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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베르나르 베르베르 《상상력 사전》

by 답설재 2018. 2. 6.

베르나르 베르베르 《상상력 사전》

이세욱·임호경 옮김, 열린책들 2011

 

 

 

 

 

 

 

 

1

 

세상의 온갖 일들 중에서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상력을 자극했구나 싶은 383가지 이야기가 실린 '사전'입니다. 놀랍고 신기한 신화, 역사, 과학, 종교, 철학, 게임…….

이런 것들을 모른 채 살아간다고 해서 큰일 날 일은 전혀 없겠지만, '다음엔 뭐지?' 호기심, 궁금증이 읽는 속도를 재촉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차례로 읽었습니다. 사전(事典)을 소설 읽듯 그렇게 통독하나? 싶을 수도 있지만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은 몇 가지 되지 않고 대부분 호기심을 갖게 하는 것들이어서 이 작가의 '손바닥(掌篇) 소설'을 읽는 것 같았습니다. 작가는 이 383가지 항목들을 주제로 한 소설을 쓰려고 작정했는데, 더구나 실제로 하루에 한 편을 쓰는 경우가 없진 않지만, 그렇다 해도 383편의 소설을 써내는 건 계산상 불가능한 일이어서 이러한 일들이 소설가인 자신의 상상력을 자극했다는 의미로 "상상력 사전"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목록화해 놓았을 것 같았습니다.

 

 

2

 

소설처럼 읽었다고 했지만 사전은 사전이어서 한두 문장인 것부터 네 페이지 짜리까지 다양했습니다.

짤막한 것들의 예를 들면 이런 것이었습니다.

 

네 적을 사랑하라. 그것이 네 적의 신경을 거스르는 가장 훌륭한 방법이다.(적을 사랑하라, 363)

 

장미 한 송이가 제가 지닌 향기를 다 표출하는 데에는 12시간이 필요하다.(향기, 570)

 

 

3

 

좀 엉뚱한 얘기겠지만 이 작가의 책을 딱 한 권만 소장하라고 하면 서슴지 않고 이 책으로 정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가령 이런 것들은 언젠가 다시 찾아보고 싶을 것이었습니다.

 

벼룩 몇 마리를 빈 어항에 넣는다. 어항의 운두는 벼룩들이 충분히 뛰어넘을 수 있는 높이다.

그다음에는 어항의 아가리를 막기 위해서 유리판을 올려놓는다.

벼룩들은 톡톡 튀어 올라 유리판에 부딪친다. 그러다가 자꾸 부딪쳐서 아프니까 유리판 바로 밑까지만 올라가도록 도약을 조절한다. 한 시간쯤 지나면 단 한 마리의 벼룩도 유리판에 부딪치지 않는다. 모두가 천장에 닿을락 말락 하는 높이까지만 튀어 오르는 것이다.

그러고 나면 유리판을 치워도 벼룩들은 마치 어항이 여전히 막혀 있기라도 한 것처럼 계속 제한된 높이로 튀어 오른다.(벼룩의 자기 제한, 108)

 

지능 검사는 그 검사를 만든 사람들의 정신과 동일한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머리가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입증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지능 검사, 602)

 

대부분의 교육은 패배를 관리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데에 목표를 두고 있다.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대학 입시에서 떨어지면 나중에 일자리를 찾기 어려워질 거라고 가르친다. 가정에서는 대부분의 결혼이 이혼으로 끝나고 대다수 삶의 동반자들이 실망을 안겨 주는 현실에 자녀들을 적응시키려고 애쓴다. (…)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막상 승리가 닥쳐오면 사람들은 지표를 잃고 갈팡질팡하면서, 대개는 익히 알고 있는 〈정상 상태〉로 돌아가기 위해 서둘러 패배를 준비하기 십상이다.(609)

 

 

4

 

383가지 일에 대한 흥미나 호기심 같은 걸 척도로 해서 점수(가령 5점 척도, ABCDE 같은 것)를 매겨가며 읽을 수도 있겠는데 너무 주관적이어서 남들이 보면 무의미하겠다 싶고, 혹 저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자신이 목록화해 놓은 일들에 대해 일일이 점수화해 놓은 이 블로그를 보게 되면 즉각 이의제기를 해서 괜히 국제적인 말썽이 생길 것 같았습니다. 좋은 점수를 주면 되지 않겠느냐고 한다면 우스개처럼 떠도는 이상한 대학원 학생들 성적표처럼 B, C, D, E는 없고 A, A, A 혹은 A, A⁺, A⁺⁺가 줄을 잇는 꼴이 연출될 것 같아서 다 그만두고 말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