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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나딘 고디머 《거짓의 날들》

by 답설재 2022. 1. 5.

나딘 고디머 《거짓의 날들》

왕은철 옮김, 책세상 2014

 

 

 

 

 

 

 

나는 비 오는 모습을 지켜보며 창가에 서 있었다. 너무 조용히 와서 창문에서 돌아서면 비가 온다는 사실을 알 수 없었다. 밖으로 눈을 돌려야만 비가 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비는 소리 없이 내리고 또 내렸다. 정원과 바다는 기차 안에서 내 앞으로 밀려왔다가 기찻길을 따라 멀어져가던 풍경과 다를 바 없었다.

(...)

그녀는 '젊은 사람들을 이해'하려 애쓰지 않았다. 자신의 관점과 선호에 대해 솔직하게 말하는 것을 미안해하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자신이 느끼는 것과 좋아하는 것을 보여주고 나이에 걸맞은 초연함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위엄을 잃을까봐 두려워하지도 않았다.(75)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 인근 애서턴 광산촌 사무관의 딸 헬렌 쇼가 세상을 알아간 나날을 보여준 소설이다.

열일곱 소녀 헬렌은 남부 해안 마을에 사는 어머니의 친구 코흐 부인의 아들, 자유분방하고 착한 스물일곱 살 루디를 동경하다가 대학에 진학해서 유대인 남학생 요엘 아론과 친한 사이가 되고 '아파르트 헤이트'(사회적·경제적 차원에서 흑인과 백인의 삶이 분리되어 있는 상황을 극단적으로 몰고 가 완전한 분리를 추구하고자 한 백인 위주의 정책)에 저항하여 흑인을 위해 일하는 매력적인 사내 폴 클라크와 사랑에 빠져 동거하게 되지만

흑인민족주의를 바라보는 무력감, 그 무력감에서 오는 마음의 갈등을 극복할 길을 찾지 못한다..

 

그날 밤 우리는 다른 많은 날들처럼 침대로 가서 아무 말 없이 사랑을 나누었다. 그것은 그때 우리가 가진 전부였다. 많은 다양한 풍경과 장소들, 태양 속에서의 꿈같은 만남, 그늘 속에서의 부드러운 만남, 바람 부는 높은 지대에서 서로에게 달라붙으며 친밀함을 느끼고 웃고 흥분하던 자리에 이제는 머리 위로 꽂히는 무겁고 소리 없는 비처럼 가파른 어둠 속으로 깊숙이 내려가는 이상한 내리막길만 남아 있었다.(475)

 

그 무력감만으로 흑인 폭동을 지켜본 그녀는 마침내 유럽으로 떠나는 배를 기다리는 해안 도시 더반에서 이스라엘을 찾아 떠나는 요엘을 만나 서로의 정체성과 자아를 확인하고 이별한다.

 

이 소설의 작가 나딘 고디머는, 인권운동의 상징 넬슨 만델라가 28년간의 수감 생활을 마치고 감옥을 나서면서 "나는 나딘을 만나야 합니다"라고 했을 만큼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양심을 대표하는 작가였다고 한다.

고디머는 31세에 이 소설을 썼다.

 

끝까지, 소녀가 세상과 부모, 남성을 알아가는 서정적 문장에 이끌려서 읽었다.

이 소녀에게 교육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겪지 않아도 좋을 것을 겪지 않게 하는 것? 험한 일은 검험하지 않게 보호하는 것? 천만의 말씀일 것이다. 겪을 수 있는 일들을 풍부하게 경험하게 하는 것, 그 경험을 더욱 가치 있게 받아들일 수 있는 가슴을 지니게 하는 것이었어야 할 것이다.

 

* 이 소설은 콜로라도의 덴버 대학교수 '노루' 님의 (오래 전) 소개로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