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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이야기

알베르 까뮈 《시지프스의 신화》⑤

by 답설재 2022. 4. 14.

알베르 까뮈/민희식 옮김, 《시지프스의 신화》⑤

육문사 1993 중판

 

 

 

 

 

이 책 독후감을 찾는 학생들이 있습니다.
도와주고 싶어도 써줄 수는 없습니다.
이 책을 읽고나서 이야기하자고 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책을 읽었다면 뭐 하려고 이런 블로그를 찾아오겠습니까? 한두 페이지를 읽다가 그만둘 사람이 적지 않을 책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나는 이 책의 여러 장, 절 중에서 비교적 쉬운 마지막 장(마지막 절)이라도 읽어보면 좋겠다는 이야기는 하고 싶었습니다.
그 장(절)을 옮겨써보았습니다. 진한 부분은 '파란편지'가 그렇게 했습니다.
그래도 복잡하다고, 어렵다고, 무슨 얘기냐고 할 수도 있으니까 끝에 이 장(절)의 요약이라고 생각되는 부분을 발췌해서 붉은 글씨로 나타내어 보았습니다.

 

제1장 부조리한 추론(推論)

1. 부조리(不條理)와 자살(自殺)

2. 부조리의 벽

3. 철학적 자살

4. 부조리한 자유

 

제2장 부조리한 인간

1. 돈 쥬앙주의(Le Don Juanisme)

2. 연극

3. 정복

 

제3장 부조리한 창조

1. 철학과 소설

2. 키릴로프

3. 덧없는 창조

 

제4장 시지프스의 신화

1. 시지프스의 신화

 

 

4개 장 중에서 제4장은 '시지프스의 신화' 한 개의 절로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다음과 같습니다.

 

1. 시지프스의 신화

 

신들이 시지프스에게 내린 형벌은 바위 하나를 산꼭대기로 끊임없이 굴려 올리도록 한 것이었는데, 그것은 산꼭대기에서는 돌이 제 무게로 다시 떨어져 내리곤 하기 때문이었다. 신들이 헛되고 희망 없는 노동보다 더 끔찍한 형벌은 없다고 생각한 것엔 뭔가 일리가 있었다.

 

호머의 말을 믿는다면, 시지프스는 인간들 중에서 가장 지혜롭고 가장 신중한 사람이었다. 또 다른 설화에 의하면, 그에겐 항상 강도짓을 할 마음이 있었다. 나는 여기에서 아무런 모순도 보지 못한다. 그가 하계(下界)에서 헛 노동을 하는 신세가 된 이유에 대해서는 의견들이 서로 다르다. 우선, 그는 신들에 대해 어떤 경박한 행동을 했다는 이유로 형벌을 받고 있다. 그가 신들의 비밀을 훔쳤다는 것이다. 이소푸스의 딸 아에기나를 쥬피터 신이 유괴해 갔다. 그 아버지는 딸의 실종에 충격을 받고, 시지프스에게 하소연했다. 그 유괴에 대해 알고 있던 시지프스는, 코린트 성채에 물을 대 준다면 그 일에 대해 알려 주겠다고 이소푸스에게 제안했다. 그는 하늘의 벼락보다 물의 혜택에 더 이끌렸던 것이다. 그는 이 일로 하계에서 벌을 받았다. 호머는 또한 우리에게, 시지프스가 죽음의 신을 쇠사슬로 묶어 두었다는 얘기를 전한다. 플루토(下界의 왕─역주)는 텅텅 비어 고요한 자신의 왕국을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는 전쟁의 신을 파견하여 죽음의 신을 그의 정복자의 손에서 해방시키게 하였다.

