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레논 음악보다 더 아름다운 사람』
JOHN LENNON UND YOKO onO (1997, 베를린)
제임스 우달 지음․김이섭 옮김, 한길사, 2001.
• 『존 레논 음악보다 더 아름다운 사람』이란 제목은, 저자 제임스 우달이 레논을 그린 모습을 표현한다. 아래와 같은 글들이 적혀 있는 책의 날개가 그것을 설명한다.
"레논의 음악은 브람스나 베토벤, 바흐의 작품처럼 그렇게 오래 남을 것이다."(레너드 번스타인)
"존은 내게서 억압받는 여성의 현실을 배웠다. 하지만 나는 그를 통해 남성의 연약함을 배웠다. 그는 여느 남성과는 달리 자신의 나약한 모습을 그대로 드러냈다. 나는 남성이 여성을 억압하는 현실뿐 아니라, 남성도 고통을 겪는다는 사실을 배웠다. 남성은 평생 불안과 죄책감을 안고 사는 존재인 것이다."(오노 요코)
"그는 죽어서 마틴 루터 레논이 되었다. 하지는 그건 왜곡이다. 그는 결코 성스러운 인간일 수 없었다. 그는 모든 것에 대해 울분을 토로해야만 하는 인간이었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존은 나의 우상이었다. 그는 위대했고, 나는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나는 차츰 그의 세계에 동참할 수 있었다. 때로는 존처럼 뛰어난 노래를 작곡하기도 했다. 그것이 그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는 사실 언제나 불안한 삶을 살아왔다."(폴 메카트니)
• 첫 페이지에는, 제임스 우달이 그린 존 레논의 모습을 레논 자신이 표현한 다음과 같은 한마디가 적혀 있다. "비틀스 아니면 요코 오노, 나는 둘 중 하나를 택해야만 했다."(존 레논)
• 문화에세이스트 신현준의 해제 「순수한 자유를 위하여」를 그대로 옮기면 좋을 것이다. 존 레논은 어떤 사람인가, 『존 레논 음악보다 더 아름다운 사람』은 어떤 책인가를 멋스럽게 쓰고 있다. 그러므로 존 레논이 어떤 사람인가를 가장 잘 나타낸 부분으로 보이는 다음과 같은 부분은 그 멋스런 글을 쓴 이에게는 미안한 일이 될 것이다.
"존 레논 한 사람의 이름은 '한 시대’와 일치한다. 「나를 진정으로 사랑해줘」(Love Me Do)라는 영국 사내아이의 '사랑타령'이 '1960년대'의 시작을 알렸다면, 그가 죽은 1980년은 그 좋았던 시대가 이제 더 이상 오지 않으리라는 '확인사살'이었다. 믹 재거나 밥 딜런처럼 너무 오래 살아남아서 영욕을 모두 맛본 것도 아니고, 짐 모리슨이나 지마 핸드릭스처럼 너무 허망하게 먼저 가버리지도 않았다. 너무 짧지도 너무 길지도 않은 그의 생애는 그 시대를 살아간 인물들 중에서도 가장 ‘많은 것’을 보여주었다.”(7)
"변두리 소도시의 노동계급, 그것도 '결손가정'에서 태어나 섬세하고 예민한 사내아이로 성장했다는 사실이 게임의 전주곡이다. 따분하고 절망적인 상황에서 벗어나는 길은 '로큰롤 음악을 연주하여 팝 스타가 되는 것'이라는 충동의 발생이 다음 순서다. 록 음악은 모든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이었기 때문에 '진실한 감정'도 표현할 수 있다는 예술가적 자의식이 싹트는 것도 자연스럽다. 시적 가사와 인상적인 멜로디를 만들 줄 아는데도 굳이 언더그라운드에 머물러 있을 필요가 없다는 자각이 탄생하면서 본 게임은 시작된다. 성공은 문제없다. 사진 촬영을 위한 그림이 받쳐주고, 유능한 조력자들을 거느리고 있고, 위트와 아이러니를 섞은 '말발'까지 겸비한 인물이라면 말이다. 이렇게 해서 1962년부터 1969년까지 영광스러운 시기가 지속되었다.
