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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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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편지(Ⅰ) 봄은 겨울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봄은 침묵으로부터 온다. 또한 그 침묵으로부터 겨울이 그리고 여름과 가을이 온다. 봄의 어느 아침, 꽃들을 가득 달고 벚나무가 서 있다. 그 하얀 꽃들은 그 가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침묵의 체에서 떨어져 나온 것 같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게 그 꽃들은 침묵을 따라서 미끄러져 내려왔고, 그래서 하얀빛이 되었다. 새들이 그 나무에서 노래했다. 마치 침묵이 그 마지막 남은 소리들을 흔들어 떨쳐버리기라도 한 듯이 그 침묵의 음(音)들을 쪼아 올리는 것이 새들의 노래인 것 같았다. 나무의 푸른빛 또한 돌연히 나타난다. 한 나무가 다른 한 나무 곁에 푸른빛으로 서 있는 모습은 그 푸른빛이 침묵하면서 한 나무에게서 다른 한 나무에게로 옮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대화할 때 .. 2009. 3. 18.
서남표 총장과 오바마 대통령 (20090317) 서남표 총장과 오바마 대통령 “논술 중심으로 가르쳐야 할지, 면접 중심으로 해야 할지 막막하다” “대학들이 입학사정관 전형을 제대로 치러낼 능력을 갖고 있는지 의문이다” “객관적 기준도 없이 선발하겠다는 입학사정관제에 학생과 학부모들이 승복할지 모르겠다”……. 시험점수가 아니라 인성과 창의성, 잠재력 등을 평가해 신입생을 뽑겠다는 ‘입학사정관 선발’에 대해 학생․학부모, 교사들의 관심과 의구심이 첨예하다. 우리나라 대학들은 아무리 좋은 제도라도 입학전형에 관한 한 교사와 학부모들의 동의가 필요한 초라한 입장이 돼버렸다. 당연히 대학들은 교육과학기술부가 시키는 대로 해왔을 뿐이라고 할 것이다. 도화선은 서남표 KAIST 총장이 “私교육은 死교육” “고교 성적은 아예 안 보겠다”는 확고한 의지와 잇단 발언으.. 2009. 3. 17.
The Harvard Crimson 『하버드 대학생들의 생각과 자기표현은 어떻게 다를까?』 The Harvard Crimson 엮음/민선식 옮김 『하버드 대학생들의 생각과 자기표현은 어떻게 다를까?』 조선일보사/2003 'Application Essay'(입학 지원 에세이)라는 단어를 찾아오는 분이 많습니다. 이 책을 소개합니다. 편집이 참 단순한 책입니다. ‘편집자의 말’ ‘역자의 말’이 각각 두 페이지, 제125기 하버드 크림즌 대표(매튜 W. 그러네이드)와 제126기 대표(조슈아 H. 사이먼)의 ‘책을 내면서’가 두 페이지씩이고, 본문은 입학 지원 에세이와 그 에세이들에 대한 코멘트로만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의 원제는『50 Successful Harvard Application Essays』라고 합니다. 제가 읽으면서 밑줄을 쳐둔 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저는 그런 부분에서 A.. 2009. 3. 16.
우리 아파트 홍중이 엘리베이터가 내려오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내애가 제 친구와 헤어지면서 고래고래 떠드는 소리가 지하 2층까지 내려옵니다. 5학년짜리 홍중입니다. 우리 동(棟)에는 그 애 말고는 그럴 애가 없으니까요. 언젠가 “할아버지, 오늘은 더 멋지게 보이세요.” 해서 저를 우쭐하게 했던 그 아입니다.1) 로비 층에서 홍중이가 자전거를 가지고 들어오면서 인사에 이어 숨가쁘게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저 8월에 미국 간다는 얘기 들으셨어요?” “응? 뭐라고? 미국이라니! 얼마 동안?” 빅뉴스를 들은 척해주었습니다. “3주간요.” 그러더니 벌써 섭섭해진다는 표정으로 덧붙였습니다. “……그동안 할아버지를 못 뵐 것 같아요.” (별 걱정이야, 내 참...) “그렇겠네? 누구하고 가?” “영어학원 원장님요(그 애는 내가.. 2009. 3. 15.
