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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751

마쓰이에 마사시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마쓰이에 마사시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김춘미 옮김, 김영사(비채) 2016 무라이 슌스케 씨께 귀 건축설계사무소 직원들 모두 귀하를 "선생님"이라고 불렀으니까 그렇게 부를까요? 그게 자연스러울 것 같기도 하고 이 글을 쓰게 된 직접적인 이유도 사실은 그 호칭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나라와 달리 일본에서는 "선생님"이라는 호칭의 사용에 대해 뭐랄까 더 인색하다고 할까, 더 엄격하다고 할까, 어쨌든 아무에게나 그 호칭을 사용하지 않는 것 같아서 더욱 그렇습니다. 이렇게 시작하니까 나도 그 사무소 직원들처럼 "선생님" 하고 부르기가 좀 어색하기도 합니다. 무라이 슌스케 씨! 나는 초등학교 교사로 출발해서 지금까지 한시도 교육을 잊고 지낸 시간은 없었고 직접 아이들을 가르친 시간도 이십여 년이어서 사실은 수.. 2022. 1. 25.
윌리엄 트레버 《밀회》 윌리엄 트레버 소설 《밀회》 김하현 옮김, 한겨레출판 2021 「신성한 조각상」 등 열두 편의 단편을 읽었다. 코리와 누알라 부부는 가난하다. 그들의 사랑은 깊다.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코리가 버티게 하는 건 누알라였다. 코리는 가구점 점원이다. 그가 틈틈이 만든 성인 조각상을 보고 감탄한 펠러웨이 부인 때문에 그 가구점을 나와버렸다. 모든 성당에 그가 만든 조각상을 설치하게 하자는 그녀의 말을 듣고 조각상 제작에만 전념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브리지다 성녀 교구회관에 브리지다 성녀 조각상을 '기증'한 것이 전부였고 단 한 군데도 그에게 조각상 제작을 의뢰하지 않았다. 세 자녀를 둔 데다가 누알라가 다시 임신하여 일자리도 구하지 못하자 그들의 생활은 극도로 곤궁하게 되었다. 기대를 갖는 건 석조장을 경영.. 2022. 1. 17.
레이몽 라디게 《육체의 악마》 레이몽 라디게 《육체의 악마》 윤수남 옮김, 청림출판 1989 19세 약혼녀(유부녀)와 16세 소년이 애정 행각을 펼친다. 15분 동안 나는 정신없이 그녀의 집으로 달려갔다. 그러고 나서 식사 도중에 방해가 되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되어 땀에 흠뻑 젖은 채로 10분 동안이나 문 밖에 서 있었다. 그동안이면 심장의 고동도 가라앉으려니 생각했지만, 오히려 더 세차게 뛰는 것이었다. 하마터면 나는 그냥 집으로 돌아갈 뻔했다. 그런데 마침 옆집 창문에서 한 여자가 아까부터 문 앞에 웅크리고 있는 나를 수상쩍게 내다보고 있었다. 그 여자가 마침내 나를 결심시켰다.(44) 난로 앞에 앉아 있는 우리의 몸이 어쩌다 스치기라도 한다면, 나는 조금만 움직여도 이 행복이 사라져 버릴 것 같이 느껴져서 되도록 가만히 있었다... 2022. 1. 11.
나딘 고디머 《거짓의 날들》 나딘 고디머 《거짓의 날들》 왕은철 옮김, 책세상 2014 나는 비 오는 모습을 지켜보며 창가에 서 있었다. 너무 조용히 와서 창문에서 돌아서면 비가 온다는 사실을 알 수 없었다. 밖으로 눈을 돌려야만 비가 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비는 소리 없이 내리고 또 내렸다. 정원과 바다는 기차 안에서 내 앞으로 밀려왔다가 기찻길을 따라 멀어져가던 풍경과 다를 바 없었다. (...) 그녀는 '젊은 사람들을 이해'하려 애쓰지 않았다. 자신의 관점과 선호에 대해 솔직하게 말하는 것을 미안해하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자신이 느끼는 것과 좋아하는 것을 보여주고 나이에 걸맞은 초연함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위엄을 잃을까봐 두려워하지도 않았다.(75)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 인근 애서턴 광산촌 사무관의 딸 헬렌.. 2022. 1. 5.
