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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김원길19

「싸락눈 내리어 눈썹 때리니」&「설중여인도(雪中女人圖)」 재작년 2월 둘째 주 어느 날, 블로그 『강변 이야기』의 작품 싸락눈 내리어 눈썹 때리니 싸락눈 내리어 눈썹 때리니 그 암무당 손때 묻은 징채 보는 것 같군. 그 징과 징채 들고 가던 아홉 살 아이…… 암무당의 개와 함께 누릉지에 취직했던 눈썹만이 역력하던 그 하인 아이 보는 것 같군. 보는 것 같군. 내가 삼백 원짜리 시간 강사에도 목이 쉬어 인제는 작파할까 망설이고 있는 날에 싸락눈 내리어 눈썹 때리니……. 『徐廷柱詩選』민음사 세계시인선 ⑫, 1974, 111. 설중여인도(雪中女人圖) 김원길 저 눈 좀 보아, 저기 자욱하게 쏟아지는 눈송이 좀 보아 얼어 붙은 나룻가의 눈 쓴 소나무와 높이 솟은 미루나무 늘어선 길을 눈 속에 가고 있는 여잘 좀 보아. 내리는 눈발 속에 소복(素服)한 여인의 뺨이 보이네.. 2013. 12. 1.
김원길 시인의 '손짓' 김원길 시인의 '손짓' ♬ 어제는 편안한 KTX, 그것도 특실 1인석에 앉아, 거기다가 약 40분인 거리를 다녀왔는데도 집에 도착해서는 그야말로 겨우내내 거기에 있는 줄 모르고 지내다 발견된 홍시처럼 녹초가 되어버려, 일곱 시간이나 잤습니다. 평소보다 한 시간 반이나 더 자서 에디슨이 .. 2013. 10. 30.
「상모재」 교육대학을 다닐 땐 곤궁하고, 재미도 없고, 걸핏하면 쓸쓸해서 그 2년이 참 길었습니다. 그나마 당시 안동 어느 여자고등학교 국어 선생 김원길 시인을 만나는 날에는 제법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김원길 시인이 『월간문학』(「취운정 마담에게」, 『시문학』(「꽃그늘에서」 등)으로 등단하고, 고향 지례가 임하댐 건설로 수몰되자 선대 유산인 고건축물 10동을 마을 뒷산으로 옮겨 지어 문예창작마을 을 운영하고 있다는 등 그간의 동정은 간간히 들었지만, 모른 척 지냈는데, 얼마 전에, 그러니까 45년만에 덜컥 연락을 해왔습니다. "만나러 가겠다!" 그 시인이 「상모재」라는 시가 들어 있는 글 「상모재」를 보내주며 심심하거든 한번 읽어보라고 했습니다. 심심하거든…… 상모재 김 원 길 서울서 심야버스로 안동에 내리.. 2013. 9. 15.
「풍경의 깊이」 풍경의 깊이 바람 불고 키 낮은 풀들 파르르 떠는데 눈여겨보는 이 아무도 없다. 그 가녀린 것들의 생의 한 순간, 의 외로운 떨림들로 해서 우주의 저녁 한때가 비로소 저물어간다. 그 떨림의 이쪽에서 저쪽 사이, 그 순간의 처음과 끝 사이에는 무한히 늙은 옛날의 고요가, 아니면 아직 오지 않은 어느 시간에 속할 어린 고요가 보일 듯 말 듯 옅게 묻어 있는 것이며, 그 나른한 고요의 봄볕 속에서 나는 백년이나 이백년쯤 아니라면 석달 열흘쯤이라도 곤히 잠들고 싶은 것이다. 그러면 석달이며 열흘이며 하는 이름만큼의 내 무한 곁으로 나비나 벌이나 별로 고울 것 없는 버러지들이 무심히 스쳐가기도 할 것인데, 그 적에 나는 꿈결엔 듯 그 작은 목숨들의 더듬이나 날개나 앳된 다리에 실려 온 낯익은 냄새가 어느 생에선가.. 2012. 2. 20.
김원길 「立春」 立 春 아침에 문득 뒷산에서 다르르르르 다르르르르 문풍지 떠는 소리가 난다. 아, 저건 딱따구리가 아닌가 맹랑한 놈 얼마나 강한 부리를, 목을 가졌기에 착암기처럼 나무를 쪼아 벌레를 꺼내 먹는단 말인가 아직 눈바람이 찬데 벌레들이 구멍집 속에서 기지개 켜며 하품소리라도 냈단 말인가. 옛사람들은 무얼로 벼룻물이 어는 이 추위 속에 봄이 와 있는 걸 알았을까 감고을축입춘(敢告乙丑立春)이라 써서 사당 문에 붙이는데 다르르르르 다르르르르 뒷산에선 그예 문풍지 떠는 소리가 난다. 김원길 『들꽃 다발』(길안사, 1994) 입춘이 지난 지 2주째입니다. 한파가 몰아치고 체감온도는 영하 십도가 넘는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봄기운이 완연합니다. 창문 너머로 먼 산을 보면 그렇습니다. 사람들 입방아도 무섭습니다. "봄이 왔.. 2012. 2. 17.
「요즘 술 뺏아 먹는 법」 요즘 술 뺏아 먹는 법 길에서 나는 정년을 서너 달 앞둔 대선배 술고래 선생과 마주쳤다. 아프도록 손아귀를 쥐고는 엘리뜨 선생, 나 술 한 잔 살테니 내 이야기 좀 들어주소. 이 나라가 이래서 되겠소. 어중이 떠중이 또 다 나선다는 거요 헌데 김 선생, 언제까지 조국을 이 쓰레기.. 2012. 2. 14.
가을엽서 (Ⅲ) : 金源吉 詩人에게 가을엽서 (Ⅲ) - 金源吉 詩人에게 가을입니다. 기대하지도 않고 욕심을 내지도 않았는데도, 가을입니다. 하기야 그 변화에 기대를 하는 건, 그야말로 ‘자유’지만 욕심을 내거나 할 일이 아니라는 건 누구나 다 압니다. 다만 다시 한해가 저물고 있다는 것에서 느끼기로는 오히려 좀 천천.. 2008. 9.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