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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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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의 일을 누가 알겠어요」 한밤의 일을 누가 알겠어요 황인숙 어젯밤 눈 온 거 알아요? 어머, 그랬어요? 아무도 모르더라 토요일 밤인 데다 날도 추운데 누가 다니겠어요 저도 어제는 일찍 들어갔어요 한밤의 일을 누가 알겠어? 우리나 알지 4월인데 눈이 왔네요 처음에는 뭐가 얼굴에 톡 떨어져서 비가 오나 하고 가슴 철렁했는데, 싸락눈이더라구 자정 지나서는 송이송이 커지는 거야 아, 다행이네요 그러게, 비보다는 눈이 낫지 동자동 수녀원 대문 앞 긴 계단 고양이 밥을 놓는 실외기 아래 밥그릇 주위에 졸리팜 곽 네 개 모두 뜯긴 채 흩어져 있었지 빠닥빠닥 블리스터들도 빠짐없이 비어 있었지 졸리팜 가루 같은 싸락눈 쏟아지던 밤이었지 ―――――――――――――――――――――――――――――――――――――――― 황인숙 1958년 서울 출생. 198.. 2018. 12. 15.
김행숙 「작은 집」 작은 집 김행숙 리셋하자, 드디어 신이 결정을 내린 것이다. 신의 말에 순종하여 밤낮으로 흰 눈이 내리고, 흰 눈이 내리고, 흰 눈이 내려서…… 이 세상 모든 발자국을 싹 지웠네. 보기에 참 아름답구나. 그런데…… 신이란 작자가 말이지, 이 광활한 세계를 한눈에 둘러보느라 시야가 너무 넓어지고 멀어진 나머지 조그만 집 한 채를 자기 속눈썹 한 올처럼 보지 못했다지 뭔가. 옛날 옛적에 잃어버린 꽃신 한 짝과 같은 그 집에는 늙은 여자 혼자 살고 있었다네. 어느덧 늙어서 동작도 굼뜨고 눈도 침침하고 기억하는 것도 점점 줄어들어 인생이 한 줌의 보리쌀 같았대. 늙은 여자 한 명이 날마다 불을 지피는 세계가 있고, 마침내 늙은 여자 한 명이 최후의 불꽃을 꺼뜨린 세계가 있어서, 신이 견주어본다면 이 두 개의 시.. 2018. 3. 23.
눈 온 날 아침 마침내 2017년의 눈까지 내렸다. 첫새벽에 내려서 눈이 내린 것도 모르고 있다가 날이 다 밝은 뒤 창문 너머 눈 풍경을 보았고 늦잠을 잔 것이 아닌데도 무안한 느낌이었다. 너무 멀어진 날들의 겨울방학과 방학책들이 생각났다. 내가 아이들을 가르칠 때 본 방학책이었는지,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 받은 방학책이었는지, 이젠 그것조차 구분하지 못한다. 그런데도 눈이 내려 저렇게 쌓였다. 그새 눈이 내려 저렇게 쌓이다니……. 이렇게 내린 눈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아이들을 가르치며 지낸 나는 눈이 내렸다고 이러고 있지만 눈 같은 건 내려도 그만 내리지 않아도 그만인 채 지내고 있을까? 2017. 11. 25.
내가 사는 곳 내가 사는 곳 2017.2.5. 북쪽 어디에는 진눈깨비가 내렸다고 했다. ― 허연, 「시월」(시 『현대문학』 2017년 1월호, 374~375) 중에서. 그날 저녁, 내가 살펴본 블로그에서는 아무도 눈 내린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나는 마침내 멀고 고적한 곳에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되었다. 2017. 2. 11.
아이들의 눈을 들여다보라(2016.1.25) "아이들의 눈을 들여다보며 지낸 세월은 즐겁고 행복했다." 사십여 년의 교직생활을 그렇게 요약하곤 한다. 아이들의 눈! 그 눈을 들여다볼 수 있는 것은 교원의 특권이므로 그들이 부르면 열 일 제쳐놓고 몸을 돌려 그 눈을 바라보라는 뜻으로 전 교직원에게 회전의자를 선물하고 학교를 나왔다. 회전의자! 그게 그 세월로써 도출한 '교육의 결론'이 된 것이다. 세상에서 속일 수 없는 유일한 대상이 아이들의 눈이라는 걸 발견했다. 저것들이 뭘 알겠나 싶지만 그 눈은 우리가 그들을 형식적으로 대하는지 따뜻한 마음으로 대하는지 당장 간파해낸다. 교육을 내세우면서도 그들을 대하는 실제적 이유는 다를 수 있지만(봉급을 받으려는 것이 가장 우세하고 합당할는지는 모르겠다), 아이들은 우리에게서 오직 사랑을 찾고 확인하려는 경.. 2016. 1. 24.