W.G. 제발트『이민자들』Ⅲ (나는 나의 주인인가?) W.G. 제발트(소설) 『이민자들』 이재영 옮김, 창비, 2008 "암브로스 아델바르트 : 내 밀밭은 눈물의 수확이었을 뿐"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거의 십 년 전의 이 메모를 꺼내보았다. 이런 기막힌 인생도 있다. 암브로스 아델바르트는 남달리 기품 있는 사람이었다. 1차 세계대전 전에 미국으로 건너가 최상류층 집안에서만 일했으므로 인맥이 많아 고향(독일)에서 온 가족과 친지들에게 어렵지 않게 일자리를 구해줄 수 있었다. 유대인들은 독일에서 거의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으므로 1차 세계대전 전까지 매년 수십만 명의 유대인들이 맨해튼으로 상륙하여 바워리가와 로우어 이스트 싸이드에 집결했다. 그는 1886년 독일 켐프텐 근처 고프레히츠에서 8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는데, 첫 번째 사내아이였다. 그러나 두 살도.. 2022. 1. 2.
박영숙·제롬 글렌 《세계미래보고서 2022 메타 사피엔스가 온다》 박영숙·제롬 글렌 지음 《세계미래보고서 2022 메타 사피엔스가 온다》 비즈니스북스 2021 사흘 후, 별일 없으면 2022년은 맞이할 수 있겠지? 이래저래 어수선해도 시간과 세월은 단정하게 착실하게 엄격하게 어김없이 오고 간다. 2040년을 전망하는 얘기도 들어 있다. 2040년? 내가? 그러면 나도 메타사피엔스가 될 수 있을 텐데... 글쎄...... 책 머리에 소개된 '메타 사피엔스가 알아야 할 20가지 미래 코드' 1. 메타 풍요 2. 메타 연결 3. 메타 장수 4. 메타 자본 5. 메타버스(meta+universe)와 아바타 6. 메타 센서 7. 메타 인공지능 8. 인공지능-인간 협업 9. 로봇과의 공생 10. 메타 재생 에너지 11. 메타 예방보험 12. 메타 교통수단 13. 메타 주문생산배송.. 2021. 12. 29.
다닐 알렉산드로비치 그라닌 《시간을 정복한 남자 류비셰프》 다닐 알렉산드로비치 그라닌(전기) 《시간을 정복한 남자 류비셰프》 이상원·조금선 옮김, 황소자리 2004 나의 시계는 끊임없이 질주한다. 한때는 시계가 너무 많더니 이젠 이 방엔 단 세 개뿐이다. 자다가 깨어 화장실 갈 때 시각을 확인할 수 있는 탁상시계, 회의를 하거나 누구를 만날 때 스마트폰 들지 않고 자연스럽게 시각을 확인할 수 있지만 이젠 소용이 없게 된 손목시계, 초침이 1분에 한 바퀴씩 숫자판을 일주하는 저 벽시계가 그것들인데 벽시계를 바라볼 때마다 나는 조급해진다. 초침이 너무나 분주하기 때문이다. 그 초침이 달리는 모습을 보면 정말이지 이렇게 앉아 있어도 되나 싶고 벌떡 일어서서 밖으로 뛰쳐나가 무슨 일을 저질러야 할 것 같은 강박감을 느끼게 된다. 류비셰프는 그의 시간을 이렇게 살았단다... 2021. 12. 25.
존 윌리엄스 《STONER 스토너》 존 윌리엄스 《STONER 스토너》 RHK 2020 윌리엄 스토너는 1910년, 열아홉의 나이로 미주리 대학에 입학했다. 8년 뒤,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그는 박사학위를 받고 같은 대학의 강사가 되어 195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강단에 섰다. 그는 조교수 이상 올라가지 못했으며, 그의 강의를 들은 학생들 중에도 그를 조금이라도 선명하게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소설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서평 중에는 지루하더라는 것도 있었지만 가장 흥미로웠고 한 권만 다시 읽는다면 지금은 이 소설을 선택할 것 같다. 스토너는 열정적으로 살았다. 최선을 다했다. 농부의 아들로 친척집에서 알바를 하며 다락방에서 공부를 했고 부모의 기대는 농사일을 물려받는 것이었으나 아처 슬론 교수가 보여준 열정에 따라 대학에 .. 2021. 12. 21.
