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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파란편지174

「스노볼」 스노볼 강성은 엄마 눈이 내려요 자꾸자꾸 내려요 매일매일 내려요 눈 쌓인 소나무 가지 위에 까마귀가 나무 아래 호랑나비와 장난 치는 고양이가 그대로 멈춰 있어요 누가 이곳에 온다면 차를 대접할 텐데 아무도 오지 않고 가끔 누가 우릴 엿보는 것 같아요 흰 눈 덮인 마을에 불을 지를까요 마을이 다 타버리기 전에 누가 달려와 불을 꺼줄지도 몰라요 겨울은 생각이 많은 시간이에요 생각이 저 눈을 내리게 해요 생각이 우릴 눈 속에 가두었어요 생각을 멈춰야 하는데 아무도 우릴 만나지 못할 거예요 여긴 어떤 슬픈 사람의 마음속인가요 ―――――――――――――――――――――――― 강성은 1973년 경북 의성 출생. 2005년 『문학동네』 등단. 시집 『구두를 신고 잠이 들었다』『단지 조금 이상한』. 아이들이 저승에 가서도.. 2020. 6. 11.
어떤 여성일까? 45초간 수많은 사람과 건물 들이 땅속으로 사라진, 오르한 파묵의 이스탄불 지진 이야기에서 다음과 같은 문장을 보았다. "삶의 가장 은밀하고 잔인한 규칙이, 벽이 붕괴되고 넘어져 내부가 보이는 집 안에 있는 물건들처럼 드러났던 것이다." ‘삶의 가장 은밀하고 잔인한 규칙’이란 어떤 것일까? 그러한 드러남은 짧고 강렬한 지진의 경우에 더 심한 것일까, 아니면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강력한 힘으로 전 세계를 짓눌러 미증유의 변화를 강제하고 있는 코로나 19와 같은 현상에서 더 심한 것일까? 코로나 19 바이러스는 그 모습을 보여주지도 않고 내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현실적인 두려움이 되고 있다. 백신은 아무리 조급해도 절차에 따라 개발된다는 뉴스를 보며 초조해지고, 시인들은 시(詩)는 백신 .. 2020. 6. 9.
《다른 색들》Ⅰ 오르한 파묵의 에세이 오르한 파묵 《다른 색들》 이난아 옮김, 민음사 2018 일요일 아침에 출근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겠지. 자전거 위에서 둑 아래로 흐르는 가을 시냇물을 내려다보며 내 소식을 기다리고 있는 가난한 서정시인 생각을 했고 무슨 다짐도 했었다. 오십 년..... 충분한 세월이 흘렀다.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 열차는 당연한 것처럼 지금도 다니겠지? 그만 타겠다고 얘기하진 않았다. 그 말을 했어야 할까? 고속도로는 막히겠지? 그것도 확인해야 할까? 나는 무관심했다. 다가온 일들은 지나가면서 계약이나 했던 것처럼 세월도 데리고 갔다. 너무 멀리 너무 오래 너무 많이 잊어버렸다. 다짐, 길, 사람들, 일들…… 정리되지 않은 것들뿐이다. 멀리 와서 오래되어서 생각만으로도 지친다. 오르한 파묵의 에세이가 더 그렇게 .. 2020. 6. 7.
「제망매가」 「제망매가」는 어느 한 부분이라도 잘못 이야기하면 혹 누이동생들에게 재수 없는 일이나 벌어지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렇지만 정말로 '생사의 길'이 재수에 달린 것일까. 내 마음은 최근 몇 년 사이에 마지막 고개를 넘은 느낌이었다. 얽히고설키어 살던 사람이 유명을 달리하니까 당장 하얗게 잊혔고 함께하던 시간들 중 몇 가지가 쓸쓸한 날에만 두어 장 사진처럼 떠오를 뿐이었다. H 씨는 가난한 초등교사였다가 공부를 더 하고 노력해서 저명한 교수가 되었고 매우 넓은 토지도 소유했으나 그만 암에 걸리고 말았다. 죽기 직전 몇 번이나 찾아와서 함께 시간을 보내곤 했는데, 그때마다 괜히 애를 썼다고 후회했다. 그러면서도 약값이 많이 든다고 가슴 아파했고, 돌아갈 때 작은 물건이라도 손에 쥐어주면 그걸 그렇게 고마워했.. 2020. 6. 5.
