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세상1142 "난 맛있는 건 나부터 먹어" 멋진 레스토랑 분위기의 식탁에 호텔에서나 보던 스테이크가 놓여 있다. 그 여배우가 스스로 차린 음식이다. 일흔이 넘었다는데도 아직 참 고운 그녀가 아름다운 옷을 입고 자리에 앉아 포크와 나이프를 집는다. "난 말이야, 맛있는 것은 나부터 먹어. 자식들만 챙겨주면 엄마는 이런 건 싫어하거나 못 먹는 줄 안다니까?" 그녀가 한 말은 꼭 이렇게는 아니었겠지만 아마도 비슷하긴 했을 것이다. 어쨌든 이보다 훨씬 더 자극적이었을 것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그녀가 아주 미웠다. 아니, 그녀를 사정없이 미워하기로 했다. 지금까지 자식을 위해 헌신한, 헌신까진 아니라 해도 맛있는 것 먹으면 가족들부터(가족들을 잠깐이라도) 생각한 사람은 허탈해하지 않았을까? 난 지금까지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아온 거지? 이제 와서 .. 2023. 8. 7. 세월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텔레비전에서 오십 대 중반의 연예인들을 보며 살아갑니다. 그들 중 단 한 명도 나를 모르지만, 나는 자주 그들을 의식하며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느낌일 때도 있습니다. 어제는 더 젊은 연예인들이 그들 오십 대 앞에서 조심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문득 저 오십 대 중반 연예인들은 활발하게 활동하는 지금을 시작이라고 여길 수도 있지만 그렇게 여기고 싶어 할 수도 있지만 곧, 시간이 너무 빠르게 흐른다는 걸 느끼게 되고 내일, 그새 시간이 이렇게나 흘러갔구나, 뒤돌아보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세월은 일흔에도 자식을 가져 세상을 놀라게 하는 한둘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여든아흔에도 열정으로 살아가는 몇몇 유능한 사람들을 위한 것도 아닐 것입니다. 세월은 성근 체에 담긴 고운 모래처럼 혹은 결국 긴 시간을.. 2023. 8. 3. 꽃이 진 자리 한때 파란 꽃이 더 많던 자리에 흰 꽃이 늘어나 주종(主種)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돌보지 않았던 저곳의 저 꽃들은 이미 세상에 없습니다. 이것도 저것도 다 저버린 곳에 지금은 다른 종류의 풀들이 자라고 있습니다. 가을 끝 무렵 그 풀들도 시름시름 앓다가 가버리고 다시 두어 가지 풀들이 새로 자리를 잡아 겨우내 근근이 혹은 꿋꿋하게 살아갈 것입니다. 저 꽃들을 들여다보던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 시간에 저 꽃들 중 어느 하나가 나에게 긴 세월에 비하면 남은 시간은 그리 길진 않다고 거의 다 지나갔다고 이야기해주려고 했었을지도 모릅니다. 2023. 8. 1.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에너지 늙는다는 건 무엇일까? 다시 직장을 구하거나 돈을 한 번 더 벌어보거나 다시 사람을 만나거나... 무엇을 새로 시작하거나 할 기회나 에너지가 소멸된다는 것이겠지? 그런 사람에게 뭘 달라고,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건 염치가 없고 도리가 아니고 예의가 아니고 있을 수 없는 일 아닌가? 전제가 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새로 시작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스스로 포기하거나 하는 사람은 게으르다느니 어떻다느니, 의례적인 헛소리를 하는 인간과는 일단 대화를 거부하고 싶다. 