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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1153

봄은 어김없이 오네 온갖 사정을 막론하고 봄은 오고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봄은 오고 생각은 사람마다 다 달라도 봄은 오네 2023. 3. 24.
노인의 시간 새벽에 쓸데없이 일찍 잠이 깨어 오랫동안 뒤척였다. 그 시간이 꽤 오래 흘러 마침내 일어날 수 있었다(잠시, 왜 눈을 떴느냐는, 늙었으면 죽어야지 왜 살아 있느냐는 구박을 받더라는 씁쓸한 우스개가 생각났다). 어제저녁에는 고요해서 책을 읽을 수도 있었는데 괜히 '적막하구나...' '적막하구나...' 하며 두어 시간이나 헛된 시간을 보냈고 마침내 잠들 수 있었다. 오늘은 또 그렇게 해서 일어난 새벽부터 이 저녁까지 뭘 했는지 뚜렷한 기억이 없다. 그런데도 또 저녁이 되었고 두어 시간 후에는 구처 없이 잠자리에 들어야 한다. 이 저녁에도 책을 읽으면 좋을 텐데 나는 적막하다고, 한탄할 일도 아닌 걸 가지고 한탄처럼 생각하며 어정대고 있다. TV만 켜놓지 않는다면 나의 세상은 사실은 늘 이렇게 적막할 수밖에 .. 2023. 3. 23.
버려진 책장 : 먼지 대신 책 버리기 적어도 서너 곳일 이 아파트 폐기물 처리장에는 걸핏하면 멀쩡한 책장이 나와 있다. 물론 다른 가구도 나온다. '저렇게 나와 있으면 자존심 상하지 않을까?' 'AI 시대가 되어 책장 같은 건 구식 가구가 된 걸까?' '내겐 저걸 들여놓을 만한 공간이 없지?' '요긴하게 활용할 수 있을 텐데...' 책을 모으고 틈틈이 분류하고 흐뭇한 마음으로 살펴보고 하던 시기는 지나가버렸다. 그 시절엔 그렇게 하는 것이 지상의 목표였다. 솔직하게 말하면 지위나 돈 따위와는 비교할 수가 없는 가치였다. 그런 책이고 책장이었다. 그 책, 그 책장들이 바로 나라고 해주면 그보다 고마울 일이 없었을 것이었다. 이젠 그렇진 않다. 뭐가 변했나? 아니다. 세월이 갔을 뿐이다. 세월이 간 것이어서 그런 흐름에 무슨 관점이 필요할 것도.. 2023. 3. 22.
집에 대한 건축전문가(최욱)의 생각 1 우리는 바다다. 바다에서 생명이 탄생했고 몸속의 농도도 바다와 비율이 같다. 바다를 멀리서 바라보면 우리 눈높이가 바다의 높이다. 앉으면 내려오고 서면 바다는 올라온다. 오즈 야스지로 감독이 찍은 바다 영상을 보면(특히 영화 「부초」의 도입부) 무릎 높이에서 바다가 걸린다. 촬영기사가 엎드려서 찍었기 때문이다. 어떤 바다의 풍경을 가진 창을 원하는가? 창이 높으면 상대적으로 바다가 작게 보여 하늘이 보이는 창이 된다. 창은 바다의 높이를 적절하게 조율하는 비례 상자이다. 로스코 그림의 틀과 같다. 2 인간은 햇볕에 반응하는 해바라기다. 동해 바다가 서해와 남해 바다와 다른 점은? 낮에 바다를 보면 남쪽 바다는 햇볕 때문에 반짝이는 빛인 반면 동해 바다는 빛을 반사하는 색이다. 바라보는 사람의 눈과 햇.. 2023. 3. 20.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어떻게 살아가면 좋을까?' 그렇게 묻는 건 사치겠지?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여기까지 와서 아직도 나는 이러고 있네? 2023. 3. 17.
"다시 태어난다면?" 그럴 리 없다. 사양할 것이다. 이번만으로 됐다. 강제하는 경우에도 더 나은 생활을 하게 해달라고 요청하는 건 구차할 것 같다. 함께하는 사람을 고생시키면서 그 과정을 반복하는 건 할 짓이 아니다. 굳이 물어볼 것도 없지만 다른 길을 선택해야 한다고 할 것이다. 이번만으로도 고맙고 미안하다. 갚을 길도 없다. 뻔뻔하지만 그 정도는 안다. 2023. 3. 15.
시인과 쓸쓸한 공무원 시인 설목이 전화를 했습니다. (나) "여보세요~" (설목) "공문이 왔습니다~" (나) "무슨 공문요?" 마침 버스가 오르막길을 오르는 아파트 앞을 걸어 올라가고 있을 때여서 소음도 한몫하긴 했습니다. "봄이 왔습니다~" 그는 그렇게 말한 것이었는데 나는 공문이 왔다는 걸로 들었습니다. 공문과 거의 관계없는 삶을 산 지 오래되었는데도 아직 나는 이렇게 젖어 있습니다. 이건 쓸쓸한 일입니다. 문득 지지난해 여름의 일이 생각났습니다. 박수홍이 결혼을 했다는 뉴스를 본 아내가 내게 그 얘기를 할 때 마침 아파트 옆 오르막길을 버스가 용을 쓰며 올라가고 있었고 우리는 거실 창문을 열어놓은 상태였습니다. "박수홍이 결혼했다네~" 아내는 그렇게 말한 것인데 이쪽 방에서 책을 읽던 나는 이렇게 되물었습니다. "복숭.. 2023. 3. 14.