쓸데없는 기억 내 왼쪽 발등 바깥쪽 부분에는 대여섯 살 적의 한겨울, 꽁꽁 얼어붙은 논두렁에서 스케이트를 타다가 나보다 네 살이 더 많은 동네 형의 송곳에 찔려서 생긴 상처가 겨울 내내 아물지 않아서 생긴 검붉은 상처의 흔적이 남아 있다. 나는 살아오면서 그에게 단 한 번도 그 얘기를 꺼내지 않았는데 얼마 전에 그가 유명을 달리했다. 그는 나쁜 인간이 아니었고, 게다가 공교롭게도 나의 사촌 누나 한 명과 결혼까지 한 것이었다. 나는 나의 이 상처의 흔적에 대해 아무에게도 이야기한 적이 없고 마침내 이젠 이야기를 할 수도 없게 되었다. 그가 영영 죽어버렸기 때문에 이젠 그 흔적을 보여주며 얘기한다 해도 믿어줄 사람이 없게 된 것이다. 써먹을 수도 없는, 쓸데없는 기억이 된 것이다. 인공지능은 이미 저승으로 간 사람이 생.. 2020. 6. 2.
스티브 로페즈 《솔로이스트》 스티브 로페즈 《솔로이스트 The soloist》 박산호 옮김, 랜덤하우스코리아 2009 신문기자 스티브 로페즈가 혼잡한 거리 모퉁이의 베토벤 조각상 옆에서 쓰레기통을 뒤져 끄집어낸 듯한 낡은 바이올린으로 베토벤의 작품을 연주하는 흑인을 보았습니다. "소리가 근사한데요." "아, 고맙습니다." "농담 아니죠?" "난 음악가는 아니지만, 그래요, 정말 근사했어요." 그의 전 재산을 산더미처럼 실은 쇼핑카트 옆에서 그 흑인은 때가 꼬질꼬질한 옷을 입고 있었지만 그에게선 기품이 느껴졌습니다. 나다니엘 안소니 아이어스, 50세쯤의 그 흑인은 정신분열증 환자였고, 스키드 로 근처에서 가장 큰 빈민 구제 시설인 미드나이트 미션에 있다고 했지만 잠은 거리에서 자는 노숙자였습니다. 더구나 줄이 두 개밖에 없는 바이올린.. 2020. 5. 31.
2020 봄 저기 새로 돋은 나뭇잎들 좀 봐! 벌써 저렇게 활짝 폈네. 이제 어쩔 수 없지. 저걸 무슨 수로 막아. 그냥 두는 수밖에…… 2020. 4. 29.
나를 서럽게 하는 '코로나 19' 밖에 나가는 것이 '특별한 일'이 되었습니다. 엘리베이터 앞에 앙증맞은 여자애와 아름다운 '엄마'가 서 있었는데 내가 나타나자 엄마가 아이를 저쪽으로 감추었습니다. 그들이 올라가고 난 다음에 따로 탈까 하다가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겠나' 싶어서 뒤따라 타버렸습니다. 유치원생 아니면 초등학교 1학년쯤으로 보이는 그 여자애가 잠시를 참지 못하고 몸을 흔들어대다가 내가 있는 쪽으로 기우뚱하자 몇 번 주의를 주던 엄마가 그만 사정없이 '홱!' 잡아챘습니다. 내가 서 있는 쪽의 반대쪽으로 낚아챘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할 것이었습니다. 전철 노약자석에 앉았다가 노숙자 냄새 때문에 일어선 일이 있었습니다. 그 노숙자가 생각났습니다. 그 엄마가 밉지는 않았습니다. 텔레비전 화면에 비친 코로나 바이러스 사진(그림)은 .. 2020. 2. 27.