소설《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에서 본 장면이다. # 1 나를 바라보는 모리츠의 눈은 충혈되어 있었다. "너를 보내고 싶지 않구나, 스밀라." 모든 인생은 정화를 일으킬 수 있는 잠재력을 포함하고 있다. 모리츠는 그 기회를 잃어버렸다. 지금 의자에 .. 2023. 7. 30. 수학의 기초, 숫자 체계 어떤 소설가들은 작품 줄거리 속에 자신의 견해를 슬쩍 집어넣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 그 견해를 집어넣지 않아도 이야기 전개에 지장이 없을 듯한 '삽화'라고 할 수 있다. '입담'이 좋은 걸 보여주려는 경우도 많지만, 평소 생각하던 것을 적당한 곳에 집어넣은 경우 아주 값진 것이어서 '야, 이것 봐!' 싶은 경우도 있지만 그런 것이 발견될 때마다 '또...' 하고 지루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어쨌든 집어넣은 표가 나지 않으면 좋겠는데 '이건 너무 작위적이잖아!' 싶기 일쑤이다. 그러려면 차라리 그런 걸 따로 모아서 산문집을 한 권 내든지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오늘은 원고량을 늘이기 위해 쓸데없는 이야기를 오래 한 걸 발견하고 아예 그 소설 읽기를 포기하고 말았다. 소설《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패터 회.. 2023. 7. 18. 살아가는 방법의 차이 어느 학자가 자문 한 건으로 이십 억 원 가까이 받았더라는 뉴스를 봤다. 신고의 당위성에 대해서는 나는 모른다. 유능한 경우, 고위 공직 임명 문제만 아니라면 그럴 수도 있는 건 사실인 것 같다. 교수도 교수 나름이어서 거기에 비하면 '껌값' 정도를 더 벌려고 발버둥 치는 경우도 있을 것 같고, 이 사례처럼 '어마어마하게' 살아가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 허구한 그날들, 훈장을 주겠다고 해도 그걸 받는 데 필요한 공적조서 쓸 시간조차 없었던 내게는(그 제안을 한 상급자 L 씨는 내 대답을 듣고 한마디로 "에이~" 했지만 내심 좋아했을 것이다. 장관(혹은 차관)에게는 본인이 싫다고 하더라고 하면 그만이고 흔쾌히 받고 고마워할 사람은 수두룩했기 때문이다), 흔히 야간에 대학원을 나가 학위를 받는 사례를 보면.. 2023. 7. 15. 이제 그만 자연 앞에 항복하자! 지구 나이를 46m의 길이에 비유한다면(46m면 아파트 17층쯤 되네?) 인간이 나타나 살아온 시간은 겨우 1mm쯤이란다. 어느 책에서 봤다. 그새, 그 짧은 시간에 인간들은 지구를 거의 다 망가뜨려놓고는(그런 주제에 비둘기는 해조害鳥고 뭐는 더럽고 뭐는 또 어떻고...) 이 너른 우주에 지구 비슷한 데가 없진 않을 것이라는 기대로 두리번거리고 있다(거기 가봤자 멋지게 개발한다며 망가뜨리는 건 순식간일 것이다, 뻔하다). 하루하루 조급해지니까 지금까지 알아낸 별 중에서는 그나마 화성에서 살아볼 궁리를 하는 게 좋겠다는 얘기도 한다. 어쨌든 지구에서 그냥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의견도 많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다른 별로 이사를 갈 생각 하지 말고(우주복 입고 하룬들 어떻게 살겠나...) 지금 당장 자.. 2023. 7. 13. 몸이 불편한 날 마음이 불편한 날 면역력이 바닥으로 떨어지니까 몸의 실체가 실없다는 것이 드러났다. 여기가 탈이 나서 조정하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저기가 불거진다. 불편해할 순서를 정해놓았는데 정작 당사자인 나 자신은 모르고 있는 것 같다. 두더지 게임기 같다고 자신을 비웃는다. 이 사정을 아는 사람이 없으니까 단 한 사람에게만 미안하다. 표를 내지 않으면 좋겠는데 숨 쉬는 것까지 파악하고 있으니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어떤 달에는 미리 정해진 일정만 해도 일주일에 이틀씩 병원행(行)이다. 