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오늘의 동시문학12

유미희 「강」 언 강이 녹는다 이쪽 산에 사는 고라니가 저쪽 산에 사는 멧토끼가 겨우내 건너던 얼음 다리 봄볕이 철거작업 중이다 천천히 지름길이 사라진다. 세상에 봄이 오는 모습이 그림처럼 펼쳐집니다. 동시작가 작품 중에는 아이들 흉내를 낸 것들이 있습니다. 장난 같고 심지어 같잖기도 합니다. 괜히 짜증도 나고, 이러니까 성인들은 물론 아이들로부터도 외면받는 것 아닌가 싶었습니다. 남의 일이니까 그냥 놔두면 되겠지만 혹 좋은 작품이 없을까 싶어서 또 살피게 되는데 그러다가 작가 작품다운 작품을 발견하면 '봐!' 하게 됩니다. 유미희는 어떤 작가인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이런 시를 주로 쓰는지, 그것도 알 수 없습니다. 설목의 카페 《오늘의 동시문학》「내가 본 동시」에 나무늘보라는 분이 실어놓은 이 작품을 봤습니다. 올봄.. 2023. 5. 2.
류병숙 「물의 주머니」 물의 주머니 류병숙 개울물은 주머니를 가졌다. 물주름으로 만든 물결 주머니 안에는 달랑, 음표만 넣어 오늘도 여행간다. 가면서 얄랑얄랑 새어나오는 노래 물고기들에게 들꽃들에게 나누어주며 간다 얄랑얄랑 간다. -------------------------------------- *제72회 洛江詩祭 시선집 설목의 카페 《오늘의 동시문학》에서 이 동시를 봤습니다. '물결 주머니'를 가진 시인, 그 시인의 마음이 보고 싶었습니다. 시인에게나 그 누구에게나 시름이야 왜 없겠습니까만 이 시를 읽는 동안은 괜찮아집니다. 읽은 글 굳이 다시 읽지 않는데 '물의 주머니'는 여전히 즐거워서 '얘기가 어떻게 이어졌지?' 다시 찾아 읽게 됩니다. 들꽃도 저버린 늦가을, 그래도 그 개울물 보러 가고 싶어집니다. 시인에게 이런 .. 2022. 10. 30.
동시를 읽는 이유「섭이가 지각한 이유」의 경우 내 친구 설목은 《오늘의 동시문학》이라는 계간지를 내고 있었습니다. 계간이니까 47호라면 대략 12년인데 그런 책을 사보는 이가 거의 없는데도 십수 년 책을 냈으니, 그것도 재단 같은 걸 만들어 어디서 보조도 받고 공사 간 찬조도 받고 하지 않고 거의 사비로 그 짓을 했으니 요즘 말론 미친 짓이었겠지요. 그러면서 2015년 봄·여름 호가 마지막이었지요, 아마? 지금은 폐간되고 인터넷 카페("오늘의 동시문학")만 운영되고 있습니다 나는 아이들이 보고 싶을 때마다 그 카페에 들어가 봅니다. 무슨 낙으로 그러는지, 평생 동시를 쓰고 읽으며 사는 이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삶을, 그러니까 그들의 작품(동시)을 나는 웬만하면 "좋다"고 합니다. '좋다고 한다'? 당연히 그렇게 표현해야 합니다. 나는 그때(.. 2022. 1. 18.
황순분 「코스모스」 코스모스 코스모스 아름답다. 길 옆에 가는 사람 아름답다. 코스모스는 길 가는 사람이 반가워서 어쩔 줄을 모른다. "코스모스는 길 가는 사람이 / 반가워서 어쩔 줄을 모른다." 이 구절에 깜짝 놀랐습니다. 저 코스모스가 반가워서 코스모스 꽃밭이 선물 같다고 썼던 자신이 한심하구나 싶었습니다. 저 한적한 길의 코스모스가 나를 보고 반가워했었다니 난 그것도 모르고...... 그러고 보니 "길 옆에 가는 사람 아름답다"는 것도 그렇습니다. 나는 저 코스모스가 순박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고 생각했지만 저 시인이 그 코스모스 옆으로 지나가는 나를 보고 아름답다고 할 줄은 꿈에도 몰랐고 그게 참 미안하고 쑥스러웠습니다. 이제 보니까 첫 문장 "코스모스 아름답다"는 평범함을 가장한 예사로움 같습니다. 그렇게 해놓고 그.. 2021. 11. 3.