《목로주점 1》 에밀 졸라 《목로주점 1》 박명숙 옮김, 문학동네 2018 1 세탁부 제르베즈는 괴물 같은 모자 제조업자(말로만) 랑티에와 동거하면서 겨우 열네 살 때 클로드를 낳고 열여덟 살 때 에티엔을 낳았습니다. 그녀는 성장기에도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알코올 중독자인 아버지 마카르는 걸핏하면 발길질을 해댔습니다. 그녀는 "아름답고 용기 있는 여성"이었고 언젠가 그녀가 어려움에 처한다면 그녀는 자신을 믿어도 좋을 여자였습니다. 정부 랑티에는 그런 제르베즈의 속옷까지 전당포에 잡혀놓고 창녀 아델의 품으로 달려갑니다. 2 그녀에게 함석공 쿠포가 접근합니다. 말쑥한 외모에 새하얀 이를 드러내고 활짝 웃는 모습이 매력적인 남자였습니다. 낙천적인 성격의 그는 미래를 걱정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그 쿠포가 제르베즈의 옅은 장밋빛.. 2019. 7. 17.
함께 날기와 날려주기 출처 《샤갈 Chagall》(2010.12.3~2011.3.27. 서울시립미술관). 누구나 한때 함께 나는 것일까. 누구나 한때 날려주는 것일까. 어떤 이는 샤갈처럼 자주 함께 날고 자주 날려주며 살아가는 것일까. 왜 그런 것일까. 2019. 5. 7.
베르나르 베르베르 《상상력 사전》 베르나르 베르베르 《상상력 사전》 이세욱·임호경 옮김, 열린책들 2011 1 세상의 온갖 일들 중에서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상력을 자극했구나 싶은 383가지 이야기가 실린 '사전'입니다. 놀랍고 신기한 신화, 역사, 과학, 종교, 철학, 게임……. 이런 것들을 모른 채 살아간다고 해서 큰일 날 일은 전혀 없겠지만, '다음엔 뭐지?' 호기심, 궁금증이 읽는 속도를 재촉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차례로 읽었습니다. 사전(事典)을 소설 읽듯 그렇게 통독하나? 싶을 수도 있지만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은 몇 가지 되지 않고 대부분 호기심을 갖게 하는 것들이어서 이 작가의 '손바닥(掌篇) 소설'을 읽는 것 같았습니다. 작가는 이 383가지 항목들을 주제로 한 소설을 쓰려고 작정했는데, 더구나 실제로 하루에 한 편을 .. 2018. 2. 6.
「이것이 나의 저녁이라면」 이것이 나의 저녁이라면 김 행 숙 신발장의 모든 구두를 꺼내 등잔처럼 강물에 띄우겠습니다 물에 젖어 세상에서 가장 무거워진 구두를 위해 슬피 울겠습니다 그리고 나는 신발이 없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나는 국가도 없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이것이 나의 저녁이라면 그 곁에서 밤이 슬금슬금 기어나오고 있습니다 기억의 국정화가 선고되었습니다 책들이 불타는 밤입니다 말들이 파도처럼 부서지고 긁어모은 낙엽처럼 한꺼번에 불타오르는 밤, 뜨거운 악몽처럼 이것이 나의 밤이라면 저 멀리서 아침이 오고 있습니다 드디어 아침 햇빛이 내 눈을 찌르는 순간에 검은 보석같이 문맹자가 되겠습니다 사로잡히지 않는 눈빛이 되겠습니다 의무가 없어진 사람이 되겠습니다 오직 이것만이 나의 아침이라면 더 깊어지는 악몽처럼 구두가 물에 가라앉고 있습니.. 2017. 5.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