미셸 투르니에의 『푸른 독서 노트』 미셸 투르니에의 산문집 『푸른 독서 노트』 이상해 옮김, 현대문학, 2008. 미셸 투르니에 1924년 파리에서 태어나 소르본느와 독일 튀빙겐에서 철학을 전공했다. 독일문학 번역가, 라디오 방송국 직원, 출판사 문학부장직을 거치며 늦깎이로 문단에 데뷔했다. 1967년 첫 번째 소설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을 출간하여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소설 대상을 수상했고 1970년 『마왕』으로 콩쿠르상을 받았다. 1972년에는 콩쿠르상을 심사하는 아카데미 콩쿠르 종신회원으로 선출되었다. 『짧은 글 긴 침묵』 『예찬』 『흡혈귀의 비상』 『외면일기』 등의 산문집, 사진집인 『뒷모습』 등으로 한국에서도 널리 사랑받고 있다. 차례 1. 이야기 하나 해주세요 2. 위대한 작가이자 뛰어난 지리학자, 쥘 베른 3. 이상한 나라를.. 2009. 3. 12.
막스 피카르트 『침묵의 세계』 막스 피카르트 『침묵의 세계』 최승자 옮김, 까치 1999 소개하고 싶지 않을 만큼 아껴두었던, 정말 좋은 책 한 권을 소개합니다. 대부분 거짓말인 ‘강추(强推)’니 '한번 잡으면 놓을 수 없는 책'이니 그따위 말은 생각조차 하기 싫습니다. 한꺼번에 읽어도 좋지만 조금씩 읽어도 얼마든지 좋습니다. 책날개에는 다음과 같은 소개가 보입니다. …이 책에 대해서는 논평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직접 읽어주시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막스 피카르트는 고뇌하는 사람입니다. 그의 고뇌의 특징은 그것이 무서울 만큼 엄밀하다는 데에 있습니다.…(라이너 마리아 릴케) 고백을 해야 할까? 막스 피카르트의『침묵의 세계』를 처음 읽게 되었을 때 내가 당황했다는 것을. 책을 펼치기만 하면 그 어디에서나 우리는 피카르트가 침묵에 대.. 2009. 3. 3.
국가 학업성취도평가를 위한 전제 (20090303) 국가 학업성취도평가를 위한 전제 「임실 성적조작 전원 직위해제」‘전북도교육청은 임실 성적조작 관련자를 전원 직위해제하는 한편 교장 임명도 철회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직위해제 대상자는 성적을 원천 조작한 임실교육청의 결제라인에 있던 김 모 학무과장, 임실교육청의 수정보고를 묵살한 도교육청의 성 모 장학사와 상급자인 남 모 장학관, 김 모 초등교육과장 등 4명이다. 도교육청은 또 이들 중 3월1일자로 교장에 임명된 임실교육청 김 학무과장, 도교육청의 성 장학사, 초등교육과 김 과장 등 3명의 교장 임명을 취소해줄 것을 교육과학기술부에 요청했다.’ 최근 어느 신문에 보도된 기사의 일부이다. 결국 이렇게까지 되고서야 국가 학업성취도평가를 둘러싼 언론의 관심은 고개를 숙이게 됐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더 들여다봐.. 2009. 3. 3.
다시 먼 나라로 떠난 딸을 그리워함 조용하면 생각납니다. 그럴 때는 이곳이 적막해집니다.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그럴 때는 괜찮습니다. 생각나게 하는 건 어느 곳에나 있습니다. 가령, 영국이라는 나라가 그곳에 있을 서쪽하늘은, 언제 어디서나 바라볼 수 있습니다. 지난 1월 4일, ‘한국의집’에서 혼례를 치른 딸이 또 이 나라를 떠난 지 두 달이 지났습니다. 그 두 달 간 하루하루는 참 잘 갔는데 한 달, 또 한 달이라는 시간은 길어서 아득해졌습니다. 옛적에 있었던 일 같습니다. 우리 학교 H선생님은 제 글 「먼 나라로 살러가는 딸과 작별하고」(2007.12.18)를 읽고 눈물을 흘렸다고 했습니다. D시의 후배 K교장은 그의 아들이 혼례식에 대신 참석했는데 신랑은 옥스퍼드 출신, 신부는 캠브리지 출신이라는 말을 듣고 기가 죽었더라고 했습니다. .. 2009. 3. 2.