 

또한, 시지프스는 죽음이 가까왔을 때, 경솔하게도 자기 아내의 사랑을 시험해 보고자 했다는 설화가 있다. 그는 아내에게 자신의 시체를 묻지 말고 공공 광장 한가운데 던져 버리라고 명했다. 시지프스는 지옥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거기서, 그는 아내가 인간의 사랑에 그리도 어긋나게 그대로 따른 것에 화가 나, 그녀를 혼내 주려고 지상으로 되돌아가기 위한 허락을 플루토에게서 얻어 냈다. 그러나, 이 세계의 모습을 다시 보고, 물과 태양, 따뜻한 바위와 바다를 즐기게 되었을 때, 그는 이젠 지옥의 암흑 속으로 되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플루토가 그를 하계로 다시 불렀으나, 성난 표정도 경고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는 여러 해를 만(灣)의 굴곡과 반짝이는 바다와 대지의 미소들을 대하며 살았다. 신들의 판결이 불가피했다. 머큐리(신들의 使者─역주)가 와 그 염치 없는 사람의 멱살을 잡고 그를 그의 기쁨들로부터 나꿔채, 바위가 기다리고 있는 지하 세계로 강제로 다시 데려갔던 것이다.

 

시지프스가 부조리의 주인공이라는 것을 당신은 이미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의 열정뿐 아니라 고통으로 인해 그는 부조리의 주인공인 것이다. 신들에 대한 그의 경멸, 죽음에 대한 증오, 삶에 대한 열정이 그에게 무(無)를 성취하는 데에 온 존재를 써야 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그 형벌을 안겨 주었던 것이다. 이것이 이 지상에서의 열정을 위해 치러야만 하는 값이다. 지하에서의 시지프스에 관해선 아무것도 전해진 게 없다. 신화들이란 상상력이 그 안에 생기를 불어 넣도록 만들어져 있다. 이 신화에 관해서는 우리는 다만, 한 육체가 커다란 바위를 들어올려, 백 번을 거듭 그 바위를 언덕 위로 굴려 밀어 올리려 애쓰는 그 온갖 노력을 볼 뿐이다. 찡그린 얼굴, 바위에 꽉 댄 뺨, 흙 묻은 그 돌덩어리를 떠받치고 있는 어깨, 그것을 버티고 있는 두 다리, 팔을 뻗쳐 다시 시작하는 모습, 우리는 흙 묻은 그 두 손에서 전적으로 인간적인 든든함을 본다. 하늘 없는 공간과 깊이 없는 시간에 의해 측정되는 그 오랜 노고가 끝나는 바로 그 때에 그 목적은 성취된다. 그 때에 시지프스는 바위가 금방 하계(下界)로 급히 굴러 내려가는 것을 지켜보고, 거기서부터 그 바위를 다시 꼭대기로 밀어 올려야만 하는 것이다. 그는 다시 평지로 내려간다.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은, 바로 이렇게 돌아올 때의, 휴식할 때의 시지프스이다. 바위에 그렇게 가까이 붙어서 고생하는 그의 얼굴은 이미 바위 그 자체이다. 나는, 그 사람이 스스로 그 끝을 결코 알지 못할 고뇌를 향해 무거우면서도 고른 걸음걸이로 내려오는 것을 본다. 그의 고통만큼이나 틀림없이 되돌아오는 숨돌릴 틈과 같은 그 시간, 그것은 바로 의식의 시간이다. 그가 산의 정상을 떠나 신들이 쉬는 곳을 향해 서서히 내려가는 그 매순간마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넘어선다. 그는 그의 바위보다 더 강한 것이다.

 

이 신화가 비극적이라면, 그것은 그 주인공이 의식적이기 때문이다.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성공한다는 희망이 그를 떠받쳐 준다면, 그의 고통이 대체 어디에 있겠는가? 오늘날의 노동자들은 그의 삶 속에서 날마다 똑같은 일을 하는데, 이 운명도 역시 못지 않게 부조리하다. 그러나 그 운명은 그것이 의식적인 게 되는 드문 순간들에만 비극적이다. 무력하고 반항적인, 신들의 프롤레타리아인 시지프스는 자신의 비참한 조건의 전 범위를 알고 있다. 그가 산을 내려오는 동안 생각하는 것이 바로 그 조건인 것이다. 그의 고통을 이루고 있는 그 명징함이 동시에 그의 승리에 왕관을 씌워 준다. 경멸에 의해 극복될 수 없는 운명이란 없다.

