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투르니에의 산문집 『푸른 독서 노트』
이상해 옮김, 현대문학, 2008.
미셸 투르니에
1924년 파리에서 태어나 소르본느와 독일 튀빙겐에서 철학을 전공했다. 독일문학 번역가, 라디오 방송국 직원, 출판사 문학부장직을 거치며 늦깎이로 문단에 데뷔했다. 1967년 첫 번째 소설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을 출간하여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소설 대상을 수상했고 1970년 『마왕』으로 콩쿠르상을 받았다. 1972년에는 콩쿠르상을 심사하는 아카데미 콩쿠르 종신회원으로 선출되었다. 『짧은 글 긴 침묵』 『예찬』 『흡혈귀의 비상』 『외면일기』 등의 산문집, 사진집인 『뒷모습』 등으로 한국에서도 널리 사랑받고 있다.
차례
1. 이야기 하나 해주세요
2. 위대한 작가이자 뛰어난 지리학자, 쥘 베른
3. 이상한 나라를 창조한 성직자, 루이스 캐럴
4. 초인의 초상을 그린 예술가, 잭 런던
5. 천재 이야기꾼이 된 절도범, 카를 마이
6. 닐스의 모험을 창조한 작가, 셀마 라게를뢰프
7. 인도의 무한을 품은 작가, 러디어드 키플링
8. 동물 만화의 아버지, 벤자멩 라비에
9. 영원한 모험 소년 땡땡의 친구, 에르제
10. 꼬마 악마를 사랑한 작가, 피에르 그리파리
11. 러시아에서 온 동화작가, 세귀르 백작부인
12. 나의 로빈슨 이야기, 미셸 투르니에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 그 이야기를 끝없이 해주던 국민학교 때의 그 선생님
지리, 그것은 어원적으로 ‘땅의 글씨’를 뜻한다. 그를 통해 우리는 역사에서 영감을 얻는 작가와 지리에서 영감을 얻는 작가라는 아주 초보적인, 나아가 너무 단순해보일 수도 있는 문학적 구분에 이르게 된다. 그것은 아주 멀리, 적어도 『일리아스』가 역사적 전설이고 『오디세이아』가 지리적 서사시이기에 이중적인 작가라 할 수 있는 호메로스까지 거슬러 올라간다.(35, 2)
철학, 절대적 사실주의와 절대적 관념론
철학이 앎에 있어서 '인식하는 주체'와 '인식되는 대상'이 벌이는 대결의 심판 역할을 한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 대결은 한쪽의 완전한 우세로 끝날 수도 있다. 대상이 주체에 대해 완전한 승리를 거둘 때, 우리는 그것을 '절대적 사실주의'라고 부른다. 이것이 과학자들이 묵시적으로-혹은 무의식적으로-채택하는 철학이다. 이 관점에 따르면, 합리성은 외부세계의 배타적 특권이다. 사물은 그 자체로 전적으로 합리적이다. …(중략)… 이 절대적 사실주의의 대척점에 있는 '절대적 관념론'은-말브랑슈1에서 버클리2에 이르기까지-외부세계에 있는 모든 종류의 실재를 부인한다. 사물은 그것들이 인식되는 한에 있어서만 존재성을 지닌다(esse est percipi). 그리고 그것의 특성은 전적으로 주체의 활동에서 유래된다. 앎에 관한 모든 이론은 두 극단 사이 어딘가에 위치한다.(38~40, 2)
어린 날에 읽었던 책, 그리고 가장 소중한 책을 가진 사람의 행복
셀마 라게를뢰프가 쓴 『닐스의 모험』. 그 책이 가죽 장정의 눈부신 내 무릎 위에 놓여 있다. 나는 일터에서 돌아오는 길에 생 제르맹 앙 레에 있던 내 방으로 그것을 가져다주셨던 내 아버지를 떠올린다. 1932년, 그러니까 내가 아홉 살 되던 해였다. 당시 난 많이 아팠던 것 같다. 파리 수플로 가 15번지, 들라그라브 출판사 판. 삽화는 로제 르부생이 그렸다(그의 삽화가 든 『닐스의 모험』은 현재 악트 쉬드 출판사에서 출간하고 있다).