‘학교장 인사’를 위한 걱정 3월에는 갖가지 교육행사가 줄줄이 들어 있습니다. 내일(2일, 월요일)만 해도 시업식에 입학식이 이어집니다. 다른 나라는 어떤지 잘 모르지만 우리는 그런 행사라면 으레 교장이 단상에 올라가 인사를 해야 ‘제격’이라는 인식이 깊습니다. 교장이 없으면 행사를 할 수 없는 것으로 인식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달랑 학교장 훈화 또는 학교장 인사만으로 구성되기도 하니 어처구니가 없을 지경입니다. 이런 교육활동도 얼른 학생이 주인이 되는 ‘학생중심 교육활동’으로 바뀌어가야 할 것입니다. 시업식은 아이들이 한 학년씩 진급하여 첫 수업을 시작하는 날을 기념하는 행사지요. 그렇다면 어떤 얘기를 해주어야 합니까? “얘들아, 새해가 밝은지 어제 같은데 또 새로운 학년이 시작됐구나. 곧 봄이 무르익겠지? 세월은 참 무상한.. 2009. 3. 1.
제임스 우달 『존 레논 음악보다 더 아름다운 사람』 『존 레논 음악보다 더 아름다운 사람』 JOHN LENNON UND YOKO onO (1997, 베를린) 제임스 우달 지음․김이섭 옮김, 한길사, 2001. • 『존 레논 음악보다 더 아름다운 사람』이란 제목은, 저자 제임스 우달이 레논을 그린 모습을 표현한다. 아래와 같은 글들이 적혀 있는 책의 날개가 그것을 설명한다. "레논의 음악은 브람스나 베토벤, 바흐의 작품처럼 그렇게 오래 남을 것이다."(레너드 번스타인) "존은 내게서 억압받는 여성의 현실을 배웠다. 하지만 나는 그를 통해 남성의 연약함을 배웠다. 그는 여느 남성과는 달리 자신의 나약한 모습을 그대로 드러냈다. 나는 남성이 여성을 억압하는 현실뿐 아니라, 남성도 고통을 겪는다는 사실을 배웠다. 남성은 평생 불안과 죄책감을 안고 사는 존재인 것.. 2009. 2. 27.
기억하고 싶은 기사 "金 추기경 신드롬" 기억하고 싶은 기사를 보았습니다. 지나고 나면 또 속이고 거짓말을 하고 싸우고 으스대고 억누르고 질시하고 갈라지고 그러겠지만, 그럴 때 이런 모습도 있지 않았느냐고 스스로에게 보여주고 싶은 기사입니다. 고 김수환 추기경 추모에 관한 기사입니다(조선일보, 2009.1. 9. 1, 4면). 기사 제목은「갈라졌던 우리, 하나 되는 계기로」작은 제목들은「이념·계층·종교 초월한 추모 행렬… ‘金추기경 신드롬’」「새벽 6시~子正까지 20만 넘는 조문인파」였습니다. 2009년 2월 21일, 오늘 오전 김수환 추기경 장례미사 특별중계방송을 보았습니다. 명동성당에서 줄의 맨 끝까지 걸어가는 데만 30분이 걸렸다. 고(故) 김수환 추기경의 조문 행렬은 가톨릭회관을 둘러 삼일로 언덕배기 길을 지나서도 계속됐다. 세종호텔에서.. 2009. 2. 20.
정민표 『내 인생 1막 1장』 1 정년이 되면 무언가 남기고 싶어들 합니다. 그렇지 않을 리 없습니다. 저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교직원들과 식사라도 할까? 다른 사람도 좀 부를까? 더러 꽃다발이나 선물 같은 걸 가지고 오겠지? 장소를 구해서 아예 퇴임식을 할까?……. 문제는, 폐를 끼치고 부담을 준다는 데 있습니다. 그 부담을 줄이려고 하겠지만 그게 마음먹은 대로 됩니까? 그래서 조용히 마지막 퇴근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혹 그런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에게 넌지시 물어보면 "그러면 됩니까! 교장 선생님이야말로 꼭 퇴임식을 하셔야 합니다!" 그렇게 대답합니다. '교장 선생님이야말로?' 남들도 다 그런 말을 들을 게 분명합니다. '이 사람은 나를 진정으로 생각해주는 말을 하고 있나?' 흘낏 쳐다보고 또 생각합니다. '당사자에겐 심각하지만.. 2009. 2.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