 

 

그의 하산(下山)이 이렇게 때로 슬픔 속에서 행하여진다면, 그것은 또한 기쁨 속에서 행해질 수도 있다. 그 말은 지나친 게 아니다. 시지프스가 자기의 바위를 향해 되돌아가는 것을 나는 다시금 상상하고, 그 슬픔이 시작에 있었음을 안다. 대지의 여러 모습들이 기억에 너무도 꼭 매달려 있을 때엔, 행복의 손짓이 너무도 집요할 때엔, 인간의 마음 속에서 우수가 일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바위의 승리이며, 그것은 바위 그 자체이다. 끝 모를 비애는 너무 무거워 견딜 수 없다. 그러한 것들이 우리의 겟세마네의 밤인 것이다. 그러나 압도적인 진실들은, 그것이 인식될 때 소멸된다. 그래서 외디푸스도 처음에는 운명을 알지 못한 채 그 운명에 복종했다. 그러나 자신의 운명을 알게 되는 그 순간부터 그의 비극은 시작된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눈멀고 절망한 채로 그는 자기를 세계와 연결해 주는 유일한 것은 한 처녀(그의 딸을 가리킴─역주)의 차가운 손뿐임을 깨닫는다. 그 때에 굉장한 한 마디 말이 울려 나오는 것이다. 「그 많은 시련들에도 불구하고, 나의 노령(老齡)과 내 영혼의 고귀함이 나로 하여금 모든 것이 좋다는 결론을 내리게 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키릴로프처러 소포클레스의 외디푸스도 이렇게 부조리의 승리를 위한 비결을 제시한다. 고대의 지혜가 현대의 영웅주의를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부조리를 발견하면, 우리는 행복에로의 안내서를 쓰고 싶은 유혹을 받지 않을 수 없다. 「뭐야! 이렇게 좁은 길들을 통해서?」 그러나 오직 하나의 세계밖엔 없다. 행복과 부조리는 하나의 대지에서 나온 두 자식인 것이다. 그 둘은 분리될 수 없다. 행복이 꼭 부조리의 발견에서 생긴다고 말한다면, 그건 잘못일 것이다. 부조리의 감정이 행복으로부터 생길 수도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이 좋다고 나는 결론짓는다.」고 외디푸스는 말하거니와, 그 말은 신성하다. 그 말은, 거칠고 한계지어진 인간의 세계 속에서 울려퍼진다. 그것은, 모든 것이 소진되지 않으며, 소진된 적이 없다는 것을 가르친다. 그것은 불만과 무익한 고통에 대한 편애와 함께 이 세계 속으로 들어왔던 한 신(神)을 이 세계의 밖으로 몰아낸다. 그것은 운명을 인간들 사이에서 해결되어야만 하는 인간의 문제로 만든다.

 

시지프스의 말 없는 모든 기쁨이 그 안에 들어 있다. 그의 운명은 그의 소유이다. 그의 바위는 그의 것이다. 마찬가지로 부조리한 인간은, 자신의 고통을 응시할 때, 모든 우상들을 침묵케 한다. 그 침묵을 갑자기 회복한 세계 속에서 대지의 무수한 놀라운 작은 목소리들이 솟아오른다. 그 모든 모습들로부터의 무의식적이며 은밀한 부름들·초대들, 그것들은 불가피한 역전이며 승리의 댓가이다. 그림자 없는 태양은 없으며, 그것은 밤을 인식하기 위해 필수적이다. 부조리한 인간은 이것을 인정하며, 그의 노력은 그 후부터 그치지 않을 것이다. 개인적인 운명이라는 게 있다면, 보다 고귀한 숙명이란 없을 것이며, 아니면, 최소한 피할 수 없고 경멸할 만한 것이라고 그 스스로 결론짓는 숙명밖엔 없을 것이다. 그 외에는, 그는 자신의 삶의 주인임을 알고 있다. 인간이 자신의 삶을 뒤돌아 훑어보는 그 미묘한 순간에, 시지프스는, 자신의 바위를 향해 되돌아가면서, 그 단조롭고 끝없는 회전 속에서, 자신에 의해 창조되고 자신의 기억의 눈을 통해 결합되며 머잖아 자신의 죽음에 의해 봉인될 자신의 운명으로 변하는 서로 관계 없는 행위들의 연속을 응시한다. 이렇게, 인간과 관련된 모든 것에는 인간적인 기원이 있음을 확신하면서, 몹시 보길 원하지만 그 밤엔 끝이 없다는 걸 알고 있는 눈먼 사람인 그는 여전히 바위를 굴려 올리고 있다. 바위는 여전히 굴러 내리고 있다.