「토끼풀 시계」 카페 《오늘의 동시문학》 "이 동시 어때요?(토론)' 코너에 실려 있는 동시입니다. 토끼풀 시계 ㅣ 김성민 토끼야, 몇 시니? 토끼풀 시계 차고 오물오물 시간 읽던 토끼가 말해요 여긴 다 고장 난 시간뿐이야 맞는 시계가 하나도 없어 이 동시를 보고 나는 이렇게 썼습니다. 마치 내 집 시계들 같습니다. '협찬'은 아니지만 대부분 이 일 저 일로 말하자면 공짜로 굴러들어 온 시계들인데 시간도 제멋대로입니다. 5분 빠른 것도 있고 5분 느린 녀석도 있으니 그 차이가 10분이나 됩니다. 그렇지만 나는 그 시계들이 각자의 일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들은 그러니까 제각기 열심입니다. 바라보고 있으면 마치 저 자신 같아서 측은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빠르거나 늦거나 다 맞다고 해주었으면 싶을 때가 있습니다. 이건.. 2021. 5. 24.
김동원 「나비 수첩」 나비 수첩 / 김동원 나비 수첩에는 장미꽃을 갈아 어떻게 빙수를 해 먹는지 적혀 있었네 붉은 노을 몇 방울 얼음 위에 뿌려라 간밤 잘라 놓은 초승달 체리랑 망고랑 수박이랑 함께 올려라 숟가락은 오목한 바람을 두 개 포개라 종달새 입으로 퍼먹어라 분홍 장미 향기가 나폴나폴 나비 되어 날아갈 때까지 자꾸자꾸 퍼먹어라 ........................................................ * 2017년 등단 아이들은 이렇게 놀고 싶어하는데 나는 그렇게 놀면 안 된다고, 내가 이야기하는 대로 놀아야 한다고 우겨서 기를 꺾어 놓습니다. 이렇게 하는 건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이 오류를 고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어찌할 수 없는 슬픔입니다. 아이들 세계에 다가가.. 2021. 5. 12.
「봄 난리」/ 雪木 내 독후감(아모스 오즈《숲의 가족》)에 설목 선생이 써놓은 댓글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시인은 감흥이 남다를 것 같기도 하고, 코로나19 때문에 들어앉아 있어야 하는 사정을 생각하면 저 숲의 요동이 유난스럽게 보일 수도 있고, 거기에 "숲의 가족"이라는 책의 독후감이어서 '잠시' 그렇지만 '한바탕' 자신의 느낌을 전해주고 싶었겠지요. 이 글이 그 댓글입니다. 숲에 가면 난리도 아닙니다. 꽃이란 꽃들이 난리입니다. 어리둥절합니다. 매화, 산수유, 동백꽃 들이 온통 난리 치고 간 다음 지금은 목련, 개나리, 진달래, 벚꽃 들이 뒤를 잇고 있습니다. 앞으로 복사꽃, 살구꽃, 철쭉, 연산홍 들이 난리 칠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꽃들만 난리입니까. 잎눈들이 눈을 뜨고 세상을 내다보고 있습니다. 그 눈빛이 하도.. 2021. 4. 16.
김순영 동시집《열 살짜리 벽지》 김순영 동시집 《열 살짜리 벽지》 소야주니어 2020 1 동시집을 보면(1960년대 초였지? 교과서 전성시대, 내가 생전에 동시집 같은 걸 볼 수 있으리라는 상상 같은 건 도저히 할 수 없었던 암울한 시대……)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가 생각난다. 나중에 교육부 편수관이 되어 교과서를 만들고 심사하고 관리할 때는 괜히 옆자리의 국어 편수관들을 미워했다. '꼴에 국어 편수관이라고?' 내가 국어 교과를 맡지 못하고 다른 교과를 맡아서 약이 올랐던 것이다. 지금도 그렇다. '나 같으면 이 시를 교과서에 실을 텐데…….' 꽃 식당 봄이 차린 향긋한 식당 꽃잎 간판 내걸었다 풀밭에 민들레 식당 담장 높이 목련 식당 큰길 옆 개나리 식당. 꽃 식당마다 손님 끌기 한창 '꿀' '꽃가루' 차림표 붙여 놓고 벌 나비가 종일.. 2020. 3. 28.
