독후감을 찾는 학생들이 있습니다. 도와주고 싶어도 써줄 수는 없습니다. 이 책을 읽고나서 이야기하자고 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책을 읽었다면 뭐 하려고 이런 블로그를 찾아오겠습니까? 한두 페이지를 읽다가 그만둘 사람이 적지 않을 책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나는 이 책의 여러 장, 절 중에서 비교적 쉬운 마지막 장(마지막 절)이라도 읽어보면 좋겠다는 이야기는 하고 싶었습니다. 그 장(절)을 옮겨써보았습니다. 진한 부분은 '파란편지'가 그렇게 했습니다. 그래도 복잡하다고, 어렵다고, 무슨 얘기냐고 할 수도 있으니까 끝에 이 장(절)의 요약이라고 생각되는 부분을 발췌해서 붉은 글씨로 나타내어 보았습니다. 제1장 부조리한 추론(推論).. 2022. 4. 14.
오구마 에이지 《일본이라는 나라》 오구마 에이지 《일본이라는 나라》 한철호 옮김, 책과함께 2013 1부 메이지 일본의 시작(발췌) # 어째서 학교에 가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인간은 평등하다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공부하는 놈은 성공해서 부자가 되고, 공부하지 않는 놈은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이 된다. 그러므로 공부해라, 이것이 《학문의 권장》*의 내용이다.(13) 에도 시대는 어떠했을까? 그때는 기본적으로 '무사의 아들은 무사, 상인의 아들은 상인, 농민의 아들은 농민이 되고, 여자는 같은 신분의 사람과 결혼한다'는 원리로 세상이 움직이고 있었다. 공부를 했는지 안 했는지는 상관없었다.(16~17) 일반 국민들이 교육을 제대로 받지 않아서 정치에 관해 전혀 알 수 없다면, 소수의 지배자들이 나라를 제멋대로 다스릴 수 있다.**(.. 2022. 4.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