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학교장 컬럼

학교폭력예방 현수막에 관한 낭만주의적 해석

by 답설재 2009. 4. 3.

“학교폭력 예방하여 건전한 학교문화 이룩하자”

 

어느 학교 앞을 지나다가 본 현수막의 표어입니다. 공연히 좀 부끄러웠습니다. 그걸 보고 ‘그래, 이젠 폭력을 하지 않아야지’ 할 아이는 없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 학교에서는 지난겨울엔 이런 현수막을 걸었습니다. “여러분의 졸업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그러더니 지난 초봄에는 또 이렇게 바꾸었습니다. “여러분의 입학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한마디면 하라면, 좀 미안한 말이지만 차라리 그 ‘진심’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불을 가지고 장난을 치면, 불은 세상을 망쳐요!”

 

지난해 11월초부터 올 2월말까지 4개월간 우리 학교 교문에 내걸었던 불조심 현수막의 표어입니다. 4․4조가 아니어서 어색합니까? 표어는 지난해 2학년 4반이었던 허태훈이의 작품으로, 공모를 통해 선정됐고, 우수작, 가작과 함께 시상을 한 후에 현수막을 제작했습니다. 그 현수막에 태훈이의 이름도 넣어주었습니다. 말하자면 저작권을 인정해준 것이지요.

 

요즘은 어떤 내용이든 거의 1년 내내 현수막을 걸고 있습니다. ‘현수막 시대’라고 하면 어떨까 싶기도 할 지경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번거로운 절차를 거치지 말고 책임만 다하자는 생각을 하기도 쉽습니다. 실제로 그런 현수막쯤은 얼마든지 만들 수 있습니다. 교육청을 거쳐서 오는 소방서의 공문에는, 가령 “설마하면 큰일날불 조심하면 안전한불” “크고작은 화재사고 알고보니 순간방심” “잘못쓰면 성난불길 바로쓰면 웃는불씨” “살핀만큼 안전한불 잊은만큼 위험한불” 같은, 뭐라고 할까요, 전통적 표현의 그럴듯한 표어들이, 그 공문의 첨부물에 여러 가지로 예시되어 있기 때문에 그 중 한 가지를 골라서 행정실에 얘기하면 하룻밤 새 멋진 현수막을 만들어 당장 내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건 교육이 아니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그게 교육이 아니라니, 무슨 말이냐고 하겠습니까? 그럼, 그게 무슨 교육인지부터 설명해보십시오. 가을만 되면 으레 내걸리는 그 현수막을 보고 “아! 이제부턴 불조심을 해야겠구나.” 감명이나 자극을 받을 아이가 과연 몇이나 되겠습니까. 그런 형식적인 일로도 교육이 잘 이루어진다면 교육이란 게 얼마나 쉽겠습니까. 그런 관점이라면 교육에 이른바 ‘몸 바치고 있는 우리 교육자들’을 아주 우습게 여기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사실은 그렇지요. 우리는 별 생각 없이 그런 현수막을 내걸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라도 우리가 하고 있는 일들을 하나하나 본질적인 관점에서 살펴보고 새로운 마음으로 새롭게 해내는 것이 바로 ‘교육혁신(敎育革新)’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교육혁신’이 좋은 일이고 필요한 일이라면 말입니다. 그런 관점으로, 태훈이가 지어낸 표어 “우리가 불을 가지고 장난을 치면, 불은 세상을 망쳐요!”로 현수막을 만드는 그런 방법, 국어도 그런 방법으로 가르치고 영어, 과학, 수학, 체육도 그런 관점으로 가르치면 우리 교육은 그야말로 혁신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우리는 지원행정에 매달려서 너무 오랫동안 헛일을 많이 해왔습니다. 무슨 헛일을 그렇게 많이 해왔는지 한 가지만 예를 들어볼까요? 저로 말하면 교장노릇을 5년째 하고 있는데, 허구한 날 아침마다 교감과 교육과정기획부장(흔히 말하는 ‘교무’), 행정실장을 데리고 앉아 회의를 하면서 거의 한번도 “국어공부는 이렇게 저렇게 해야 하지 않을까요?” “영어공부는요?” …… 같은 얘기를 한 적이 없습니다. 무슨 말을 그렇게 많이 했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아이들은 오늘도 국어와 영어, 수학, 과학, 체육, …… 그런 것들을 배우려고 학교에 오는데, 명색이 교장이라는 사람이 그런 얘기는 하지 않고 무얼 했다는 것인지 참으로 한탄스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육청에서 다음과 같은 공문이 왔습니다.

 

“남양주경찰서에서는 6개 부처 합동으로 2009.3.16~6.15일까지 학교폭력 자진신고 및 피해신고 기간 운영에 따라 각 학교에 학교폭력 자진신고 운영 현수막 게시를 요청하였으나 아직도 미 게시된 학교가 다수 있어 협조를 재요청한다 하오니, 각 학교에서는 현수막을 제작․게시하시어 학교폭력 예방에 적극 협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공문에는 이런 첨부물도 붙어 있었습니다.

 

“자진신고 학생 최대한 선처, 피해신고 학생 신분 비밀보장” ‘09년 학교폭력 자진신고 및 피해신고 기간 ‘09. 3. 16 ~ 6. 15

전화 : 117, 112 또는 563-5010 (남양주경찰서 여성청소년계) E-mail : ichong@police.go.kr

 

이 공문이 온지도 또 며칠이 지났고, 우리는 아직 현수막을 내걸지 못했으니 저로서는 좀 초조해졌는데, 어제 오후 드디어 담당선생님께서 표어가 선정됐으니 곧 현수막을 제작하겠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표어 좀 당장 보자고 했습니다.

 

최우수 : “우리 모두 한가족, 서로 사랑하면 학교폭력 항복한다”(6-8 황호연)

우   수 : “학교폭력 무서운적 학교폭력 모두의적” “양보하며 사랑하자 선배후배 사이좋게”(5-5 서정인), …….

 

폼 나는 현수막을 만들려면 공문의 첨부물처럼 만드는 게 좋을 것입니다. 얼른 만들어 붙이려면 “학교폭력 예방하여 건전한 학교문화 이룩하자”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학교 아이들이 학교폭력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해보고, 자극도 받고, ‘아, 저런 생각은 바로 우리가 해야 하는 거구나’ 자신감이나 책무성도 갖게 하려면 아무래도 “우리 모두 한가족, 서로 사랑하면 학교폭력 항복한다(6-8 황호연)”라고 써 붙이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학교는 교육을 하는 곳이니까요. ‘교육’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