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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1153

개망초 향기 "요즘도 많이 바쁘죠?" 그렇게 물으면 되겠지, 생각하며 며칠을 지냈다. 누구에게든 이쪽에서 먼저 전화를 하는 게 점점 어려워지더니 이젠 거의 불가능한 일이 되고 있다. 그러던 차에 전화가 왔네? 생각나는 대로 이야기하면 수다가 된다는 걸 염두에 두며 대체로 묻는 것에만 대답했다. 너무 서둘러 끊었나? 섭섭해할까 싶어서 개망초 사진을 보내주었다. 답이 없다. ... 바쁘긴 바쁜가 보다. 밤 9시 24분, 잊고 있었는데 답이 왔다. 다섯 시간 만이었다. 저쪽 : 꿀 냄새만 나는 게 아닌걸요~ 개 망할 풀 왜 이리 이뻐요!? 나 : 밭 임자가 의사인데 많이 바쁘겠지요, 지난해 심은 대추나무가 다 죽어 그 혼이 개망초꽃으로 피어나서 그래요 ^^ 저쪽 : 선생님, 눈물 나려고 해요 ㅠㅠ 나 : 아! 이런!!! .. 2023. 7. 4.
"당신의 내일을 뜨겁게 응원합니다" 늦은 밤에도 새벽에도 우리 아파트 인도에는 저 고마운 인사가 보입니다. 그런 시간에 저 길을 걸어 올라갈 일이 없어서 한동안 '뭐지?' 하고 내려다보기만 했습니다. 처음 발견한 날은 오랫동안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한 중년 여성이 밟지 않고 지나가더니 뒤돌아서서 한참 동안 살펴보고 있었습니다. 낮에 일부러 저 보안등 옆에 가서 살펴봤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나에게도 늦은 밤이나 새벽에 귀가하는 날이 숱했습니다. 그때는 그게 죽을 지경일 뿐이었고 지금은 한 명도 기억해주지 않는 날들이어서 어쩔 수 없이 혼자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저 위 사진의 글은 이렇습니다. "당신의 내일을 뜨겁게 응원합니다." 2023. 6. 23.
개망초 퍼레이드 저 작은 공원 소나무숲 이쪽 언덕은 개망초 동산이 되었다. 여름 가을도 좋고 쓸쓸한 겨울도 좋지만 요즘은 또 저렇게 들꽃 퍼레이드가 펼쳐져서 좋다 일주일에 두세 번 아침나절에 저곳을 다녀온다. 2킬로미터쯤? 올 때는 발이 무거워 걷다가 쉬다가 하며 겨우 돌아온다. 하필이면 왜 망초야, 개망초야. 계란꽃이라는 사람도 좀 있으니까 개망초보단 계란꽃 혹은 달걀꽃이 낫지 않을까? 하기야 어떤 소설가는 개망초꽃밭에서 만나고 헤어지는 애틋한 사랑을 그리긴 했지. 더구나 요즘 사람들은 개좋다, 개맛있다, 개사랑한다... 어쨌든 '개판 5분 전'이라고 할 때의 그 '개'를 좋은, 아름다운, 고마운, 사랑스러운 같은 의미로 바꾸어 놓았으니 개망초도 저절로 무방한 이름이 되어 버렸을까? 저런 꽃밭은 개인은 만들 수 없다... 2023. 6. 20.
내 친구 연우 연우(連雨)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사라진 지 20년은 되었습니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셨다고들 했습니다. 연우는 대학 다닐 때 시를 썼습니다. 학보사 주최 문예행사에서 장원을 했습니다. 나는 소설을 냈는데 소설을 낸 학생은 나뿐이었습니다. 연우나 나나 이 년째 거듭 수상을 했습니다. 나는 대안극장 바로 뒷골목 오른쪽 셋째 집이었던가, 괄괄하고 털털한 할머니가 운영하는 하숙집에 거처를 정해놓고 하루 한두 끼 밥을 먹고 잠을 잤는데 어느 날 누군가 연우와 함께 지내면 좋지 않겠느냐고 해서 그렇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다른 방 학생들과 달리 도무지 일어날 기색이 없으면 할머니는 다짜고짜 문을 열어 붙이고 들어와서 이불을 마루로 내던지며 "밥이나 먹고 또 자든지 하라!"며 고함을 지르곤 했는데 나는 .. 2023. 6. 16.
늙은이의 진부한 노래 세상에서 이미 잊힌 늙은이가 자기가 할 일 없으니 남도 그럴 거라고 착각하고 한창 바쁜 사람에게 옛날풍의 진부한 노래를 읊어 보내는 것도 썰렁한 일이다. 일본 헤이안 시대에 데이시 중궁의 여방으로 발탁된 재녀 세이쇼나곤의 《베갯머리 서책(枕草子)》에 나오는 문장이다. 나도 더러 그렇게 말은 했지만(현직에 있는 사람들은 늘 바쁘다고, 이쪽에서 그들에게 연락해서는 안 된다고) 정말 그런 줄은(옛날풍의 진부한 노래를 읊듯 해서는 안 된다는 걸) 몰랐던 것 아닌가 싶다. 나는 아직 저승 사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완전 이승 사람도 아니다. 명심해야 한다. 그런 줄 알면 될 것이다. 2023. 6. 10.
