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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김원길19

"목목문왕(穆穆文王)이여" 음담패설을 유난히 밝히는 사람이 있다. 사람들이 좋아한다고 여겨서 무모하게, 서슴없이 해버리기도 한다. 모처럼 남녀 동기회 모임에 나간 적이 있다. 퇴임들을 했기 때문에 참석자가 많았다. 1박 2일간의 프로그램을 끝내고 점심식사도 거의 끝나서 곧 헤어질 시간이었고, 다음에는 또 언제 이 얼굴들을 볼 수 있을지 숙연하여 할 말을 찾지 못하는 분위기였는데 학교 다닐 땐 말도 없이 겨우 얼굴을 들고 다니던 사람이 큰 소리로 음담패설을 해버렸다. 모두들 껄껄 웃었고 여성들도 그렇게 웃거나 두어 명은 소리없는 미소를 지었다. 개그나 해학이 아니었다. 저속하기 짝이 없어서 이후 그 음담패설이 뇌리 속에서 지워지지 않았고, 40여 년 만에 처음 만났지만 아마 교직생활을 하는 내내 그의 행동은 저속했을 것이라는 짐작을.. 2024. 2. 25.
어떤 유언 가난에다 흉년마저 겹쳐 마당쇠를 내보낸 늙은 선비가 손수 땔감을 구하러 톱을 들고 나무에 기어올랐다. 글만 읽고 나무라곤 해보지 않은 이 선비, 욕심은 있어서 굵은 나뭇가지를 골라 베는데 걸터앉은 가지의 안쪽을 설겅설겅 톱질한 것이다. 떨어질밖에. 허리를 심하게 다쳤다. 돈이 없어서 의원도 못 부른 채 저절로 낫기만 기다리다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말았다. 머리맡에 둘러앉아 임종을 지켜보던 자서제질(子胥弟姪)에게 엄숙하게 입을 열었다. "너희들은 내 말을 명심, 또 명심해야 하느니라. 혹여 나무를 베더라도 제 앉은 가질랑은 절대로 베어선 안 되느니라. 알아들었느냐?" [출처 : 지례마을] 군소리 고금에 유언치고 이보다 더 교훈적인 것도 드물 줄 안다. 세상 살며 제일 조심하고 삼갈 것이 바로 '제 앉은 가.. 2024. 2. 22.
"자네 말이 참말인가?" 김원길 시인의 책《안동의 해학》에서 「자네 말이 참말인가?」라는 글을 읽고 옛 생각이 나서 한참 앉아 있었다. 지나고 나니까 참 좋은 날들이었다. 구봉이가 나이 마흔이 넘도록 장가를 못 간 것은 꼭히 얼굴의 곰보 자국 때문이라고만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짚신도 짝이 있다고 드디어 동갑 또래 노처녀에게 장가를 가게 된 것이다. 그런데 친구들과 어울려 놀길 좋아하던 구봉이가 장가를 가고부터는 사람이 아주 달라진 것이다. 전엔 제일 늦게까지 술자리를 못 떴는데 요즘은 술도 끊고 화투를 치다 말고는 슬그머니 사라지거나 아예 초저녁부터 나타나지 않을 때가 많았다. 어느 날 짓궂은 명출이가 화투장을 돌리면서 슬쩍 말했다. "오늘 장터에 갔다가 들었는데 예안 주재소 순사가 여자하고 너무 붙어 지내는 사람은 일일이 .. 2024. 1. 31.
김원길 편저 《안동의 해학》 김원길 편저 《안동의 해학》 지례예술촌 2012 해와 달 선비 한 사람이 해질녘에 어느 시골 동네 앞을 지나게 되었는데 떠꺼머리총각 둘이 신작로 복판에서 왁자지껄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 선비가 가까이 가자 "자, 그럼 우리 저 사람한테 물어보자." 하는 것이다. "보래요, 우리가 내기를 했는데요. 저기 저 하늘에 떠 있는 게 해이껴, 달이껴?" 서녘 하늘엔 둥근 해가 지고 있었는데 유난히 크고 벌개서 달 비슷하게 생기기는 했지만 보름달이 서쪽에서 뜰 리가 없지 않은가! 순간 장난기가 동한 이 선비는 두 총각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왈, "글쎄, 나는 이 동네에 안 살아 봐서 잘 모르겠네." '숙맥열전(菽麥列傳)' 중 한 편이다. 이런 이야기 109편이 안동을 위한 변명, 숙맥열전, 개화백태, 안동 그 낯선 .. 2024. 1. 29.