"그렇지만 존 레논의 진면목은 비틀스의 멤버로 있던 시절이 아니라 혼자 된, 아니 오노 요코와 둘이 된 뒤의 비참했던 시절에 드러난다. 그는 절박한 상황에 빠졌을 때조차 진정한 표현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은 언젠가는 극복될 것이라고 믿었다. 프로이트의 용어를 빌리자면, 레논에게 로큰롤의 제1원리는 '쾌락원리'였고, 언젠가는 순수한 환희라는 로큰롤의 꿈과 이상이 실현되리라고 믿었다. LSD 복용으로, 동양 신비주의자로, 아방가르드 예술로, 급진적 좌파정치로, 록 슈퍼스타덤으로, '가사노동'으로 좌충우돌했던 일련의 행동들은 팝 스타덤과의 부단한 싸움의 과정이자 '영원한 마인드 게임'이었다. 그래서 1980년 그가 공백을 청산하고 음악계에 컴백하자마자 '어이없이' 살해된 사실은 영원히 '미완의 꿈'을 남긴다."(9~10)
• 다음에, 존 레논 혹은 비틀스의 명성, 레논과 오노 요코의 사랑과 예술, 오노 요코라는 인물, 오노 요코에 대한 세간의 평가, 존 레논이 정말로 기원한 것, 레논이 표현하고 싶어 한 것을 볼 수 있는 부분을 옮긴다.
베트남은 묵시록에 나오는 종말론적인 상황을 재현하면서 전 세계의 텔레비전 화면을 장식했다. 이 장면은 수많은 평화운동과 시위를 이끌어냈다. 베트남 문제는 영국과 미국, 그리고 얼마 뒤에는 프랑스와 독일에서 정치적인 쟁점으로 부각되었다. 서방세계가 일궈낸 위대한 문명과 막강한 군사력이 흔들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60년대 벽두의 장밋빛 꿈은 이제 끔찍한 악몽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히피와 하레 크리슈나 추종자들, 그리고 인도 여행자들은 젊은이들의 ‘반문화’를 통해 자유에의 의지를 표방했다. 공동의 행동전선을 수립한 이들은 다양한 장소에서 다양한 형태로 자신들의 견해를 밝혔다. 비틀스는 앨범『페퍼 상사의 실연클럽 밴드』를 통해 새로운 사운드를 선보였다. 시적인 분위기가 감도는, 그러면서도 혼돈스런 느낌을 자아내는 풍자적인 가사--“만화경의 눈을 가진 소녀”(the girl with kaleidoscope eyes,「다이아몬드를 가진 천상의 루시」중에서), “랭커셔 블랙번에 있는 4,000개의 구멍”(four thousand holes in Blackburn, Lancashire,「생의 어떤 날」중에서)--와 함께.
6월 25일(1967년), 4억에 달하는 전 세계의 시청자들은 텔레비전을 통해 생방송으로 세계적인 팝 그룹의 노래를 들었다. 국제적인 위성방송의 개국을 축하하는 공연에서 비틀스는「필요한 것은 사랑이 전부」(All You Need Is Love)를 불렀다. 순수하고 희망에 넘치는, 다채로운 바로크풍의 앨범『페퍼 상사의 실연클럽 밴드』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곡이었다. 이 노래는 비틀스에게도 희망의 메시지를 심어주었다. 이들의 해체설이 나돌던 시기에 모든 멤버들이 이 음반을 위한 공동작업에 참여해 뜻을 함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67년부터 68년 중반까지 레논은 ‘LSD 여행’을 즐겼다.『페퍼 상사의 실연클럽 밴드』를 제작하던 시기에 찍은 어느 유명한 사진을 보면 그는 탁자 옆에 앉아 있고, 그 곁에 조지 마틴이 그에게 호의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다. 아마도 방금 녹음을 끝낸 곡들을 감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다이아몬드를 가진 천상의 루시」(Lusy in the Sky with Diamonds),「카이트 씨를 위하여」(Being for the Benefit of Mr. Kite),「생의 어떤 날」(A Day in the Life)은 모두 레논이 마약에 취한 상태에서 자신의 체험을 음악적으로 형상화한 뛰어난 작품들이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찍은 또 다른 사진에는 폴 메카트니가 피아노 앞에 앉아 있고, 그의 오른편에는 역시 조지 마틴이 손에 담배를 든 채 만족스런 표정으로 폴의 음악을 듣고 있다. 레논과 매카트니가 전혀 다른 음악적인 개성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팬들은 알지 못했다. 이 두 장의 사진은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삶의 영역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페퍼 상사의 실연클럽 밴드』는 매카트니의 제안으로 이루어졌다. 레논이 만든 세 곡은 몽상적이고도 이국적인 분위기를 시적으로 아름답게 그려냈다. 하지만 음반 구성과 배경음악은 전적으로 매카트니의 몫이었다. 1969년, 매카트니는 세 명의 친구들을 다시 불러 모았다. 그리고 서로 다른 개별적인 음악을 하나의 완벽한 화음으로 엮어냈다. 이렇게 해서 비틀스의 음반 가운데 가장 뛰어나다고 평가받는『애비가』가 탄생하게 되었다.(70~74)