 

나는 그 산 기슭에서 시지프스를 떠난다! 인간은 언제나 자기 자신의 짐을 다시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시지프스는 신들을 부정하고 바위를 밀어 올리는 보다 고귀한 성실성을 가르쳐 준다. 그 역시 모든 것은 좋다고 결론짓는다. 이제부터 주인 없는 이 세계가 그에겐 결코 메마르게도 헛되게도 보이지 않는다. 그 바위의 원자 하나하나, 밤으로 가득한 그 산의 광석 조각 하나하나가 그 자체로써 하나의 세계를 형성한다. 산 꼭대기를 향한 그 투쟁 자체가 한 인간의 가슴을 채우기에 충분하다. 우리는 시지프스가 행복하다고 상상할 수밖에 없다.

                                                                                                                                                                                                                (159~164)

 

 

신들이 시지프스에게 내린 형벌은 바위 하나를 산꼭대기로 끊임없이 굴려 올리도록 한 것이었는데, 그것은 산꼭대기에서는 돌이 제 무게 로 다시 떨어져 내리곤 하기 때문이었다. 신들이 헛되고 희망 없는 노동보다 더 끔찍한 형벌은 없다고 생각한 것엔 뭔가 일리가 있었다.

…(중략)…

인간은 언제나 자기 자신의 짐을 다시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시지프스는 신들을 부정하고 바위를 밀어 올리는 보다 고귀한 성실성을 가르쳐 준다. 그 역시 모든 것은 좋다고 결론짓는다. 이제부터 주인 없는 이 세계가 그에겐 결코 메마르게도 헛되게도 보이지 않는다. 그 바위의 원자 하나하나, 밤으로 가득한 그 산의 광석 조각 하나하나가 그 자체로써 하나의 세계를 형성한다. 산 꼭대기를 향한 그 투쟁 자체가 한 인간의 가슴을 채우기에 충분하다. 우리는 시지프스가 행복하다고 상상할 수밖에 없다.

 

<덧붙임>

번역본을 읽는 심정을 대변하는 신해욱 작가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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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뒤에 실린 해제에서 번역자는, 낯선 신조어와 비문이 난무하는 슈레버의 독일어가 어떤 식으로 자신을 가혹한 시험대에 올렸는지 적고 있다. 그 난관들을 무릅쓰며 슈레버는 쓸 수 없는 것을 썼고 번역자는 옮길 수 없는 것을 옮겼다. 그 덕에 내 앞에 한국어로 된 이 책이 있다. 나는 한국어라는 바늘구멍을 통해 '그 세계'를 엿본다. '그 세계'는 도대체 나에게 몇 %나 도달한 것일까."

 

-신해욱 에세이-비성년열전(제13회), 「두 겹의 세계를 살아가는 방식-다니엘 파울 슈레버」(『현대문학』2011년 5월호 234~247).

 

신해욱 작가는 번역에 대해 그렇게 썼습니다. '역사상 가장 유명하다고 해야 할 신경병자 다니엘 파울 슈레버Daniel Paul Schreber의 『한 신경병자의 회상록』(1903) 번역본(2010.6)'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 세계'는 도대체 나에게 몇 %나 도달한 것일까? 몇 %나 도달하고 있는 것일까? 나도 그 생각을 하며 이 책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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