메기가 사는 곳 저기서 제법 큰 메기 한 마리를 봤다. 분명히 메기였다. 유유히(혹은 평화롭게) 헤엄쳐 건너편 돌 밑으로 들어갔다. 누가 민물고기매운탕감이라며 뛰어들어가서 잡으려고 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산책이나 운동하는 사람들은 백로, 청둥오리 같은 것들이 먹이를 찾으며 노는 장면을 아름답게 바라보거나 사진을 찍기만 하니까 믿어도 될 것이다. 초등학교 3, 4학년 아이들이 고기를 잡는다고 다리를 걷고 들어가 왁자지껄 떠드는 모습은 여러 번 봤지만 실제로 잡은 아이는 본 적이 없다. 이런 세상에, 메기가 여기까지 다 올라오다니... 2023. 6. 8.
프랑켄슈타인의 '잠' 프랑켄슈타인은 탁월한 과학적 상상력과 분석력, 응용 능력으로 인간을 만든다. 당연히 나무랄 데 없는 멋진 인간을 만든다고 생각하고 만들었지만 그건 인간이라기보다 기이하게 생긴 데다가 엄청난 힘과 학습력을 지닌 괴물이었다. 누가 좋아할까. 프랑켄슈타인 자신도 그 괴물을 상대하기 싫었지. 창조주로부터 버림 받은 괴물은 한 명씩 한 명씩 프랑켄슈타인의 가족을 죽인다. 프랑켄슈타인은 너무나 괴로워서 꿈속에서 사랑하는 가족을 만날 수 있는 시간만은 좋다는 생각을 한다. 이런 식으로 흘러간 삶은 지긋지긋하게 혐오스러워서, 잠들었을 때가 아니면 기쁨이라고는 맛볼 수 없었다. 아, 축복받은 잠이여! 누구보다 비참할 때면 잠에 빠져들곤 했고, 그러면 내 꿈이 나를 달래주어 황홀한 기쁨마저 맛볼 수 있었다. 수호 정령들이.. 2023. 6. 3.
"찔레꽃 붉게 피는"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나라 내 고향언덕 위에 초가삼간 그립습니다<p style="color: #555555;.. 2023. 5. 28.
늙으면 왜 지겨운 사람이 될까 '마스크 의무 착용'이 해제되어서일까, 교육부에 들어가 맨 처음 만난 사람 중 한 명인 C가 찾아오겠다며 '쐬주 한 잔 할 수 있는 식당'을 찾아달라고 했다. 모처럼 만나면 어색할까봐 그랬겠지, 우리가 다 아는 사람 둘을 대며 함께 가도 좋겠느냐고 물었다. 네 명이 반갑게 인사하고 자리에 앉았을 때 이 자리를 마련한 그에게 감사 인사 겸 근황을 묻고 싶었는데, 교육부 근무 기간이 겨우 2년 정도였지 싶은 O가 이야기를 시작했고 '이제는' '이제는' 하며 우리도 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찾았지만 그는 아예 잠시도 틈을 주지 않았다. 누가 서두만 꺼냈다 하면 말도 끝내기 전에 그가 얼른 받아서 늙으면 뼈를 조심해야 하고, 근육은 한번 생기면 없어지는 게 아니라 다른 곳으로 퍼져 나간다느니, 인대는 구조가 어떻.. 2023. 5. 7.
부부 : 행운의 세례 혹은 상극관계 시험기간이 되면 모두들 집에 일찍 들어가고 나 혼자 쏘다녔습니다. 하기야 나는 동기생들하고는 놀지 않고 시내에 나가 이 사람 저 사람 만나고 다녔을 뿐이어서 대학생 주제에 들어앉아 허접한 내용들을 죽어라 암기하거나 좁쌀 글씨로 써서 커닝 준비를 하는 일 따위에는 관심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나를 보고 "저렇게 해서 발령이 난들 선생을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고들 했는데 두어 명 여학생은 측은하게 여기고 도와주고 싶어 했습니다. 과제물을 만들어주기도 했고 저녁에 남 안 볼 때 불러서 찾아가면 노트 복사물을 주면서 좀 읽어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친절을 베푼 여학생(여 선생님) 한 명을 나중에 남한산성 동기회 때 만나게 되었는데 이런저런 시간 중에는 일부러 그러지 않았는데도 둘이서 걸을 수 있는 시간도 있.. 2023. 4. 30.
한탄 혹은 탄식 웃고 말면 그만이고 '저러는구나' 하면 섭섭할 일 없긴 하지만 아내로부터 듣는 원망은 끝이 없다. 그중 한 가지는 뭘 그리 중얼거리느냐는 지적이다. 이젠 그게 못이 박혀서 혼자 있는 시간에도 나도 몰래 중얼거려 놓고는 바로 후회를 하곤 하니까 반성조차 하지 않던 때에 비하면 그나마 발전한 건 분명하다. '발전'이라고 표현했으니 말이지만 사실은 '그래, 중얼거리는 것도 버릇이지. 좀 점잖게 살자' 다짐한 것이 여러 번이어서 그럴 때마다 '오늘 이후에는 결코 이런 일이 없으리라!' 결심하면서 '그러니까 오늘이 이 결심의 출발선이다!' 하고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는데, 나도 몰래 그렇게 한탄(혹은 탄식)하고는 또 새로운 결심을 하면서 그 순간을 '출발선'으로 삼은 것도 수십 차례였으니 나는 정말이지 어쩔 수 없.. 2023. 4. 26.
이곳에 오면 이를 데 없이 적막하다. 그 적막을 참고, 지난날들을 그리워한다. 그 시간이 좋다. 이제 다 괜찮아지고 있다. 2023. 4.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