나에게는 마스코트나 다름없는 그 책은 단 한 번도 내 곁을 떠나본 적이 없다. 그것은 전시의 이사, 약탈, 폭격, 평시의 강도와 화재를 무사히 견뎌냈다. 그것은 내가 소장하고 있는 책 목록 가운데 넘버원이다. 사실 난 그 책을 통해 문학에 입문했다. 나는 그 책을 통해 처음으로 위대한 글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뭔가 훌륭한 일을 한다면, 그와 비슷한 글을 쓰는 일이 될 거라고 예감했다.
여기서 그 책의 기원을 상기하는 것은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 될 것이다. 백여 년 전 파리에, 16세기에 순교한 철학자 조르다노 브루노3를 전문적으로 연구한 알프레드 푸이에라는 유명한 철학교수가 있었다. 그런데 그의 아내가 따분했던지 남는 시간을 활용해 프랑스 지방들을 소개하는 일종의 가이드북 역할을 할 애국적인 소책자를-당시 프랑스는 1871년 전쟁의 패배에서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였다-써보자는 생각을 했다. 그 책에서는 팔스부르-알자스 지방의 상징적 도시-출신의 두 형제가 주인공 역할을 맡아 평야, 산맥, 항구, 가내공업, 산업 등 조국의 부와 아름다움들을 하나씩 발견해나간다.
그 책은 1877년 G. 브루노라는 익살스런 필명으로 출간되었다. 제목은 『두 아이의 프랑스 일주』였다. 그 책은 필독서가 되어 몇 백만 부가 팔려나갔다. 프랑스에서는 지금도 매년 그 책을 찍어내고 있다.4
물론 그 소책자는 스웨덴에도 소개되었다. 이렇게 해서 셀마 라겔르뢰프는-1909년 노벨문학상 수상-한 아이가 자신의 조국 스웨덴과 노르웨이를-당시에는 두 나라가 아직 분리되지 않은 상태였다-발견하는 비슷한 유형의 이야기를 써보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83~85, 6)
아, 인도!
독자가 『킴』을-키플링의 가장 중요한 작품-을 읽으면서 자신이 알고 있는 인도의 모습을 전혀 떠올리지 못하는 것도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내 생각에 인도는 여행자가 현기증이 일 정도로 광활한 영토와 많은 인구 때문에 ‘정신을 못 차리게 되는’ 유일한 나라다. 무엇을 참조하든, 어떤 길잡이를 따라가든, 도움이 되지 않는다.(94~95, 7)
인간의 한계
인간은 늘 환경에 적응하는 동물의 능력을 부러워했다. 인간은 동물과 유사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인간-동물을 꿈꿨다. 물론 그것은 꿈에 불과하다. 모든 차이는 '주어진 것'과 '건설된 것'의 대립, 동물과 인간의 삶에 있어서 그것들이 차지하는 비중 속에 있다. 동물의 삶에 있어서는 거의 모든 것이 주어지는 반면, 인간의 삶에 있어서는 거의 모든 것이 건설된다. 물론 거미줄, 새 둥지, 토끼 굴처럼 동물의 삶에도 건설되는 것들이 있긴 하다. 하지만 인간의 옷, 집, 요리에 비교할 때 그것들이 어떤 무게를 갖겠는가? 인간-동물, 특히 소년-늑대의 경우에는 여태까지 많은 예들이 있었고, 우리는 그 사연들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언제나 참담했다.(97, 7)
아, 인도. 인도인의 철학과 삶
나는 밤에 봄베이의 ‘환락가’를 돌아다녀본 적이 있다. 활짝 열린 지층의 창문을 통해 들여다보이는 화려한 집안에서 짙은 화장에 화려한 옷을 입은 여자들이 파이프 담배를 피워가며 반짝거리는 술잔을 들고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단순한 상상력을 가진 사람들을 꿈꾸게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들에게서 성적인 자극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더위와 가난은 알몸을 부추긴다. 그런데 그 알몸에는 몸의 부재를 가리는 투명한 튜닉들이 입혀져 있다. 모든 것은 대부분의 경우 놀라울 만큼 반듯하고 영적인 얼굴에 있다. 그 비非나체성은 바라나시에서, 갠지스 강에서 목욕을 하는 사람들에게서 특히 뚜렷하게 나타난다.(98~99, 7)
