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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자네 말이 참말인가?"

by 답설재 2024. 1. 31.

 

 

 


김원길 시인의 책《안동의 해학》에서 「자네 말이 참말인가?」라는 글을 읽고 옛 생각이 나서 한참 앉아 있었다. 지나고 나니까 참 좋은 날들이었다.


구봉이가 나이 마흔이 넘도록 장가를 못 간 것은 꼭히 얼굴의 곰보 자국 때문이라고만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짚신도 짝이 있다고 드디어 동갑 또래 노처녀에게 장가를 가게 된 것이다. 그런데 친구들과 어울려 놀길 좋아하던 구봉이가 장가를 가고부터는 사람이 아주 달라진 것이다. 전엔 제일 늦게까지 술자리를 못 떴는데 요즘은 술도 끊고 화투를 치다 말고는 슬그머니 사라지거나 아예 초저녁부터 나타나지 않을 때가 많았다. 어느 날 짓궂은 명출이가 화투장을 돌리면서 슬쩍 말했다.
"오늘 장터에 갔다가 들었는데 예안 주재소 순사가 여자하고 너무 붙어 지내는 사람은 일일이 조사한다더구만. 우리 동네야 조사를 해 봐야 겁날 거 없지만......"
그날 밤 구봉이는 마지막까지 화투판을 지켰다. 헤어져서 집으로 오는 길에 구봉이가 명출의 소매를 당기며 잔뜩 겁먹은 얼굴로 물었다.
"아까 자네 말이 참말인가?"

 

(출처 : 예안 외내(烏川) 고(故) 김준식)



구봉이... 마흔 넘어서 장가를 들어 색시에게 흠뻑 빠져버린 그 순박한 구봉이...
예전에는 웬만한 사람은 다 구봉이, 구봉이의 색시 같았던 것 아니었을까? 웬만한 사람은? 그건 아니라 해도 어쨌든 구봉이가 많았지? 그 시절에도 나쁜 놈은 이미 나쁜 놈이었나? 은혜도 모르는 망나니는 이미 은혜를 모르기로 작정한 망나니었나? 영악해빠진 놈은 그때 이미 부모형제고 뭐고 다 이용해 먹고 등쳐 먹기로 작정하고 태어난 영악해빠진 놈이었나?
모르겠다. 나는 모르겠다.

1994년이었지?
교육부는 광화문 정부종합청사 16~18층이었는데, 한두 달에 한 번쯤 당직사령이 되면 다른 부처의 당직사령들과 함께 16층 합동당직실에 들어가 있다가 이튿날 아침까지 몇 번씩 그 3개 층 각 실을 드나들며 일일이 순찰을 하고 전국 산하 기관 중 몇 군데 전화를 해서 전화도 잘 받고 근무도 잘하는지 알아보느라고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는데 그렇거나 말거나 안심하고 차라리 집에서보다 더 실컷 잘 자는 사람이 없진 않은 것 같았다.

어느 봄날이었다.
새벽에 세수를 하고 자리에 앉아 있는데 전화가 왔다. 일단 귀찮고 두렵다. 떼를 쓰는 사람, 아침까지 술 취한 사람, 온갖 폭언을 서슴지 않는 사람...
그녀는 교육부인지 묻더니 자신을 소개했다. 어느 학교 여교사라고 했고 남편은 이웃 학교에 근무하는데 그 학교 여선생님과 정을 통하고 있으며 아무리 사정하고 타일러도 듣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 선생님은 내가 누구인지, 직위가 어떻게 되는지, 그런 사정을 이야기해도 좋은지, 그런 건 아예 생각에 없는 것 같았고 그런 상황이 벌어진 연유와 현재의 상황, 자신의 심정 같은 걸 자세히 이야기해 주었으므로 나는 일단 진지하게 들었고, 그 선생님과 남편이 근무하는 학교와 남편의 이름 같은 걸 일일이 물어서 메모했고, 며칠 좀 기다려 달라고 했다.
그 선생님은 남편의 일을 내가 당연히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알고 전화를 했으므로 나는 당연히 그 일을 해결하려고 노력해야 할 것 같았다.

그날은 너무 분주해서 이튿날 저녁나절 문제의 교사가 근무하는 학교에 전화를 넣어서 그 선생님을 바꿔달라고 했고, 곧 그가 전화를 받았고, 나는 다짜고짜 그 사건을 요약해서 단 한 마디로 언급하며 지금 당장! 앞으로 어떻게 하겠는지, 즉 그 불미스러운 관계를 청산하겠는지, 일단 미련을 가지고 생각을 해보겠다느니 어쩌니 하면서 그 관계를 계속하겠는지 결정하라고 해버렸고, 그는 한참 생각하더니 관계를 청산하겠다고 다짐했고, 나는 지금 그 다짐을 믿어도 되겠느냐고 되물어서 확답을 받고 전화를 끊기 전에 나는 이 상황에 대해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다 파악하는 수가 있으니까 그쯤 알고 있으라고 했다.

그러고 나서, 사실은, 나는 그 일을 잊고 있었다.
내가 하는 일은 그런 것도 아니고, 나는 사실은 정말로 바쁜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며칠 후 그 여선생님께서 전화로 다시 나를 찾았고, 남편이 퇴근도 제시간에 하고 여러 가지로 알아보았더니 그 불미스러운 관계를 깨끗이 청산한 것이 분명하다고 했다. 
좀 섭섭한 것은, 그 선생님은 나에게 별로 고마워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실제로 고맙다는 말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 선생님은 학교에서 일어나는 이런 '큰일'은 교육부에서는 당연히 쉽게 해결할 수 있고 교육부 직원은 당연히 그런 일도 그 업무로 하는 사람들로 알고 있기 때문인 듯했다.
그녀가 그러거나 말거나 속으로 '나는 한 건 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만약에 앞으로 이 일이 깨끗하게 정리되지 못하고 찜찜한 구석이 추호라도 있으면 즉시 다시 연락해 달라고 부탁하고 전화를 끊었다.

간간히 그 부부교사는 잘 있는지, 여전히 사이가 돈독한지 궁금하긴 했지만 그동안 그저 몇 년에 한 번쯤 서너 번 생각났을 뿐이었고 최근 몇 년 간에는 전혀 생각나지 않는 일이 되었는데 이번에 저 「자네 말이 참말인가?」를 읽고 그 일을 또 생각하게 된 것이다.
지금이야 그런 전화가 오면 나처럼 그렇게 받아서는 안 될 일이고, 교육부에 그런 전화를 할 사람도 없을 것이고, 설령 있다 해도 그런 전화를 나처럼 그렇게(무책임하게? 아니지! 나는 무책임한 게 아니었지? 그럼 진지하게? 모르겠다. 어쨌든 그렇게) 받아서도 안 될 일이 분명한데, 뭐 다 지나가버린 일이고, 나는 이미 오래전에 퇴임해 버렸고, 그 부부교원도 그렇게 살아가다가 지금 퇴임해서도 행복한 노년을 보내고 있을 것 같아서 이래저래 다행하다는 느낌이다 ("답설재 씨! 그때 그 전화 받아서 처리했지요? 건방진 일이 아닌가요? 지금이라도 자수하세요!").

 

구봉이의 색시 같은 그 여선생님, 구봉이 같은 그 여선생님의 남편, 그들이 행복한 노년을 보내고 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그건 내가 적극적으로 관여한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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