김원길 《적막행寂寞行》 김원길 시집 《적막행寂寞行》 청어 2020 시인과 함께하던 그 저녁들로부터 오십 년이 흘렀습니다. 나는 이렇게 허접하고 시인은 변함 없습니다. 여든이 된 시인이 바라보는 적막이 이런 것이구나, 표지를 바라보며 생각했습니다. 저 빛깔은 이십대 중반의 시인이 보여주던 적막이었습니다. 서정(抒情)의 강물 같습니다. 소년기에 나타났다가 사라져버린 정(情)이 아니었습니다. "자, 또 한 편 써볼까?" 하고 술술 써내려갔을 듯한, 낯간지러운 '말놀이'도 아니었습니다. 마법 그리운 율리아나, 어이 할거나. 나는 몹쓸 저주에 걸려 여인의 사랑만이 사슬을 푼다는 별난 마법에 걸려 괴물의 몸으로 빈 성에 숨어 사는 이야기 속 딱한 왕자. 율리아나, 그대 또한 멀리 외져 발길 없는 숲속 궁전, 백 년을 옴짝 않고 누워 잠자.. 2020. 6. 28.
弔辭 "종민아" 종민아. 오전에 내 아들이 내 핸드폰에 문자로 "최종민 선생님 돌아가셨습니다. 분당 서울대 병원 장례식장 9호실. 16일 발인"이라 찍어 보냈구나. 어떻게 알았냐니까 페이스북에 났더라고 했다. 그럼 네가 죽었단 말 아니냐? 이게 무슨 짓거리냐? 일 년 전 뇌에 혹이 생겨 수술 후에 너는 분명 경과가 좋다고 했지 않았나? 구례 국악 행사에도 다녀올 거라 하기에 올라오는 길에 안동 들러 쉬어 가라 했는데 그 후에 소식이 없어 전화했더니 목소리가 힘이 없어 보였다. 그 후 1년 여를 네 전화는 먹통이고 메일을 보내도 답이 없기에 수신확인을 했더니 열어보지도 않았더구나. 우석이, 오춘이, 보영에게 전화로 네 근황 물어봐도 아무도 모르더구나. 언제 시간 나면 경기도 너네 집으로 찾아가든가 실종신고라도 내야겠다는 .. 2015. 10. 16.
이육사 「청포도」 내 고장 7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데 하늘이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고옵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던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서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안동 '지례예술촌' 김원길 시인은 이렇게 썼습니다(「아름다운 몽상, 육사의 "청포도"」에서). (…) 육사의 '청포도'가 '광야'와 함께 노래로 불리게 된 것은 1968년 5월 5일 안동의 낙동강 가에 육사의 시 '광야'가 시비로 세워지고 그날 저녁에 추모 공연을 시내 대안극장에서 할 때였다. 나는 그 무렵 고향 안동에서 교직생활을 하며 문학 지.. 2015. 7. 30.
교과서의 작품 이야기 - 옥의 티 "문우(文友)"라고 하면 좋겠지만, 나는 아무것도 아닌 그냥 보통 사람이어서 흔히 하는 말로 "아는 사람", 그러니까 지인(知人)이 쓴 글입니다. 계간지 《교과서 연구》(79호, 2015.3.1)에 실렸습니다. 옥의 티 김 원 길(시인, 안동지례예술촌장) 내가 우리말 현대시를 처음 만난 때는 중학교 1학년 국어 시간이었던 것 같다. 갓 입학하여 며칠 안 된 봄날에 우리들은 박목월의 시를 배우며 우리 시가 지닌 율조의 아름다움에 반하고 말았다. 머언 산 청운사 낡은 기와집 산은 자하산 봄눈 녹으면 느릅나무 속잎 피어가는 열두 구비를 청노루 맑은 눈에 도는 구름. ('청노루' 전문) 율조가 좋은 시는 쉽게 읽히고 잘 읽히는 시는 뜻이 좀 어려워도 잘 외워진다. 실제로 이 시에서 "…… 열두 구비를 / 청노루.. 2015. 4. 14.