키플링의 아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만약
만약 모든 이가 이성을 잃고 너를 탓할 때
냉정을 유지하며 꿋꿋이 버틸 수 있다면,
만약 모든 이가 너를 의심할 때 너 자신을 믿고
그들의 의심마저 모두 감싸 안을 수 있다면;
만약 기다릴 수 있고 그 기다림에 지치지 않는다면,
속임을 당하고도 속임으로 답하지 않는다면,
미움을 받고도 미워하지 않을 수 있다면,
그리고 너무 착한 척, 너무 현명한 척하지 않는다면;
만약 꿈을 꾸면서도 그 꿈의 노예가 되지 않는다면,
만약 생각을 하면서도 그 생각을 목표로 삼지 않는다면,
만약 승리와 패배를 만나고도
그 두 협잡꾼을 똑같이 대할 수 있다면,
만약 네가 말한 진실을 악인들이 왜곡하여
우민들을 옭아매는 덫으로 삼는 것을 보고도 참을 수 있다면,
네 일생을 바쳐 세운 것들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도
낡은 연장을 집어 들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만약 애써 모은 모든 것을
단 한 번의 도박에 걸 수 있다면,
그것을 다 잃고 다시 시작하면서도
불평 한 마디 않을 수 있다면,
만약 심장, 신경, 힘줄이 다 닳아버린 후에도
네 몫을 하기 위해 다시 한 번 힘을 낼 수 있다면,
남은 것이라곤 “버텨라!”고 말하는 의지뿐일 때도
계속 버틸 수 있다면,
만약 많은 사람과 얘길 나누면서도 덕을 잃지 않는다면,
왕들과 같이 거닐면서도 오만해지지 않을 수 있다면,
만약 적이든 사랑하는 친구든 널 해칠 수 없게 된다면,
만약 모두를 아끼되 그 누구도 편애하지 않는다면,
만약 용서할 수 없는 일 분을
육십 초의 질주로 채울 수 있다면,
그러면 이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네 것이라,
그리고 그때서야 너는 비로소 어른이 될 것이다. 내 아들아!
키플링
정치가와 작가, 누가 더 힘이 센가
현재는 분명 정치가들에게 속할 수 있다. 하지만 미래는 작가들의 것이다. 폴 발레리는 이렇게 쓴다. "오늘날 사람들은 스탕달과 나폴레옹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어느 누가 감히 나폴레옹에게 언젠가 사람들이 스탕달과 나폴레옹이라 말할 거라고 말할 수 있었겠는가?" 로스톱친은 러시아 황제 파벨 1세의 총리대신이었고, 모스크바를 잿더미로 만든 총독이었다. 하지만 그가 우리의 기억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은 그가 『수호천사의 여인숙』의 주인공, 두라킨 장군의 모델이기 때문이다. 어린 소피를 무릎 위에 앉혀 놀게 하는 그에게 이 미래를 알려줬다면 그는 좀처럼 입을 다물지 못했을 것이다.(135, 11)
우리 학교는 어떤 학교일까, 어떤 학급들이 있을까?
나는 가능한 한 자주 현장을 방문한다.
나는 잦은 현장 방문을 통해 오늘날 교육의 놀라운 다양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감옥처럼 멋대가리 없는 지난 세기의 낡은 건물들도 있었고, 마치 칼로 자른 듯한 기능적인 큐브 형 건물들도 있었으며, 아프리카 마을들처럼 모양도 색깔도 제각각인 작은 학교 도시들도 있었다. 분위기 역시 도시마다 큰 차이를 드러냈다. 어떤 곳에서는 내가 교실로 들어서자마자 학생들이 일제히 차려 자세를 취했고, 또 어떤 곳에서는 함성이 뒤섞인 열렬한 박수로 맞아주기도 했다. 가장 깜짝 놀랄 일이 준비되어 있었던 건 사르투르빌 고등학교였다. 가면, 요란한 치장, 원시적인 음악, 섬뜩한 분장, 그것은 한바탕 축제였다. 나는 거기서 가슴에 불을 담고 있는 젊은 천재작가 파트릭 그랭빌5의 세계를 알아보았다.(158~159, 12)
우리는 어떤 질문을 허용하고 있을까
아이들은 거창한 질문들도 거침없이 한다. 아침에는 주로 뭘 드세요? 또는 행복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그것들은 아이들이 별 생각없이 무작정 던지는 질문이다. 질문이 어떤 것이든 대답을 할 줄 알아야 한다. 아침식사에 대해서는 그냥 넘어가도록 하자. 하지만 행복은?
