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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학교장 컬럼

‘학교장 인사’를 위한 걱정

by 답설재 2009. 3. 1.

 

 

 

3월에는 갖가지 교육행사가 줄줄이 들어 있습니다. 내일(2일, 월요일)만 해도 시업식에 입학식이 이어집니다. 다른 나라는 어떤지 잘 모르지만 우리는 그런 행사라면 으레 교장이 단상에 올라가 인사를 해야 ‘제격’이라는 인식이 깊습니다. 교장이 없으면 행사를 할 수 없는 것으로 인식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달랑 학교장 훈화 또는 학교장 인사만으로 구성되기도 하니 어처구니가 없을 지경입니다. 이런 교육활동도 얼른 학생이 주인이 되는 ‘학생중심 교육활동’으로 바뀌어가야 할 것입니다.

 

시업식은 아이들이 한 학년씩 진급하여 첫 수업을 시작하는 날을 기념하는 행사지요. 그렇다면 어떤 얘기를 해주어야 합니까?

“얘들아, 새해가 밝은지 어제 같은데 또 새로운 학년이 시작됐구나. 곧 봄이 무르익겠지? 세월은 참 무상한 거야. 그렇지 않니?”

아니라면, “얘들아, 올해는 어떻게 하면 학교생활을 더 재미있게 할 수 있을지 각자 생각 좀 해봤니? 그런 생각도 하지 않았다면 참 한심한 사람이지.” 그러면 어떨까요?

그렇다고 “얘들아, 새 학년이 됐으니 더욱 의젓해져야 한다. 부모님, 선생님 말씀 잘 듣고 공부도 열심히 해야 한다. 길에 나가면 교통안전에 유의하고…….” 어쩌고저쩌고 한다고 가슴에 새길까요? 그런 것들은 담임교사들이 다 얘기해줄 것 아닙니까? 똑같은 얘기를 한다면 교장훈화시간은 쓸데없는 시간이 되겠지요.

더구나 옛날 교장들이 그런 쓸데없는 말들을 얼마나 해댔는지, 소설을 읽다보면 주인공들이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대목에서는 꼭 늙은 교장이 하염없이 이야기하던 그 정경을 그리고 있지 않습니까? 소설 속에 등장하는 교장치고 우습지 않은 교장이 단 한 명도 없을 지경 아닙니까? 저도 나중에 어떤 소설 속에 그렇게 등장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 미리 기분 나쁘고 걱정스럽습니다.

 

시업식에 이어지는 입학식 때는 또 어떤 얘기를 해야 합니까?

“얘들아, 너희들이 우리 학교에 입학한 1학년들이구나. 부디 부모님, 선생님 말씀 잘 듣고 훌륭한 양지 어린이가 되어다오.”

그런 내용이면 되겠습니까?

우리 학교에 처음 온 그 아이들에게 그렇게 얘기할 생각을 하면 저 자신에 대해 한심한 느낌이 듭니다. 그 부탁을 들으며 아이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요. ‘역시 교장선생님은 저러는구나.’ 그러지 않을까요? 아니, 그걸 알아듣기나 할까요?

그 아이들을 데리고 온 학부모들에겐 또 어떤 얘기를 해야 합니까? “출산율이 1% 초반으로 떨어진 이때 귀 자녀를 우리 학교에 입학시켜주셔서 고맙습니다. 바야흐로 국제경쟁이 극심해진 이 시대에는 어린이들을 창의력과 진취력, 리더십을 갖춘 인재들로 육성해야 합니다. 우리 선생님들께 잘 얘기해서 이 어린이들을 지식기반사회를 슬기롭게 살아갈 유능한 인재로 육성할 것을 약속합니다. 자신 있습니다!”

그러면 ‘교장이 훌륭하여 안심이 되는구나.’ 할까요?

 

지난해 12월 겨울방학을 앞둔 어느 날, 우리 유치원에서 학예발표회를 했습니다. 연말이라 이래저래 좀 분주해서 시작하는 것만 보고 교장실로 내려가려고 했는데, 결국은 그 학예회가 끝날 때까지 ‘미래관’에서 두어 시간을 보내고 말았습니다. ‘엉망진창’인 그 발표회가 ‘너무’ 재미있어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 뒤편에는 가스레인지를 가져다 놓고 음식을 장만하는 어머니들도 있었습니다.

그날의 느낌을 한마디로 말해볼까요? 합주나 합창이나 율동이나 연습이 철저해서 질서정연하고 그럴 듯한 발표들이었다면 저는 곧장 교장실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드디어 그 발표회가 끝났을 때 저는 학부모들에게 이런 인사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 아이들의 발표가 한마디로 엉망진창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유치원 원장인 저는 아주 재미있어서, 요즘 분주한 편이지만 이 아이들의 발표를 다 지켜봤습니다. 저는 이렇게 엉망진창인 발표를 하는 이 아이들을 사랑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이 아이들의 부모님인 여러분도 사랑합니다. 여러분, 고맙습니다.”

 

이튿날, 그 학예발표회 이야기를 제 블로그와 학교 홈페이지 ‘학교장칼럼’에 그대로 썼습니다. 그리고 그날도 피곤한 몸을 추스르고 앉아 있는데 유치원 교사 한분이 들어오더니 다짜고짜 눈물부터 보였습니다. 사연을 들어봤습니다. “기왕이면 ‘엉망진창’이라고 하지 말고 ‘참 잘했다’고 하면 더 좋지 않았겠나?” “여러 가지 준비를 도와준 학부모들에게 ‘수고했다’는 간단한 인사라도 해주면 우리가 더 신나고 기분 좋지 않았겠나?” 그 교사는 학부모들의 그런 비판을 전하러 교장실에 들어온 것입니다.

 

멋진 '인삿말'이었고, 하나의 '문학작품' 같은 글이라는 평가를 내심 기대하고 있었던 저는 아연 실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열광적인 환호쯤의 평가가 있을 거라는 기대를 감추고 있었던 저의 실망이 얼마나 컸을 거라는 것은 짐작하고 남을 일이었습니다. 거꾸로 학부모들의 실망이 컸다는 반응이니 그만 할말을 잊게 된 것입니다. 저는 그 교사가 참 딱하고 안타까워서 동정심도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학부모들이 교장실로 몰려온다고 해도 제 생각과 느낌을 설명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앞으로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학교장 인사’나 ‘학교장 훈화’ 말입니다.

저는 나중에 소설 속에 등장하는 그런 교장이 되기는 ‘죽어도’ 싫습니다. 그런 교장이라면, 가령 운동회를 하는 날 아침에는 이렇게 시작할 것입니다.

“국화 향기 그윽한 이 가을 아침, 하늘은 푸르고 드높습니다. 먼저, 오늘 우리 학교 운동회를 빛내주시기 위해 오신 분들을 소개합니다. …(중략)…. 우리가 운동을 하는 이유는 스포츠 정신을 기르기 위한 것으로…….”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그 연설은 이렇게 끝날 것입니다.

“평소 우리 학교의 발전을 위해 물심양면 지원을 아끼지 않으시는 지역사회 유지 여러분, 그리고 학부모 여러분께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 번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의 운동회를 위해 여러 가지 준비를 해주시고 선생님들을 도와주시는 우리 학교 체육활동도우미회 회원 여러분께 특별한 감사를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저는 그런 ‘의젓한’ 연설을 하기가 정말 싫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