「풍설야귀인風雪夜歸人」 풍설야귀인風雪夜歸人* 정재학 바람 소리가 백색의 글자들로 내리는 밤 한쪽 눈이 먼 화가의 눈보라로 지어진 집으로 가자 목쉰 개 짖는 소리 들리고 나귀도 없이 터벅터벅 푸너리 같은 바람을 지나 거무장단 같은 눈발을 뚫고 바람의 반사음과 묵향이 경계 없이 흔들리며 번지는 밤 * 조.. 2015. 12. 30.
「눈(雪)」 2013.12.26. 영동사거리 눈(雪) 이태수 눈은 하늘이 내리는 게 아니라 침묵의 한가운데서 미끄러져 내리는 것 같다 스스로 그 희디흰 결을 따라 땅으로 내려온다 새들이 그 눈부신 살결에 이따금 희디흰 노래 소리를 끼얹는다 신기하게도 새들의 노래는 마치 침묵이 남은 소리들을 흔들어 떨.. 2014. 12. 10.
「싸락눈 내리어 눈썹 때리니」&「설중여인도(雪中女人圖)」 재작년 2월 둘째 주 어느 날, 블로그 『강변 이야기』의 작품 싸락눈 내리어 눈썹 때리니 싸락눈 내리어 눈썹 때리니 그 암무당 손때 묻은 징채 보는 것 같군. 그 징과 징채 들고 가던 아홉 살 아이…… 암무당의 개와 함께 누릉지에 취직했던 눈썹만이 역력하던 그 하인 아이 보는 것 같군. 보는 것 같군. 내가 삼백 원짜리 시간 강사에도 목이 쉬어 인제는 작파할까 망설이고 있는 날에 싸락눈 내리어 눈썹 때리니……. 『徐廷柱詩選』민음사 세계시인선 ⑫, 1974, 111. 설중여인도(雪中女人圖) 김원길 저 눈 좀 보아, 저기 자욱하게 쏟아지는 눈송이 좀 보아 얼어 붙은 나룻가의 눈 쓴 소나무와 높이 솟은 미루나무 늘어선 길을 눈 속에 가고 있는 여잘 좀 보아. 내리는 눈발 속에 소복(素服)한 여인의 뺨이 보이네.. 2013. 12. 1.
교황님의 눈, 나의 눈 교황님의 눈, 나의 눈 교황 피우스 2세 흉상(박미진 펴냄, 도록 『바티칸 박물관전』, 지니어스 엠엠씨, 2012, 60~61쪽). 성직자들의 흉상이나 초상을 이야기하려니까 두렵습니다. 주제넘은 일이기도 하거니와 종교에 관한 언급이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저 인상적인 점만 말.. 2013. 4. 10.
그리운 눈 올해는 눈이 많이도 내립니다. 눈 온 뒤 기온이 내려가고 바람이 불면 죽을까봐 나다니기가 조심스럽습니다. 길이 미끄러운 건 기본이고, 몸이 시원찮은 사람은 영 끝장나는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도 그래서 죽었다는 기사를 본 적도 있습니다. 옛날에 못 살 때는 눈이 오면 들어앉아 있으면 그만이었지만, '잘 사는 나라'가 된 후로는 아무리 눈이 많이 오고 세찬 바람이 불어도 갈 데는 가고 만날 사람은 만나야 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잘 사는 나라'가 된 후로는 눈이 많이 내리면 마음이 무거워질 때가 많습니다. ♬ 휴일에 내리는 눈을 내다보고 있으면 아늑한 느낌을 줍니다. 그럴 때는 걸핏하면 예전의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의 시(詩)가 생각납니다. …… 겨울밤입니다. 시골 초가집에 눈이.. 2013. 1. 6.
2012. 12. 13.
「千里香」 千里香 꽃망울 하나가 가라앉는다. 얼음장을 깨고 깊이 깊이 가라앉는다. 어둠이 물살을 그 쪽으로 몰아붙인다. 섣달에 紅疫처럼 돋아난 꽃망울, 저녁에는 함박눈이 내린다. 마을을 지나 잡목림 너머 왔다 간 사람은 아무 데도 발자국을 남기지 못한다. 『金春洙詩選2 處容以後』(민음사 오늘의 시인 총서, 1982), 76쪽. 봄입니다. 그걸 부정하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 부정한다고 해서 될 일도 아닙니다. 그렇지만 지난 2월 둘째 주 주말에만 해도 전국적으로 폭설이 내린 곳이 많았습니다. 동해안에는 백몇십 년 만에 처음 그렇게 많은 눈이 내려서 피해가 극심했습니다. 그 당시 불친 "강변 이야기"에 실린 사진입니다. 부치지 못했던 오랜 추억을 기억하던 편지가 한꺼번에 쏟아지는… 그분은 이 사진 아래에 오석환의 시 .. 2011. 3.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