“행복이란 아주 간단한 거란다. 근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조건이 딱 한 가지 있지. 뭔가를 혹은 누군가를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것. 아무것도,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다면, 너희의 삶은 시작되기도 전에 끝나버린단다. 반대로 식물학, 인도음악, 럭비, 혹은 우표수집에 뜨거운 열정을 갖고 있다면, 파라오들의 이집트에 대해 샅샅이 알고 싶다면, 별에 완전히 매료되어 망원경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밤을 지새운다면, 한 여자, 한 남자 혹은 한 아이(혹은 셋 모두를 한꺼번에)를 다른 무엇보다 뜨겁게 사랑한다면, 그리고 그 열정이 요구하게 될 모든 희생을 치를 각오가 되어 있다면…… 아마도 너희들은 위대한 작가, 유명한 화가, 혹은 세계적으로 알려진 박물학자가 될 수 있을 거야. 하지만 가장 확실한 것은 너희가 살 가치가 있는 삶을 살게 되리라는 거란다.”(162~163, 12)
잘 배워야 잘 쓸 수 있다! 다시 읽고 싶은 『슬픈 열대』, 그리고 '영광'이라는 것에 관하여
『방드르디』에 관하여
애초에 클로드 레비 스트로스와 앙드레 르루아 구랑6 같은 석학들을 스승으로 모시고 파리 인간박물관에서 2년 동안-1949~1950년-공부를 한 것이 시발점이 되었다. 나는 거기서 ‘문명인’(우리)과 '미개인'(다른 사람들)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존중하고 연구할 가치가 있는 수많은 문명들이 있다는 것을 배웠다. 문명인/미개인은 터무니없이 자기중심적인 하나의 사고방식이다. 우리는 그 방식을 고대(그리스인/야만인)에도, 중세시대(기독교도/이교도)에도 발견할 수 있었다.(163~164, 12)
파리에는 맹아盲兒들을 위한 학교, 국립 맹아 학원이 있다. 그곳에서는 맹아들에게 가르칠 수 있는 모든 것을 가르친다. 특히 음악 활동을 많이 하고, 점자책을 읽는다. 그런데 그 책들은 일일이 기계로 찍어야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특수 컴퓨터가 도착했다. 덕분에 인쇄된 책을 입력해 넣기만 하면 원하는 부수만큼의 점자책을 출력할 수 있게 되었다. 크리스마스 저녁에 기념식이 열렸고, 첫 작품으로 내 『방드르디』가 채택되었다. 나는 그 자리에 모인 백삼십 명의 아이들에게 첫 점자책 『방드르디』를 직접 나눠주었다. 나에게 그것은 노벨문학상을 받는 것만큼이나 값진 일이었다.(167~168, 12)
다시 '영광'에 관하여
출판사와 계약도 저작권도 없이 책을 찍어내는 출판사, 즉 해적들을 구별해야 한다. 그런데 '해적'은 물질적으로는 작가에게 해를 입히지만 정신적으로는 그에게 가장 아름다운 왕관을 씌워준다.(169)
♧ <다시 ‘영광’에 관하여>처럼 파란색으로 된 제목은 블로거 '파란편지'가 붙인 독서노트이고(어쩐지 이상하다 했습니까?), ( ) 안의 숫자는 페이지와 『푸른 독서 노트』의 차례를 나타냅니다.
..............................................................
1. Nicolas Malebranche(1638~1715), 프랑스의 철학자, 데카르트 철학을 계승하면서도 관념론의 편에 서서 유물론의 편에 서서 유물론적 요소들을 배제함으로써 이원론을 극복하려 했다.
2. George Bekeley(1685~1753), 영국의 철학자, 정신적인 모든 감각기관에 의해 지각되는 경우에만 존재한다는 경험론으로 유명하다.
3. Giordano Bruno(1548~1600), 이탈리아 철학자, 신학자, 우리의 세상과 똑같은 세상들이 수없이 널려 있는 무한한 우주의 존재를 주장하다 종교재판에 회부되어 산 채로 화형 당함.
4. (원주) 으젠 블랭 출판사.
5. Patrick Grainville(1947- ), 프랑스 소설가, 문학비평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6. Andre Leroy Gourhan(1911~1986), 프랑스 인류학자, 고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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