생각해 보면 아무것도 모를 땐 학교에 다녔고, 그다음의 아주 조금 알 만한 시기엔 직장에 다녔고, 퇴임해서는 병원에 다니고 있다. 마음이 불편하면 순간 몸도 가라앉는다. 설명할 필요가 없다. 그런 상황은 점점 잦아지고 있다. 떨쳐버려야지, 일어나야.. 2023. 7. 6. 개망초 향기 "요즘도 많이 바쁘죠?" 그렇게 물으면 되겠지, 생각하며 며칠을 지냈다. 누구에게든 이쪽에서 먼저 전화를 하는 게 점점 어려워지더니 이젠 거의 불가능한 일이 되고 있다. 그러던 차에 전화가 왔네? 생각나는 대로 이야기하면 수다가 된다는 걸 염두에 두며 대체로 묻는 것에만 대답했다. 너무 서둘러 끊었나? 섭섭해할까 싶어서 개망초 사진을 보내주었다. 답이 없다. ... 바쁘긴 바쁜가 보다. 밤 9시 24분, 잊고 있었는데 답이 왔다. 다섯 시간 만이었다. 저쪽 : 꿀 냄새만 나는 게 아닌걸요~ 개 망할 풀 왜 이리 이뻐요!? 나 : 밭 임자가 의사인데 많이 바쁘겠지요, 지난해 심은 대추나무가 다 죽어 그 혼이 개망초꽃으로 피어나서 그래요 ^^ 저쪽 : 선생님, 눈물 나려고 해요 ㅠㅠ 나 : 아! 이런!!! .. 2023. 7. 4. "당신의 내일을 뜨겁게 응원합니다" 늦은 밤에도 새벽에도 우리 아파트 인도에는 저 고마운 인사가 보입니다. 그런 시간에 저 길을 걸어 올라갈 일이 없어서 한동안 '뭐지?' 하고 내려다보기만 했습니다. 처음 발견한 날은 오랫동안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한 중년 여성이 밟지 않고 지나가더니 뒤돌아서서 한참 동안 살펴보고 있었습니다. 낮에 일부러 저 보안등 옆에 가서 살펴봤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나에게도 늦은 밤이나 새벽에 귀가하는 날이 숱했습니다. 그때는 그게 죽을 지경일 뿐이었고 지금은 한 명도 기억해주지 않는 날들이어서 어쩔 수 없이 혼자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저 위 사진의 글은 이렇습니다. "당신의 내일을 뜨겁게 응원합니다." 2023. 6. 23. 개망초 퍼레이드 저 작은 공원 소나무숲 이쪽 언덕은 개망초 동산이 되었다. 여름 가을도 좋고 쓸쓸한 겨울도 좋지만 요즘은 또 저렇게 들꽃 퍼레이드가 펼쳐져서 좋다 일주일에 두세 번 아침나절에 저곳을 다녀온다. 2킬로미터쯤? 올 때는 발이 무거워 걷다가 쉬다가 하며 겨우 돌아온다. 하필이면 왜 망초야, 개망초야. 계란꽃이라는 사람도 좀 있으니까 개망초보단 계란꽃 혹은 달걀꽃이 낫지 않을까? 하기야 어떤 소설가는 개망초꽃밭에서 만나고 헤어지는 애틋한 사랑을 그리긴 했지. 더구나 요즘 사람들은 개좋다, 개맛있다, 개사랑한다... 어쨌든 '개판 5분 전'이라고 할 때의 그 '개'를 좋은, 아름다운, 고마운, 사랑스러운 같은 의미로 바꾸어 놓았으니 개망초도 저절로 무방한 이름이 되어 버렸을까? 저런 꽃밭은 개인은 만들 수 없다... 2023. 6. 20. 내 친구 연우 연우(連雨)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사라진 지 20년은 되었습니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셨다고들 했습니다. 연우는 대학 다닐 때 시를 썼습니다. 학보사 주최 문예행사에서 장원을 했습니다. 나는 소설을 냈는데 소설을 낸 학생은 나뿐이었습니다. 연우나 나나 이 년째 거듭 수상을 했습니다. 나는 대안극장 바로 뒷골목 오른쪽 셋째 집이었던가, 괄괄하고 털털한 할머니가 운영하는 하숙집에 거처를 정해놓고 하루 한두 끼 밥을 먹고 잠을 잤는데 어느 날 누군가 연우와 함께 지내면 좋지 않겠느냐고 해서 그렇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다른 방 학생들과 달리 도무지 일어날 기색이 없으면 할머니는 다짜고짜 문을 열어 붙이고 들어와서 이불을 마루로 내던지며 "밥이나 먹고 또 자든지 하라!"며 고함을 지르곤 했는데 나는 .. 2023. 6. 16. 이전 1 ··· 12 13 14 15 16 17 18 ··· 96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