장영희 《문학의 숲을 거닐다》 장영희 문학 에세이 《문학의 숲을 거닐다》 샘터 2005 장영희 교수는 유방암의 전이가 척추암이 되어 세상을 떠나기까지 동경의 대상이 되어 주었습니다. 젊었던 날들, 장왕록이라는 번역자의 이름을 자주 보았는데 장 교수가 그의 딸이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부터였습니다. 신문의 칼럼에서 그 이름이 보이면 열심히 읽었습니다. 장영희 교수의 수필집 《내 생애 단 한번》은 왜 그랬는지 읽다가 말았고, 독자들이 '아, 이 책을 한 번 읽어 보고 싶다' 하고 도서관이나 책방을 찾도록 해 달라는 신문사의 주문으로 쓴 칼럼을 엮었다는 이 책은 아예 사놓기만 하고 읽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자벨, 삶이 더 좋은 거야. 왜냐하면 삶에는 사랑이 있기 때문에. 죽음은 좋은 거지만 사랑이 없어. 고통은 결국 사라져. 그러나 사랑은.. 2021. 12. 6.
재미있는 사람《프랭클린》 로저 버어링게임 《프랭클린》 김면오 역, 창명사 1974 장명희 선생의 《문학의 숲을 거닐다》를 읽다가 프랭클린 자서전 얘기가 나와서 내게도 책이 있나 봤더니 자그마한 전기 한 권이 보였습니다. 귀퉁이에 1975년 10월 17일, 부산, 200이라고 메모되어 있습니다. 2,000을 잘못 썼나 싶어서 판권란을 열어봤더니 정가가 240원이었습니다. 그 가을, 전국 현장교육연구대회 발표 및 시상식이 열렸는데 나는 "국민학교 방학생활 개선방안 연구"로 푸른기장증 1등급을 받았습니다. 한 해 전 1974년에는 "역할 부여를 통한 수용적 학급 분위기 조성"이라는 주제의 연구보고서로 난생처음 참여한 그 대회에서 전국 1등급을 받았습니다. 그 보고서를 쓰면서 만난 교육연구원 이광욱 연구사의 고마움을 잊을 수가 없어서 .. 2021. 12. 4.
앨리스 먼로 〈물 위의 다리〉죽음 앞에서 만난 사람 앨리스 먼로 소설 〈물 위의 다리〉 소설집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뿔 2007) 마흔넷 유부녀 지니가 캄캄한 밤에 웨이터 리키와 함께 있다. 처음 만난 사이이다. "보여 드릴 게 있어요. 아마 한 번도 보지 못한, 그런 걸 보여 드릴 게요." 그가 말했다. 이전이었다면, 이전의 정상적인 상태였다면 지금쯤 겁이 나기 시작했을 것이다. 사실 예전의 정상적인 그녀라면 애당초 이렇게 따라나서지도 않았겠지만. "호저예요?" 그녀가 물었다. "아뇨, 호저는 아니에요. 호저만큼 흔한, 그런 게 아니에요. 적어도 제가 아는 한은요." 1킬로쯤 더 가서였던가, 그가 전조등을 껐다. "별 보여요? 저기, 별이요." 그가 물었다. 그가 차를 세웠다. 처음에는 사방이 그저 고요로 가득한 것 같았지만 사실은 아주.. 2021. 11. 28.
앨리스 먼로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 앨리스 먼로(소설집)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 뿔 2007 줄거리로 보면 의아하다 싶을 수 있다. 켄 부드르와 조헤너 패리가 결혼하는 데는 둘 사이에 구체적인 미움이나 우정, 구애, 사랑 같은 건 없었기 때문이다. 한심한 사내 부드르. 돈을 빌려주거나 빌리는 일로 늘 곤란을 겪는다. 아내 마르셀이 죽고 딸 새비서마저 장인 맥컬리 씨에게 맡겨 놓고는 이런저런 구실로 돈을 가져간다. 세월도 실없이 보낸다. 괜히 공군을 뛰쳐나왔고 주제넘게도 동료 문제로 비료 회사를 그만두었고 고용주에게 몸을 낮추지 않다가 보험회사에서도 쫓겨났다. 빌려준 돈 대신 허름하기 짝이 없는 호텔을 차지했는데 이 건물을 식당 겸 술집으로 개조하기 위해서 장인에게 또 돈을 좀 달라고 하지만 사실은 쓸모가 전혀 없어서 철거하는.. 2021. 11.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