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쓰이에 마사시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김춘미 옮김, 김영사(비채) 2016
무라이 슌스케 씨께
귀 건축설계사무소 직원들 모두 귀하를 "선생님"이라고 불렀으니까 그렇게 부를까요? 그게 자연스러울 것 같기도 하고 이 글을 쓰게 된 직접적인 이유도 사실은 그 호칭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나라와 달리 일본에서는 "선생님"이라는 호칭의 사용에 대해 뭐랄까 더 인색하다고 할까, 더 엄격하다고 할까, 어쨌든 아무에게나 그 호칭을 사용하지 않는 것 같아서 더욱 그렇습니다.
이렇게 시작하니까 나도 그 사무소 직원들처럼 "선생님" 하고 부르기가 좀 어색하기도 합니다.
무라이 슌스케 씨!
나는 초등학교 교사로 출발해서 지금까지 한시도 교육을 잊고 지낸 시간은 없었고 직접 아이들을 가르친 시간도 이십여 년이어서 사실은 수많은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생애였습니다.
그에 비해 무라이 사무소 직원은 열세 명이었나요? 게다가 이 소설은 국립현대도서관 신축을 위한 설계 경합에 참여하기 위해 나카 가루이자와 역 부근에 있는 귀하의 아오쿠리 여름 별장에서 설계 작업에 참여한 아홉 사람이 등장하는 얘기였으므로 귀하를 선생님으로 부른 사람은 겨우 여덟 명이었는데도 나는 정말이지 귀하가 부러웠습니다.
사무장 이구치 히로시, 그 아래 가와라시키와 고바야시 두 명의 베테랑, 가사이, 가구와 모형 담당 우치다, 나카오 유키코, 화자로 등장한 사카니시 도오루, 귀하의 조카 무라이 마리코 등 여덟 명이 한결같이 정성스럽다고 할까요, 언제나 존경을 담아 귀하를 대하는 모습을 읽으며 부럽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싶었습니다.
소설을 읽는 사람에 따라서는 문부성의 대형 건축 사업에 참여한 건축 설계사들의 고뇌에 중점을 두어 읽을 수도 있을 수 있을 만큼 값지고 풍부한 정보들이 주옥처럼 열거되었다고도 할 것 같았고, 웬만한 젊은이라면 귀하가 뇌경색으로 쓰러져 병원에 들어갔을 때 병원 직원에게 귀하와의 관계에 대해 '파트너'라고 소개한 후지사와 기누코와의 드러나지 않은 사랑 혹은 화자 사카니시 도오루와 마리코 간의 깊어가는 관계, 그러면서도 멀어지지도 가까워지지도 않는 유키코와의 관계 같은 것에 중점을 두고 읽었겠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시종일관 직원들과 귀하의 그 끊을 수 없는 사제 관계가 눈길을 사로잡았습니다.
조카딸 마리코마저 언제나 귀하를 '선생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건 현시욕에 좌우되지 않은 귀하의 아름다운 생애에 대한 찬사였을 것입니다.
조용하고 잔잔하게 아름답게 읽히는 이 소설의 문장조차 귀하에게 헌정하는 길고 긴 편지 같았습니다.
히말라야 삼나무, 계수나무, 산초나무, 단풍나무, 후박나무, 금계나무도 귀하를 위해 거기 서 있고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21번과 즉흥곡, 하이든 4계, 브람스의 피아노 협주곡 2번, 말러의 교향곡 4번, 슈만의 음악들도 이 이야기에서는 오로지 귀하를 위해 연주되고 있었습니다.
스톡홀름 시립도서관의 건축가 군나르 아스플룬드에 대한 기록은, 우리가 귀하를 그와 같은 경지로 이야기할 수 있게 하는 것 같았습니다.
모든 것이 귀하에 대한 존경과 사랑으로 엮인 것으로 보였습니다.
사카니시 도오루는 왜 마리코가 아니고 유키코와 맺어졌을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 일조차 귀하에 대한 추모와 관계 깊었던 인연 아니었을까 싶었습니다. 마리코는 작은아버지인 귀하를 섬기면서도 결국 자신만의 가업을 이어가야 하는 여성이었으니까요.
다 열거하기가 어렵겠습니다. 그럴 필요도 없겠지요.
아, 후지사와 씨 이야기는 조금 더 해야 하겠군요.
세상의 누군들 마지막까지 따스하고 찬란할 수 있겠습니까? 다들 쓸쓸한 것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쓰러져 긴 혼수상태가 있었지만 마지막에 정신을 차리고 그 직원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만 해도 얼마나 귀한 일인지 모릅니다.
후지사와 씨가 귀하의 마지막을 지켜보지 못한 것에 대해서 섭섭하진 않을 것으로 짐작합니다. 후지사와 씨가 그 사랑을 잊었을 리는 없을 것입니다.
인생이란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여름 별장을 버리지 않고 찾아간 사카니시와 유키코 부부는 그들에게 부여된 세월 속에서 귀하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그 별장을 지키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된 것이지요. 누가 귀하만큼의 존경을 받는, 아름다운 스승으로서의 행복을 누리겠습니까?
한 편의 시처럼 살다가 간 무라이 슌스케 씨.
'책 보기의 즐거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숨(단편소설)《파도를 만지는 남자》 (0) | 2022.02.03 |
---|---|
칼 세이건 《코스모스 COSMOS》 (0) | 2022.01.30 |
윌리엄 트레버 《밀회》 (0) | 2022.01.17 |
레이몽 라디게 《육체의 악마》 (0) | 2022.01.11 |
나딘 고디머 《거짓의 날들》 (0) | 2022.01.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