1969년 1월 초, 이들의 나체 사진이 세기적인 희극을 연출해냈다. 뉴어크 지방법원이 ‘외설’이라는 판결을 내림에 따라 미국의 세관 당국이 3만 장이 넘는 앨범을 압수한 것이다. 늙은 판사 앞에 선 젊은 앨버트 골드먼은 그 사진들이 “인류 타락 이전의 아담과 이브를 묘사한 기독교 전통”에 따른 것이라고 변명했다. 하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어쨌든 갈색 포장의 앨범은 영국과 미국에서 날개 돋친 듯이 팔려나갔다. 하지만 레논 오노 듀엣의 열광적인 찬미자들 외에는 새로운 앨범『두 동정녀』에서 음악적인 감동을 얻기는 힘들었다. 제스처로는 성공적이었지만 예술작품으로서는 지루하지 짝이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반응에 대해 요코와 존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두 사람은 이제 자신들의 세계를 대변하는 하나의 상징이 되어 있었다.
1968년 11월 8일, 존과 신시어는 이혼했다. 그리고 가장 먼저 켄우드에 있는 빌라를 처분했고 신시어와 릴리언은 집을 비우고 떠나버렸다. 존과 요코는 피트 쇼튼의 도움을 얻어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 나섰다. 1968년 12월 11일, 두 사람은 실패작으로 끝난 롤링 스톤스 특집 ‘로큰롤 서커스’를 필름에 담아냈다. 레논은 수준 미달의 음악을 들려주었고 요코는 괴성을 지르면 무대 위를 휘젓고 다녔다. 그로부터 1주일 뒤, 두 사람은 ‘연금술사의 결혼식’이라고 불리는 언더그라운드 성탄 축제에 참가했다. 하지만 로열 앨버트 홀에서 열린 이 자리에 과연 두 사람이 있었는지는 어느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다. 커다란 자루에 몸을 숨기고 무대에 나온 두 사람이 과연 그들이었는지는 아무도 확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108~109)
요코 자신은 이 문제를 어떻게 보았을까. 30년의 세월이 흐른 1996년, 그녀는『매거진 큐』(Magazin Q)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과거를 돌이켜보니 내가 여러분의 마음을 무척 아프게 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무척 힘든 일이었을 겁니다. 그렇게 숭배해 마지않는 우상을 늘 다른 여자와 함께 볼 수밖에 없었으니 말입니다. 더군다나 그런 여자 곁에서라면…….”
요코는 1966년에 이미 레론을 간파하고 있었다.
“존은 반항아였습니다. 나 역시 존과 다름없는 반항아였지요. 그래서 우린 함께 길을 걸어온 겁니다. 그는 자신이 원하기만 하면 무슨 일이라도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성미였어요. 그리고 마침내 그런 여자를 만난 거지요. 난 그에게 나름대로 자유공간을 만들어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존과 요코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실험’을 강행했다. 1969년 가을에 레논 부부가 상영한 실험영화들 가운데 레론의 페니스가 발기하는 장면을 담은 필름이 있었다. 애플 사무실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그녀는 지금도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유명한 발언을 했다.
“비평가들은 그의 페니스를 건드리지 않으려 했어요.”(134~135)
한번은 요코가 『빌리지 보이스』(Village Voice)의 평론가인 하워드 스미스에게 어째서 자신이 주위의 차가운 시선과 냉대를 받아야 하는지 물어보았다. 레논 부부와 잘 알고 지내던 그는 이렇게 대답해주었다.