내 독서에 대한 나의 희망 나는 읽어야 할 책을 얼른 다 읽고 싶다. 읽어야 할 책? 사놓은 책, 꼭 한 번 읽으라고(그렇지만 이젠 누가 보낸 것인지도 모를 몇몇 권의 책) 아니면 내 책 좀 보라고 보내주는 책, 새로 나오는 책을 일부러 찾아서 사지는 않지만 더러 사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판단하게 되는 책...... 저 서장(書欌)에서 나를 기다리는 책. 읽을 책은 줄어들고 있나? 모르겠다. 줄어들기를 기대하며 읽는 수밖에 없다. 다 읽으면 할 일이 있다. 읽은 책 중에서 꼭 확인해야 할 내용을 찾는 일이다. 가령 "백 년 동안의 고독"에서 서장에 관한 부분, 그 부분은 소설 "향수"(파트리크 쥐스킨트)에서 그 지독한 향수 전문가가 자신이 냄새 맡아본 몇 천 가지의 향수를 종류별로 자신의 뇌 속 창고에 보관하듯 수많은 책이 정리되.. 2023. 3. 12.
내 눈물 아무리 딴생각을 하려고 해도 기가 막히다는 말만으로는 너무나 부족한 일들이 떠오르고 떠오르고 떠오르고 더러 외롭고 허전하고 우울하고 고독하고 적막하고 더러 얼른 마치고 갈 수 있으면 싶고 그런데도 나는 눈물 같은 건 흘리지 않게 되었다. 눈물이 없으면 이게 인간인가? 내가 지금 인간인가? 인간의 조건은 소나 개처럼 눈물이라도 흘릴 줄 아는 게 아닐까? 눈물도 모르게 된 나는 인간인가? 2023. 3. 8.
그림 속으로 사라져버린 화가 우다오쯔 캐나다 로키산맥 기슭에 사는 헬렌님의 우리말 블로그 "Welcome to Wild Rose Country"에서 시 '오늘'을 읽었다. 오늘 같은 봄날엔 그대도 창문을 활짝 열었을 것 같다. 카나리아 새장을 열어서 아예 그 새를 날려버렸겠지? 모란꽃이 만발한 정원의 서늘한 돌담길에 햇볕이 새겨진 오늘은, 거실 탁자 위 유리 문진을 망치로 내려치면 그 문진 속 눈 덮인 별장에 갇혀 살아가는 사람들이 눈부셔하며 손을 맞잡고 나와 저 넓고 푸르고 하얀 세상으로 걸어 나갈 것 같다는 시였다. ☞ 오늘(빌리 콜린스) https://nh-kim12.tistory.com/17202407 유리 문진에 갇힌 이야기 속 사람들이 서로 손을 잡고 눈이 부셔서 한 손으로는 햇살을 가리며 세상 속으로 걸어 나오는 모습을 생각하니.. 2023. 3. 6.
고달픈 인생길 '고달픈 인생길' 이렇게 써놓고 어이없게도 일단 미소를 짓는다. 하기야 삶이란 결국 거의 슬픔으로 요약되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며칠 전 한 선배의 부음을 들었는데 한번 모이고자 한다는 연락을 하면 늘 호의적이던 평소의 그분을 생각하니까 슬픔이 밀려왔다. 1월 22일 계묘년 설날 첫새벽에는 두 자루의 꿈을 꾸었다. 그믐날 저녁에는 '설날에라도 좋은 꿈을 꾸었으면' 싶어했는데 헛일이었다. 먼저 꾼 꿈은 절벽 같은 산을 오르내리는 꿈이었다. 애써서, 천신만고로 오르내리다가 '이건 꿈이라도 너무나 힘들구나!' 하며 깎아지른듯한 산마루에서 들판을 내려다보며 힘겨워하고 있었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겠다고 했을 때 기가 막히고 마음이 비통한 것은 비록 아난다 등 제자들만은 아니어서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 2023. 3. 3.
수레국화의 영광 성희가 나와 함께 지낸 건 37년 전 1년간이었지만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습니다. 성희 남편이 저 뜰을 밀밭으로 만들자고 해서 이효석의 소설 속 달밤을 떠올리며 그런가보다 했는데 그 이듬해 가을날 둘이 와서 수레국화 씨를 뿌려주었고 저렇게 온통 수레국화 천지가 된 집으로 2년간 지냈습니다. 첫해는 7월에 절정이었고 이듬해는 6월에 절정이었습니다. 그 7월 혹은 6월에 나는 수레국화에 빠져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꿈결 같은 시간은 한 달이 채 되지 않았습니다. 수레국화가 자라서 뜰을 뒤덮기 전이나 활짝 피었다가 지고 나면 1년 내내 심지어 한겨울에도 잡초와 전쟁을 벌여야 했습니다. 성희 부부는 잡초 중에도 예쁜 게 있다고 했고 그건 나도 알지만 그중에는 저 뜰을 점.. 2023. 3.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