"여기서 멈춥니다" "여기서 멈춥니다" 우리나라 최초 동시문학 전문지 《오늘의 동시문학》 50호(종간호) 여기서 멈춥니다 박두순(주간, 동시인) 추위가 엄한 계절이 왔습니다. 어쩌다 <오늘의 동시문학>도 엄한 계절을 맞아, 걸음을 멈춥니다. 이 자리에 섭니다. 더 나아가지 못합니다. <오늘의 동시문.. 2017. 1. 3.
정은미 「모드와 링거」 체로키 인디언 할아버지에게 듣는 인디언 이야기 중에서 모드와 링거 정은미 '모드'라는 개가 있어. 냄새는 잘 맡지 못하지만 귀가 밝아 먼 소리까지 잘 듣지. '링거'는 뛰어난 사냥개였어. 지금은 나이 들어 잘 보지도 듣지도 못하지만. 나는 사냥할 때 모드와 링거를 꼭 데리고 다녀. 냄새도 못 맡고,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는 개들을 왜 데리고 다니냐고? 그건 여전히 자신들이 소중하다는 걸 느끼게 해 주기 위해서지. 내가 산에 오를 때면 녀석들은 '컹! 컹!' 짖으며 앞질러 힘차게 뛰어간단다. 2013.5.25. 충청북도 그러니까 이 이야기와는 직접적 관련이 전혀 없는 엉뚱한 개. 나도 그렇습니다. 나이가 드니까 잘 보이지 않습니다. 누가 인사를 하면 가까이 다가가 그렇게 인사를 받는 것에 대해 꼭 궁색.. 2016. 6. 1.
「매미의 새 옷」 매미의 새 옷 황인희 나는 매미 녀석의 비밀을 알았다 매미가 벗어놓고 간 것은 단 한 벌 7년을 그 옷으로 견디다가 새 옷 장만해 입고 나왔다 매미 녀석 우리집 창문에 붙어 날마다 시끄럽게 한 거 봐준다 새 옷 장만하느라 애먹었을 테니까 ―――――――――――――――――――――――――――――――――――――――――― · 1991년 경남 창원 출생 · 경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4학년 재학 · 경남대학교 청년작가아카데미 3기 재학 · 이메일 : einhml@hanmail.net 《오늘의 동시문학》 제48호(2015 가을·겨울), 75쪽(신인상 당선작). Ⅰ 아이들이 읽으면 어떤 생각을 할지 궁금합니다. 설명할 것도 없습니다. 아이들도 시를 읽고 싶어 합니다. 읽을 수 있게 해주어야 합니다. 아이들은, 아이들일 때.. 2015. 11. 5.
「4번 타자」 4번 타자 한상순 할머니 손전화 단축번호는 아빠 1 엄마 2 언니 3 나 4 아빠 손전화엔 엄마 1 할머니 2 언니 3 나 4 엄마 손전화엔 아빠 1 언니 2 할머니 3 나 4 언니 손전화엔 할머니 1 엄마 2 아빠 3 나 4 난 언제나 변치 않는 4번 타자 ―――――――――――――――――――――――――――――――――――――――― 동시집 《병원에 온 비둘기》에서 「뻥튀기는 외로워」라는 시를 본 적이 있습니다. 이번에는 「4번 타자」를 보고 '이런 재미있는 시인이 또 있구나' 싶어서 찾아봤더니 바로 그 시인입니다. 아빠는 혹 "내가 왜 3번이냐?"고 따지고, 엄마도 혹 "내가 2번이란 말이지?" 할 수도 있고, 할머니도 누구에겐가 2번 아니면 3번인 걸 섭섭해 하실 수도 있지만, 정작 누구에게나 4번인 이.. 2015. 5.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