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세상1153 외롭고 쓸쓸하면 마치 이제 모든 일이 내게 달린 것처럼, 정신을 약간만 집중하면 그간의 일 전체를 철회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고, 내가 원하기만 하면 안토니나 할머니가 예전처럼 칸토 가에서 살고 계실 듯했다. 우리에게 배달된 적십자 엽서에 따르면, 우리와 함께 영국으로 가기를 거부했던 할머니는 이른바 전쟁의 시작 직후에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한다. 하지만 내겐 할머니가 여전히 금붕어를 매일 부엌의 수도꼭지 아래에 놓고 씻기도 하고 날씨가 좋으면 창틀로 옮겨놓고 신선한 바람도 좀 쐬게 하면서 조심스럽게 돌보고 있을 것만 같았다. 한순간만 매우 집중하면, 수수께끼에 숨겨진 핵심 단어의 음절들을 조합해 내기만 하면 모든 것이 예전으로 되돌아갈 것만 같았다. W. G. 제발트 장편소설 《토성의 고리》에서 옮긴 문장입니다(창비.. 2022. 4. 11. "March with Me" etc. * March with Me sop. Monserrat Caballe [3’45] ☞ https://blog.naver.com/alphmega/100111450588 * 베토벤 /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로망스 2번 F장조 Op.50 - 요셉 스벤슨(바이올린), 앙드레 프레빈(지휘),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Johannes Brahms / Sonata for Cello and Piano no.1 in e minor op.38 Heinrich Schiff(cello), Gerhard Oppitz(piano) 1996 [26:19] * Schubert / Ave Maria voc. Sting & Placido Domingo gt. Dominic Miller 4:30 * Delibes / 오페라 중.. 2022. 4. 8. 지난 3월의 눈 TV에선 오늘 상춘객이 넘쳐났다고 전했습니다. 지난 3월 19일, 저 산에 눈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2022. 4. 3. 거짓말로 진실 만들기 녀석의 거짓말은 이렇게 해서 생산된 것이구나! "뇌는 기억할 가치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별하고, 중요한 정보라 해도 정보의 대부분을 지워버리는 식으로 압축을 합니다. 모든 디테일은 사실 없어집니다. 우리가 뇌에 기억하는 건 중요한 상황에 대한 정보를 압축해서 거의 키워드 정도만 입력을 하는 것이고, 나중에 우리가 기억을 할 때는 키워드를 제목만 가지고 와서 제목과 제목 사이의 디테일은 새로 만들어내는 겁니다. 결국 기억이라는 것은 있었던 사실을 서랍에다 집어넣었다 끄집어내는 것이 아니고, 매번 새로 만드는 거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김대식 교수(KAIST 전기 및 전자과)가 '아름다운 삶과 죽음'을 주제로 한 강의에서 그렇게 설명했습니다(위클리비즈 2015.3.28.). 그는 두 가지의 증.. 2022. 3. 30. "도대체 물이 뭐지?" 젊은 물고기 두 마리가 나이 든 물고기를 지나쳐 헤엄친다. 그들이 지나갈 때 나이 든 물고기가 묻는다. "좋은 아침이야, 젊은이들. 물은 어떤가?" 두 마리의 젊은 물고기는 한동안 계속 나아갔다. 마침내 한 마리가 다른 물고기에게 물었다. "도대체 물이 뭐지?" 소설가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David Foster Wallace)의 이야기한 우화란다(티나 실리그 《인지니어스 INGEIUS, 리더스북 2017, 89). "도대체 물이 뭐지?" 나는 그렇게 물었던 그 젊은이였다. 2022. 3. 28. 눈부신 만남 1992년~1996년 사이에 제겐 눈부신 만남의 순간이 일어났습니다. 첫 발령받은 병아리 교사에게 학교란 얼마나 미로 같은 지, 무형의 교육 현장은 또 얼마나 헤매게 하는지 우왕좌왕! 갈팡질팡! 시계가 도는지, 제가 도는지 알지 못한 시간들이 흐를 때 대선배님 한 분이 나타나셨죠. 지금도 변함없는 웃음을 그때도 얼굴 가득 띄우시고, 지금도 따뜻한 그 음성을 그때 역시 한 톤도 올리지도 내리지도 않으신 채 "괜찮아요." "~~~ 하면 되지요." "아이들은 옳아요." "아이들이 예쁘죠?" "아이들이 대단하죠?"...... 끊임없이 이야기를 건네주셨죠. 교사와 아이들은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가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영원까지 사랑하는 사이임을 일깨워주시려던 것임을...... 20년 경력이 된 지금에야 비로소 .. 2022. 3. 22. 나는 어디에 있을까 여기에 있을 땐 이곳 이 시간이 현실로 다가옵니다. 지난 시간, 그곳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나를 떠올리기도 하고 다시 그곳에서 그렇게 있을 나를 떠올리기도 합니다. 당연히 이곳 이 시간이 나의 중심입니다. 그렇지만 어쩌면 그곳에서 이와 같은 생각을 하고 앉아 있던 그곳 그 시간이 중심인지도 모릅니다. 거기서도 오랜 시간 이곳에서의 나를 떠올리며 그런 시간이 있었고 앞으로도 그렇게 하고 있을 나를 떠올리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 어느 곳 어느 시간이 현재이고 과거나 미래인지 알 수가 없게 됩니다. 