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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노년일기302

분꽃 기억 누나네는 우리 동네에 살았습니다. 누나들은 나이가 차면 한 명씩 한 명씩 차례대로 떠났습니다. 건넌방에서 혼자 지내면서 완전히 예뻐지면 마침내 마당에 동네 사람들이 다 모여 잔치를 벌였습니다. 그렇게 하여 그 누나가 사라지면 다시 그 아래 누나가 그 방에 들어갔고, 그렇게 두어 해 지내다가 떠나고 또 떠나고 했습니다. 누나들이 떠난 한적하고 썰렁한 방의 설합 속에는 늘 가루분이 흩어져 있었습니다. 나는 그 가루분이 분꽃 가루 같았고 그건 심각하게 따져볼 일도 아니었기 때문에 내내 그렇게 짐작하고 있었는데, 어제 어느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나오다가 마당 가의 분꽃 무더기를 보는 순간 누나들은 분꽃 가루로 분을 바른 건 아니라는 걸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 누나들은 나를 좋아하진 않았던 것 같습니다. 2017. 9. 14.
K노인의 경우 K노인의 경우 K 노인의 경우를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사람의 일은 자신의 것도 잘 알 수 없긴 하지만 그에게 일어난 일이라면 잊은 것은 있다 하더라도 이쪽에서도 몰랐던 것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수십 년을 함께한 친구입니다. "뗄래야 뗄 수 없는"이라는 말은 이럴 때 적절.. 2017. 8. 27.
"이제 겨울이죠 뭐!" "이제 겨울이죠, 뭐!" 그 개인택시 기사는 느직하게 나가고 일찌감치 들어옵니다. 택시를 취미 삼아 하는 사람 같고, 걸음걸이도 한 걸음 한 걸음 의식적으로 내딛는 것 같습니다. 그는 어엿한 '직장인'이지만 피차 할 일도 없이 지내는 사람들처럼 우리는 초저녁에 샤워장이나 탈의실에서.. 2017. 8. 23.
70대의 시간 1 "(…) 여기 주위에서 보는 미국 노인들에게서, 노인이라고 내세우는 것 같은 유난스러움을 느낀 적이 없었다. 유난스러웠다면 오히려 대하기의 편안함이 그랬다. 그래선지 젊은이들은 노인들에게 기분 좋아질 정도로 깍듯한 것 같다. 나이 들면서 언제부턴가 느릿느릿 걸어야 하면 그냥 그렇게 걸으면 되는 것뿐이다. 마치 다 산 것처럼 행세하는 노인도 못 봤다. 일을 계속하고 싶고 그럴 수 있으면 그렇게 하고, 그냥 쉬고 싶으면 쉬고, 자원봉사도 하고들 그런다. (…)" 《Denver Post》(2017.6.26)의 기사 "Colorado postman’s 60-year tenure on a long, rural route filled with wonder"를 소개한 블로그 《삶의 재미》의 글을 읽었다.(☞ ht.. 2017. 6. 29.
이 시간 나를 멀리 떠나는 생각들 뒤로 더러 앞으로 빛살처럼 가버리는 것들 2017. 5. 18.
「이 봄날」 2017.4.7. 이 봄날 산수유 매화 목련 벚꽃 민들레 노랗거나 하얗고 잔잔한, 이름을 알 수 없는 그것들도 함께 아파트 정원이면 어떠냐는 듯 일제히 피어나는 아침 추억 같은 이 봄날 되풀이되는 걸 보는 일은 얼마나 행복한가요 좀 보라고 행복한 하루가 아니냐고 묻고 싶어요 살아 있다면 .. 2017. 4. 21.
"건강하시죠?" "아, 예! 지난겨울보다는 더 쓸쓸해졌지만요……." 그런 인사를 처음 듣게 되었을 때는 그가 내 건강을 진정으로 혹은 깊이 염려해주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아, 물론 그런 이가 없다고 볼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건강하시죠?" 전화를 하면 흔히 그렇게 묻습니다. 새삼스럽게 들리긴 하지만 의례적으로 묻는 것입니다. 어떤 대답을 할지에 대한 계획이 순간적이지만 복잡하게 얽힙니다. 이 사람과 할 말이 많거나 간단하지 않다 싶으면 "예" 해버리면 그만입니다. 얼른 본론을 얘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할 말이 별로 없을 듯한 안부 전화(!)일 때도 "예!" 해버려서는 난처할 것입니다. 피차 그다음에 할 말을 특별히 마련해두지 않은 상태가 뻔하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나는 "예. 그저 그렇습니다" 하거나 "예, 별로 좋진 않지만 그럭저럭 지냅니다" "예, 뭐 .. 2017. 4. 11.
그대와 나 ⑶ 나에게 평생 쩔쩔맨 그대는, 내가 사람들 때문에 지쳐 쓰러질 것 같은 날 "드디어 사람이 좋다"고 했다. 2017. 4. 4.
그대와 나 ⑵ 그대와 나 ⑵ 나는 실바람만 불어도 꺼지고 말 가녀린 촛불 같은, 소홀하게 만지면 바스러져 버릴 존재이고, 그대는 당연히 철판 같은 것으로 조립된 인조인간쯤으로 생각하며 살았다. 그렇게 여긴 세월이 너무 오래여서 나는 그대의 생각 같은 건 물을 수도 없게 되었다. 2017.2.23. 2017. 3. 30.
그대와 나 그대와 나 그 손이 차가울 때 나는 본래 그런 줄 알았다. 그렇게 알고 지냈는데 뜨거워져 있다. 오십 년이 되어가니 이걸 안 것은 너무도 오랜만이다. 그렇다고 뜨거워지다니……. 차가워야 하는 건지, 뜨거워야 하는 건지도 모르는 일이다. 되돌릴 수도 없다.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졌다. .. 2017. 2. 19.
돌아가는 길에 만난 아내 1 평생 강의를 하며 지내지 않았겠습니까? 선생이었으니까요. 교육부 근무도 오래 했으니까 그동안 교원들을 대상으로 한 강의만 해도 거짓말 보태지 않고 수백 번은 했습니다. 그 이력으로 학위도 없으면서 어느 SKY 대학 박사과정 강의도 해보았습니다. 그렇지만 이제 퇴임한지도 오래되어 강의할 데가 없어졌는데 그 '후유증'(?)으로 가만히 있을 수가 없게 된 것인지 아침저녁으로 아내를 '앉혀놓고'(? 앉으라고 해서 앉은 건 아니지만) 강의를 했습니다. 강의? 이 표현이 적절할지……. 어쨌든 이젠 상대해주는 사람이 없으니 긍정적인 것이든 부정적인 것이든 이야기를 할 대상이 그 한 명 외에는 전혀 없게 된 것입니다. 2 말하자면 나에게 남은 마지막 청중은 딱 그 한 명뿐인데, 내 강의에 이렇게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2016. 11. 10.
가을구름 나를 두고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도무지 어떻게 할 수가 없는 나날들이 나를 두고 나를 빤히 쳐다보며 지나가버리네. 2016. 9.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