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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앨리스 먼로 〈물 위의 다리〉죽음 앞에서 만난 사람

by 답설재 2021. 11. 28.

앨리스 먼로 소설 〈물 위의 다리〉

소설집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뿔 2007)

 

 

 

 

 

마흔넷 유부녀 지니가 캄캄한 밤에 웨이터 리키와 함께 있다. 처음 만난 사이이다.

 

 

"보여 드릴 게 있어요. 아마 한 번도 보지 못한, 그런 걸 보여 드릴 게요." 그가 말했다.

이전이었다면, 이전의 정상적인 상태였다면 지금쯤 겁이 나기 시작했을 것이다. 사실 예전의 정상적인 그녀라면 애당초 이렇게 따라나서지도 않았겠지만.

"호저예요?" 그녀가 물었다.

"아뇨, 호저는 아니에요. 호저만큼 흔한, 그런 게 아니에요. 적어도 제가 아는 한은요."

1킬로쯤 더 가서였던가, 그가 전조등을 껐다.

"별 보여요? 저기, 별이요." 그가 물었다.

그가 차를 세웠다. 처음에는 사방이 그저 고요로 가득한 것 같았지만 사실은 아주 먼 곳에서 들려오는 조용한 차 소리며, 제대로 듣기도 전에 스쳐 지나가는 작은 소리들, 아마 야행성 동물이나 새, 박쥐 같은 것들의 소리가 그 고요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지니는 암에 걸렸다. 수술을 받고 화학치료 요법을 시작했다. 몸을 가누기도 어렵다.

그녀보다 열여섯 살 더 먹은 남편 닐은 캠페인을 하며 살아간다. 정치 캠페인, 역사적 건물·다리·표지 보존 캠페인, 도로변과 숲의 벌목에 반대하는 운동, 강물의 오물 유입, 보호 구역 개발 반대, 주민들의 카지노 중독 비판 캠페인......

그들은 21년을 같이 살았다.

닐은 주위에 단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더 생기 있고 활기차게, 비위라도 맞추는 듯 살갑게 굴지만 평소에는 지니를 배려해주지 않는다. 가령 저녁 모임에 내놓으려고 만든 생강 과자를 다 먹어치운다.

 

지니가 아프다니까 닐은 얼씨구나 하고 당장 살림을 도와줄 여자 아이를 구했다. 아빠한테 두들겨 맞은 후 집을 나온 헬렌은 피부가 부드러운 분홍빛이고 얼굴을 바라보면 발가벗은 것 같은 인상이다. 송아지나 사슴 같은 표정을 짓고 모든 것은 표면 위에 존재하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닐은 의사를 만나고 나온 지니와 그 헬렌을 태우고 헬렌의 외출용 신발을 찾으러 간다. 헬렌이 그만 됐다고 하는데도 백 번은 졸라서 기어이 그 신발이 보관되어 있다는 한 농가를 찾아간다.

닐과 헬렌은 그 집 부부가 시원한 맥주 좀 마시고 쉬어 가라고 해서 집 안으로 들어가고 지니는 차에 남는다.

그들은 해가 저물어도 나올 줄을 몰랐고 그새 식당에서 퇴근한 그 집 아들 리키가 옥수수 밭에서 소변을 보고 나오는 지니를 발견한다.

리키는 많이 불편해 보이는 지니를 집에 데려다주겠다고 한다.

 

 

"달이 아직 뜨지 않아서 아쉬운데요. 달이 뜨면 정말 근사하거든요." 리키가 말했다.

"지금도 근사해요."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원하기만 하면 언제라도 할 수 있는 것처럼 두 팔로 그녀를 감싸 안고 입술에 키스했다. 키스라는 행위 자체에 그녀가 기꺼이 함께한 것은 마치 이번이 처음인 것만 같았다. 부드러운 시작, 적당한 압박, 정성어린 탐색과 자연스러운 수용, 여운을 남기며 사그라지는 고마움과 만족감, 모든 것이 그 자체로 완전한 존재감을 지닌 하나의 행위였다.

"아, 아......" 그가 말했다.

그는 그녀의 몸을 돌려세웠고, 그들은 왔던 길을 다시 걷기 시작했다.

 

 

인간만사가 날이 갈수록 더, 더, 돈, 돈이어서 이제 돈은 숨조차 품위있게 쉴 수 있도록 하는 힘을 지니게 되었지만 자신의 주변에 죽음의 그림자가 일렁이는 걸 보고 있는 지니에게는 돈도 의복도 음식도 남편도 그 무엇도 필요 없었을 것이다.

굳이 사랑이 아니어도 괜찮을 것이다.

세상은 괜찮은 곳이라는 느낌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은 좋은 일이고 이 세상에는 좋은 사람도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게 된 것도 좋은 일이다.

그것을 보여주는 소설이라고 생각했다.

 

지니는 이후에도 얼마동안 리키를 더 만났을 것이다. 이런 대화가 이어졌기 때문이다. "결혼한 여자에게 키스해 본 건 처음이에요" 리키가 말하자 그녀가 대답했다. "앞으로는 많이 해보게 될 거예요. 죽기 전까지 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