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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막스 피카르트 『침묵의 세계』

by 답설재 2009. 3. 3.

막스 피카르트 『침묵의 세계』

최승자 옮김, 까치 1999

 

 

 

 

 

 

 

소개하고 싶지 않을 만큼 아껴두었던, 정말 좋은 책 한 권을 소개합니다. 대부분 거짓말인 ‘강추(强推)’니 '한번 잡으면 놓을 수 없는 책'이니 그따위 말은 생각조차 하기 싫습니다. 한꺼번에 읽어도 좋지만 조금씩 읽어도 얼마든지 좋습니다. 책날개에는 다음과 같은 소개가 보입니다.

 

 

…이 책에 대해서는 논평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직접 읽어주시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막스 피카르트는 고뇌하는 사람입니다. 그의 고뇌의 특징은 그것이 무서울 만큼 엄밀하다는 데에 있습니다.…(라이너 마리아 릴케)

 

고백을 해야 할까? 막스 피카르트의『침묵의 세계』를 처음 읽게 되었을 때 내가 당황했다는 것을. 책을 펼치기만 하면 그 어디에서나 우리는 피카르트가 침묵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을, 그것도 극히 강렬하게 그러나 경외심을 가지고 말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나는 처음에는 그가 얘기하는 침묵이 그 무엇의 단단한 결핍이 아니라 능동적인 그 무엇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피카르트의『침묵의 세계』는 그가 이 책을 착상했을 때 그의 영혼 속에서 울렸던 것과 꼭 같은, 아니 거의 같은 현(弦)을 지금 이 시간 내 영혼 속에서 울리고 있다.…(가브리엘 마르셀)

 

 

릴케는 우리가 잘 아는 그 릴케이고, 가브리엘 마르셀은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이 책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위의 인용은 바로 그 글의 첫 부분에서 가져왔습니다.

 

얼마나 감동적인가 하면…… 소개하는 일을 아껴두었는데, 일일이 그렇게 하는 것이 제게는 더 손해일 것 같은 느낌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은 책을 소개하는 것은, 어느 정도의 작업이 필요한 일이며, 그것은 또 내가 가브리엘 마르셀과 같은 사고 과정을 거쳐야 하는 일이고, 그것은 아무래도 불가능할지도 모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차례를 소개합니다. 한 부분만 읽어도 위안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느 부분을 읽고 있는 시간도 다 좋을 수 있습니다.

 

「침묵의 모습」

「침묵이라는 원현상」

「말의 침묵으로부터의 발생」

「침묵, 말 그리고 진리」

「말 속의 침묵」「침묵과 말 사이의 인간」

「침묵 속의 마성(魔性)과 말」

「말과 몸짓」

「고대의 언어」

「자아와 침묵」

「인식과 침묵」

「사물과 침묵」

「역사와 침묵」

「형상과 침묵」

「사랑과 침묵」

「인간의 얼굴과 침묵」

「동물과 침묵」

「시간과 침묵」

「아기, 노인 그리고 침묵」

「농부와 침묵」

「침묵 속의 인간과 사물」

「자연과 침묵」

「시와 침묵(Ⅰ)」

「시와 침묵(Ⅱ)」

「조형 예술과 침묵」

「잡음어(雜音語)」

「라디오」

「침묵의 잔해」

「병(病), 죽음 그리고 침묵」

「침묵이 없는 세계」

「희망」

「침묵과 신앙」


마음이 편한 것은, 문장이 거의 거슬리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1985년에 초판이 발행되었고, 1993년에 재쇄(再刷)가 이루어졌는데도 그렇습니다. 정성을 다한 것이 역력한 번역자의 말입니다(「재쇄에 부쳐」).

 

"태어나자마자 죽어버린 줄로 알았던 책이 되살아나는 것을 보니 여간 기쁘지 않다. 이 책을 이미 읽었던 이들이 바로, 이 책의 부활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한 씨앗이 뿌려져 싹을 틔우고 그 싹이 자라나서 또 하나의 씨앗을 맺는 것을 바라보는 것도 마음 흐뭇한 일이겠지만, 이 기회에 초판의 제목인 『침묵에 관하여』가 원서 제목 그대로인 『침묵의 세계』로 복원되는 것 또한 역자에게는 작은 즐거움이다."

 

다음은 첫 번째의 글 첫 부분(「침묵의 모습」Ⅰ)입니다.

 

침묵은 결코 수동적인 것이 아니고 단순하게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며, 침묵은 능동적인 것이고 독자적인 완전한 세계이다.

침묵은 그야말로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 때문에 위대하다. 침묵은 존재한다. 고로 침묵은 위대하다. 그 단순한 현존 속에 침묵의 위대함이 있다. 침묵에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침묵은 모든 것이 아직도 정지해 있는 존재였던 저 태고로부터 비롯되고 있는 듯하다. 말하자면, 침묵은 창조되지 않은 채 영속하는 존재이다.

침묵이 존재할 때에는 그때까지 침묵 말고는 다른 어떤 것도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듯이 보인다.

침묵이 존재하는 곳에서는 인간은 침묵에 의해서 관찰당한다. 인간이 침묵을 관찰한다기보다는 침묵이 인간을 관찰한다. 인간은 침묵을 시험하지 않지만, 침묵은 인간을 시험한다.

오직 말만이 존재하는 세계는 상상할 수 없지만, 오직 침묵만이 존재하는 세계는 아마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침묵은 자기 자신 안에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침묵은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완전하게 현존하며 자신이 나타나는 공간을 언제나 완전하게 가득 채운다.

침묵은 발전되지 않는다. 침묵은 시간 속에서 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시간은 침묵 속에서 성장한다. 마치 시간이라는 씨앗이 침묵 속에 뿌려져 침묵 속에서 싹터나오는 것 같다. 침묵은 시간이 성숙하게 될 토양이다.

침묵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하게 현존한다. 침묵은 그 어느 먼 곳까지라도 뻗어가지만, 우리에게 가까이, 우리 자신의 몸처럼 느낄 정도로 가까이 있다. 침묵은 잡을 수는 없지만, 옷감마냥, 직물마냥 직접적으로 감지할 수 있다. 침묵은 언어로써 규정할 수는 없지만, 확실한 것이며 분명한 것이다.

멂과 가까움, 멀리 있음과 지금 여기 있음 그리고 특수와 보편이 그처럼 한 통일체 속에 나란히 존재한다는 것은 침묵말고는 다른 어떤 현상에도 없다.

 

이 책에 대한 인연이 담긴 편지의 한 부분을 소개합니다. 그의 근황이 궁금합니다. 내가 정부에서 근무할 때 받은 편지이므로 이제 와서 그를 찾는다는 건 부질없는 일이 될 것입니다. 인간의 일이란 그런 것입니다.

 

…. 동봉하는『침묵의 세계』는 너무 좋은 책입니다. 제가 주위의 친지나 신세진 분들에게 가끔 선물하는 책인데, 하얀색으로 읽었던 초판이 벌써 재판을 찍을 정도로 세간에 널리 읽혀졌나 봅니다. 행여 독서 폭이 넓으신 장학관님께서 읽지나 않았는지 머뭇거렸으나, 새봄을 맞는 정분으로 우송하오니 읽으셨다면 과내의 후배들에게 선사하시지요. 틈나시는 대로 사무실에서 한두 쪽씩 읽으시면 업무로 인한 스트레스로부터 조금은 가벼워지시리라 믿습니다. …….

                                                                             

                                                                                                                       2001년 1월 22일

                                                                                                                       온전한 고을에서 C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