시간 감각 장소 감각이 무디어진 까닭인지도 모를 일이지만 나 자신이 무너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 과정에서 시간 의식간에 충돌이 일어난 것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토성의 고리》라.. 2022. 3. 21. 효소왕이 진신 석가를 몰라보다 효소왕이 진신 석가를 몰라보다 8년 정유에 낙성회를 열어 효소왕이 친히 가서 공양했다. 그때 한 비구승이 있었는데 모습이 누추했다. 그는 몸을 움츠리고 뜰에 서서 청했다. “빈도도 재에 참석시켜주기를 바랍니다.” 왕은 그에게 말석에 참예하라 허락했다. 재를 마치려 하자 왕은 그를 희롱하고 비웃었다. “비구는 어디 사는가?” 중은 말했다. “비파암琵琶巖에 있습니다.” “지금 가거든 다른 사람들에게 국왕이 친히 불공하는 재에 참석했다고 말하지 말라.” 중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폐하도 또한 다른 사람에게 진신 석가를 공양했다고 말하지 마시오.” 말을 마치자 몸을 솟구쳐 하늘에 떠서 남쪽으로 향하여 가버렸다. 왕은 놀랍고 부끄러워 동쪽 산에 달려 올라가서 그가 간 방향을 향해 멀리서 절하고 사람들에게 가서 찾.. 2022. 3. 17. 퇴임 후의 시간들 퇴임 후 나는 힘들었습니다.불안하고 초조했습니다.아침에 일어날 때도 낮에도 저녁에 자리에 누울 때도 불안했습니다.사람을 만나기가 두려웠고 전화가 오면 가슴이 덜컹했습니다.사람이 그립거나 궁금하기도 하지만 그만큼 사람이 싫었습니다.그 증상을 다 기록하기가 어렵고 그러고 싶지도 않습니다.이러다가 비명에 죽겠다 싶었습니다.숨쉬기가 어려워서 인터넷에서 숨 쉬는 방법을 찾아 메모하고 아파트 뒷동산에 올라가 연습했습니다.심장병이 돌출해서 119에 실려 병원에 다녀왔는데 또 그래서 또 실려가고 또 실려갔습니다.숨쉬기가 거북한 건 심장에는 좋지 않았을 것입니다.잊히는 걸 싫어하면서 한편으로는 얼른 십 년쯤 훌쩍 지나가기를 빌었습니다(그새 12년이 흘러갔습니다. 누가 나를 인간으로 취급하겠습니까).그렇게 지내면서 남에게.. 2022. 3. 15.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잠자는 알베르틴 2. 잠자는 알베르틴 - 프루스트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제5권 『갇힌 여인La Prisonniere』 기나긴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갈피에는 “여기요!” 하고 속삭이고 싶은 장면, 주제, 이미지들이 감추어져 있다. 그 중 『갇힌 여인』에서 나레이터인 마르셀은 발베크 바닷가에서 만난 여러 명의 아름다운 여자들 중 한 사람인 알베르틴을 마침내 파리에 있는 자기 집으로 데리고 오는 데 성공한다. 그녀는 마르셀의 “갇힌 여인”이 된다. 그러나 한 지붕 밑에서 함께 지내면서도 마르셀은 그 여자를 소유하지 못한다. 곁에 있어도 그리운 그녀가 외출만 하면 온갖 상상에 사로잡히고 질투심을 억누르지 못하는 그는 어느 날 밤, 깜빡 잠이 든 그녀를 마음껏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잠은 대상을 가장 가까운.. 2022. 3. 14. AI 여인이 꿰뚫어볼 내 정체 아주 잠깐 곁눈질로 여인의 가슴을 바라보았습니다. 일부러 바라본 건 아니었습니다. 정말 별생각 없었습니다. 지나쳐서 뒤돌아보고 안심했습니다. 진짜인간인 줄 알았는데 다행히 좀 봐도 괜찮은(?) 가짜인간이었습니다. 코로나가 횡행하기 전해 여름에 아내를 따라다니는 길에서였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행복한 날들이었습니다. 어느 날, 저 여인은 몸 어딘가에 AI를 숨겨가지고 무심한 듯한 저 눈길로 나를 바라보면서 생각할 것입니다. '저 영감쟁이 지금 입고 있는 저 티셔츠는 적어도 10년은 된 것이다. 저 케케묵은 인간은 좀처럼 새 옷을 구입할 의사가 없다. 철 지난 옷에 익숙해져서 새로운 트렌드의 옷을 입으면 오히려 어색해한다. 저런 노인은 우리의 유혹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여인은 그 '분석'을 매장 안 어느 .. 2022. 3. 10. 글쓰기의 어려움 글을 쓸 땐 미끄러져나가는 기분으로 써야 한다. 말들은 절뚝거리고 고르지 못할 수도 있지만, 미끄러져나가기만 한다면 문득 그 어떤 즐거움이 모든 걸 환히 비추게 된다. 조심조심 글을 쓰는 건 죽음과 같은 글쓰기이다. 셔우드 앤더슨은 말을 공깃돌이나 음식 조각처럼 갖고 노는 데 극히 능했다. 그는 말들은 종이 위에 칠했다. 그런데 그 말들이 너무도 단순해서 독자는 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문들이 열리고 벽이 반짝이는 걸 느낄 수 있을 정도다. 양탄자며 신발, 손가락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앤더슨은 말들을 마음대로 다뤘다. 즐거운 말들을. 하지만 그것들은 또한 총탄과도 같다. 말들이 곧바로 독자를 죽일 수도 있다. 셔우드 앤더슨은 뭔가를 알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헤밍웨이는 지나치게 애를 썼다. 애쓴 흔적이 그.. 2022. 3. 8. 이전 1 ··· 23 24 25 26 27 28 29 ··· 97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