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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윌리엄 트레버 《밀회》

by 답설재 2022. 1. 17.

윌리엄 트레버 소설 《밀회》

김하현 옮김, 한겨레출판 2021

 

 

 

 

 

 

신성한 조각상」 등 열두 편의 단편을 읽었다.

 

코리와 누알라 부부는 가난하다. 그들의 사랑은 깊다.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코리가 버티게 하는 건 누알라였다.

코리는 가구점 점원이다. 그가 틈틈이 만든 성인 조각상을 보고 감탄한 펠러웨이 부인 때문에 그 가구점을 나와버렸다. 모든 성당에 그가 만든 조각상을 설치하게 하자는 그녀의 말을 듣고 조각상 제작에만 전념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브리지다 성녀 교구회관에 브리지다 성녀 조각상을 '기증'한 것이 전부였고 단 한 군데도 그에게 조각상 제작을 의뢰하지 않았다. 세 자녀를 둔 데다가 누알라가 다시 임신하여 일자리도 구하지 못하자 그들의 생활은 극도로 곤궁하게 되었다.

기대를 갖는 건 석조장을 경영하는 오플린 씨가 1년간 무급으로 묘지에 글씨 새기는 일을 시켜보고 차후 급료를 지불하겠다는 약속이지만 그 일 년 간의 생활에 대한 대책이 없었으므로 마침내 펠러웨이 부인을 찾아갔지만 부인의 생활도 이미 기울어진 뒤였다.

코리가 빈 손으로 돌아온 걸 본 누알라는 주유소 운영, 보험 업무 등으로 부유하긴 하지만 아이를 갖지 못하는 에티를 찾아가 아무도 몰래 뱃속에 든 아이를 주겠다는 약속을 해버렸는데 코리는 완강하다.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코리가 도로 공사 일을 하러 나간 뒤 누알라는 코리의 작업장에 들어간다.

 

자신의 친구가 된 성인 조각상들을 매일 아침 찾던 누알라는 그날 평소보다 코리의 작업장에 오래 머물렀다. 석쇠를 든 성인 로렌스, 메신저인 성 가브리엘, 아시시의 성 클라라, 사도 성 토마스와 눈이 먼 성 루치아, 성 카타리나, 성 아그네스. 코리는 누알라를 위해 조각상을 만들었고, 조각상들이 동요하지 않는 평정심으로 자신의 시선을 돌려보내자 누알라는 처음으로 분노가 조금씩 흘러 나가는 것을 느꼈다. 감화되어 평온함에 잠긴 누알라는 조각상의 체념을 느꼈다. 실패한 것은 누알라가 아니라 세상이었다.

 

 

「밀회」는 표제작이다.

이미 주제가 그렇긴 하지만 조용하고 은밀하다. 

 

* 그는 희미한 향기를 풍기는 외투를 옷걸이에 걸었다. 오늘은 방수 처리된 이 가볍고 까만 외투만으로 충분했다.

* 그녀는 사랑의 까다로운 특성을 잘 알았다. 사랑은 거의 언제나 잘못된 대상을 향했다.

* 말하지 않았으나 이해한 사랑의 규칙은 끝나지 않은 것을 끝내는 괴로움 속에서도 깨지지 않았고 앞으로도 깨지지 않을 것이었다. 오늘 사랑은 조금도 부서지지 않았다. 둘은 그 사랑을 지니고서 몸을 떼고 서로에게서 멀어져 갔다. 미래가 지금 보이는 것만큼 절망적이지 않다는 것, 그 미래 안에 여전히 두 사람의 과묵한 섬세함과 한때 사랑이 만든 그들의 모습이 남아 있으리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채로(끝).

 

 

윌리엄 트레버의 이야기는 밝지 않다. 잔잔하고 섬세하고 서정적이다. 따스하고 행복한 느낌을 준다.

「밀회」 같으면 한 문장이 서너 가지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아서 줄줄 읽어나가는 건 무의미한 것 같았다. 그래서 시집처럼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