요코! 어느 누구도 자신이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상대에게 목 졸리는 듯한 느낌을 갖고 싶지는 않을 겁니다. 예술이나 음악, 혹은 다른 주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눌 때에도 당신은 언제나 모든 걸 다 알고 있다는 듯한 인상을 줘요.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어느 예술가가 다른 예술가의 손에 목이 졸리는 꼴을 당하고 싶겠습니까? 설령 당신이 미켈란젤로 같은 존재라고 해도 말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예술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때면 언제나 그런 느낌을 갖게 만들어요. 나도 스스로는 제법 이해심이 많다고 자부하지만 당신한테서는 도망치고 싶은 느낌이 들 때가 있어요.(162~163)
1979년 5월, 레논은 자신의 열 번째 결혼기념일 바로 다음날 여론에 모습을 드러냈다. 레논 부부는『뉴욕 타임스』와 런던의『선데이 타임스』에 좀처럼 보기 드문 장문의 공식서한을 게재했다. 이들의 편지는 ‘우리의 안부를 묻는 모든 사람들에게 보내는 존과 요코의 사랑의 편지’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1975년에서 1979년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팬들은 존과 요코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 했고, 이들의 모습을 보고 싶어 했다. 레논 부부의 오랜 침묵은 근거 없는 유언비어를 낳았다. 존이 하워드 휴스처럼 은든생활에 들어갔다느니 그가 미쳐 버렸다느니, 아니면 집안에 틀어박혀 엄마노릇이나 하고 지낸다느니 아들 숀과 함께 감금되었다느니, 심지어 이미 세상을 떠났다는 끔찍한 소문까지 나돌았다. 뿐만 아니라 요코가 귀신에 들렸다거나 맨해튼의 부동산을 반이나 매입했다는 소문도 무성했다. 레논 부부는 이 공식서한을 통해 다코다 하우스에서의 삶을 진솔하게 보여주었다. 비록 피상적인 부분도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여론의 뜬소문을 잠재우기에는 충분했다.
“숀은 비범한 아이랍니다. 식물은 자라나고, 고양이는 야옹거립니다. 도시는 비와 눈, 햇빛으로 인해 눈이 부십니다. 우리는 신비로운 우주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우리의 삶이 이처럼 다채롭고 충만하다는 사실에 대해 감사하고 있습니다.”(205)
1997년 4월, …(중략)… 이매큘릿 컨셉션스 갤러리에서는 ‘존과 요코의 발라드’라는 제목으로 새로운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70년대 후반에 레논이 스케치한 그림들을 모아 전시한 것이다. 대부분의 판화는 인쇄되어 나왔기 때문에 구입이 가능했다. 어린 숀을 그린 그림들이 많았고 존이 사망한 뒤에 요코가 색을 입힌 것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백 하나」(Bag one)라는 제목을 붙인 외설적인 석판화도 있었다. 레논과 요코의 성행위 장면이 적나라하게 묘사된 이 여러 장의 그림은 1970년 런던 아트 갤러리에서 경찰에 의해 몰수당한 일도 있다. 요코가 자위행위를 하거나 존과 요코가 상대방의 성기를 애무하는 등 구스타프 클림트의 에로틱한 그림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물론 레논을 이러한 대가들과 비교하자는 것은 아니다. 레논은 풍자 만화가에 가까웠다. 하지만 이들의 전시 작품은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당시 레론과 요코가 불러일으킨 비난과 분노를 짐작케 했다.
비틀스에 대한 팬들의 열정을 다다이즘이나 에로티시즘 예술에 대한 그것과는 일치시킬 수 없다. 하지만 아이로니컬하게도 레논의 변호인은「백 하나」에 대한 법정소송에서 이 외설적인 석판화를 피카소의 그림과 견주어 변론했다. 그리고 레논은 승소했다. 하지만 존과 요코가 ‘예술의 동반자’로서 1970년을 전후한 시기에 겪어야 했던 대중들의 질시와 의구심은 요코로 하여금 존의 고향을 영원히 혐오하게 만들었다.(219~222)
• 책은 같은 얘기를 끈질기게 반복하는 느낌을 주었다. 그것은 저자가 처음부터 너무 많은 것을 이야기해주고 싶어 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였다. 가령, 첫 주제의 제목을 이미 다음과 같이 붙이고 있다. 「비틀스가 창조한 시대는 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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