김원길 「여숙旅宿」「밀어」「시골의 달」 지례예술촌 김원길 시인이 이런 글을 보여주었습니다.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그렇지만 결코 그리 깔끔할 것도 없는, 그 시절의 이른바 '무전여행'이란 것의 추억을 멋들어진 시 한 편으로 간직할 수 있는, 시인은 그렇기 때문에 행복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추억은 메마르고 저 맥고모자만 덩그러니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방랑시편 (1) 「여숙旅宿」 10월 하순, 오후 4시 경, 박영태와 나는 영덕서 강구로 넘어가는 바닷가 비포장 언덕길을 터덜터덜 힘겹게 걷고 있었다. 땀이 흐르고 숨도 차고, 어디 앉아 쉴 만한 그늘이 없나 하던 차에 길가에 문짝이 떨어져 나간 초가삼칸 폐가가 눈에 띄었다. 그 폐가의 먼지 앉은 냉방에는 누가 배고 간 것인지 모를 목침이 나딩굴고 벽에는 낡은 맥고모자가 베토벤의 데드마스크처럼 묵.. 2014. 9. 6.
「라일락」 강남대로변의 라일락입니다. 그 길을 지나갈 때마다 무언가 주눅이 들어서 얼른 벗어나고 싶어집니다. 아무리 살펴봐도 이렇게 볼품없는 남성은 한 명도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어떻게 된 일인지 예전처럼 눈이 자그마한 여인조차 눈에 띄지 않고 하나같이 왕방울 같은 눈에 차림들이 영락없는 영화배우들 같아 보여서 그럴 것입니다. 그렇게 지나가는 그 길에서 도저히 돌아보지 않을 수 없는 향기로, 라일락이 불러세웠습니다. "나, 여기 있다!" 어느 집 정원의 해묵은 라일락처럼 그리 자랑스러운 자태도 아닙니다. 저런 몸으로 어떻게 그만큼의 향기를 내뿜는지, 그 분망한 길에서…… 불연듯 저 지례예술촌장 김원길 시인의 「라일락」이 생각났습니다. 접근하기 어려워서 아예 포기해버린 소녀, 무언가 복잡한 일들에 얽혀 있어서 .. 2014. 4. 11.
김원길 「취운정 마담에게」Ⅱ 시인들은 사랑 얘기를 어떻게 씁니까? 뭘 묻느냐 하면, 겪어본 얘기를 시로 표현하는지, 아니면 순전히 지어낸 이야기들인지, 그게 궁금하다는 뜻입니다. 배우들은 자신이 맡은 그 배역에, 두어 시간의 그 무대에서, 자신의 모든 것, 관념과 경험, 지식, 희망과 기대 같은 걸 모두 불어넣어 연출한다는, 그리고 그럴수록 멋진 배우가 될 수 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아예 자신의 생애를 자신이 맡았던 배역처럼 생각하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전혀 현실적이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마치 한 편의 멋진 영화 속 주인공처럼 살아가려다가 결국은 어려운 말년을 보내는 경우가 없지 않은 것 같고, 정작 증거를 대라고 하면 망설여지기는 하지만, 그런 경우는 다른 부문의 연예인 중에서도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는 .. 2014. 2. 19.
김원길 「마법」 시든 소설이든, 수필, 희곡, 평론이든 우리가 좋아하는 작품을 쓴 작가에 대해, 그의 생애와 업적, 사상 등을 알아보는 까닭이 있습니다. 작품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석사학위나 박사학위 논문, 혹은 저널에 실을 논문을 제출하기 위해서, 문학작품으로서의 평론을 쓰려고, 단순한 호기심으로…… 어쨌든 작가를 알면 작품을 더 재미있게, 깊이 있게, 폭넓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니까 46년 전, 지금의 저 안동 지례예술촌장 김원길 시인은 어느 여자고등학교 국어 선생이었습니다. 내가 그 교육대학의 예술제를 만들고 그 프로그램 속에 "문학의 밤" 행사와 "시화전"도 넣겠다고 하자, 대뜸 두 가지 행사에 다 참여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해 어느 안개낀 가을날 밤, 이 시 「마법」도 감상한 것 같은데.. 2014. 1.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