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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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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눈 올해는 눈이 많이도 내립니다. 눈 온 뒤 기온이 내려가고 바람이 불면 죽을까봐 나다니기가 조심스럽습니다. 길이 미끄러운 건 기본이고, 몸이 시원찮은 사람은 영 끝장나는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도 그래서 죽었다는 기사를 본 적도 있습니다. 옛날에 못 살 때는 눈이 오면 들어앉아 있으면 그만이었지만, '잘 사는 나라'가 된 후로는 아무리 눈이 많이 오고 세찬 바람이 불어도 갈 데는 가고 만날 사람은 만나야 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잘 사는 나라'가 된 후로는 눈이 많이 내리면 마음이 무거워질 때가 많습니다. ♬ 휴일에 내리는 눈을 내다보고 있으면 아늑한 느낌을 줍니다. 그럴 때는 걸핏하면 예전의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의 시(詩)가 생각납니다. …… 겨울밤입니다. 시골 초가집에 눈이.. 2013. 1. 6.
2012. 12. 13.
金春洙 「千里香」 千里香 꽃망울 하나가 가라앉는다. 얼음장을 깨고 깊이 깊이 가라앉는다. 어둠이 물살을 그 쪽으로 몰아붙인다. 섣달에 紅疫처럼 돋아난 꽃망울, 저녁에는 함박눈이 내린다. 마을을 지나 잡목림 너머 왔다 간 사람은 아무 데도 발자국을 남기지 못한다. 『金春洙詩選2 處容以後』(민음사 오늘의 시인 총서, 1982), 76쪽. 봄입니다. 그걸 부정하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 부정한다고 해서 될 일도 아닙니다. 그렇지만 지난 2월 둘째 주 주말에만 해도 전국적으로 폭설이 내린 곳이 많았습니다. 동해안에는 백몇십 년 만에 처음 그렇게 많은 눈이 내려서 피해가 극심했습니다. 그 당시 불친 "강변 이야기"에 실린 사진입니다. 부치지 못했던 오랜 추억을 기억하던 편지가 한꺼번에 쏟아지는… 그분은 이 사진 아래에 오석환의 시 .. 2011. 3. 6.
부총리님께 -다시 아산병원을 다녀와서 - 아침에 병원 창 너머로 내다본 한강 위로 오늘도 또 눈발이 날리더니 종일 오락가락했습니다. '강원 산간은 눈폭탄'이란 기사가 보이니 부총리님 계신 곳은 더하겠지요. 그 골짜기에서 괜찮으신지요? 지금 이 시각에도 눈이 내립니까? 택배회사에 주소와 전화번호를 잘못 알려주어 연락이 왔었습니다. 혹 도움이 될까 싶어서 "그분이 부총리님"이라고 했는데 그렇게 해놓고는 뭔가 제 얄팍한 의도를 드러낸 것 같아 부끄러웠습니다. 저는 이제 '정말로' 담배를 끊었습니다. 결재를 받으며 지내던 그 시절, "요즘은 덜 피우는가? 냄새가 덜 난다." 하실 때마다 "예" 하고 대답하던 제 능청이 너무나 송구스러웠습니다. 그 이후 최근까지도 호기롭게, 때로는 심지어 '행복한' 마음으로 담배를 피워대면서도 전화나 이메일로 그걸 물어.. 2010. 2. 12.
문정희 「겨울 사랑」 겨울 사랑 문정희 눈송이처럼 너에게 가고 싶다 머뭇거리지 말고 서성대지 말고 숨기지 말고 그냥 네 하얀 생애 속에 뛰어들어 따스한 겨울이 되고 싶다 천년 백설이 되고 싶다 서울아산병원 사보(社報)에서 읽었습니다. 병원 뒤편 한강 그 하늘 위로 다시 이 해의 눈이 내릴 때 나는 중환자실에 갇혀 있었습니다. 멀쩡한(?) 사람들은 하루만에 벗어나는 그곳에서 3박4일을 지내며 평생을 아이들처럼 깊이 없이 살아온 자신을 그 풍경에 비추어 보았습니다. 그러자 그 눈송이들이 이번에는 마치 아이들처럼 내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 큰 건물 앞으로는 자동차와 사람들이 쉴새없이 드나듭니다. 어떤 '행복한' 사람은 담배까지 피우며 걸어다닙니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그 모습들은 무성영화 같습니다. 풍경에서 그리움이 피어오르기로.. 2010. 2. 8.
파스테르나크 『닥터 지바고』Ⅲ B. 파스테르나크 『닥터 지바고』 김재경 옮김, 혜원출판사, 2007 2010. 1. 12.
파스테르나크 『닥터 지바고』Ⅱ B. 파스테르나크 『닥터 지바고』 김재경 옮김, 혜원출판사 2007 혹한과 폭설이 이어지다가 모처럼 포근한 토요일 낮입니다. 오후에 여의도 금융감독원에서 우리 학교에서 제일 아름다운 여 선생님 한 분의 결혼식 주례를 하고 들어왔습니다. 또 눈이 옵니다. 지난 3일 일요일 밤에는 눈이 참 많이도 왔습니다. 그 눈은 월요일에도 그칠 줄 모르고 내려 그날 출근을 하려던 우리 학교 교직원들 중에는 한 곳에 서 있는 버스 안에서 두 시간을 기다리다가 어쩔 수 없이 되돌아가기도 했습니다. 아이들이 학교에 오지 않는 기간이어서 다행이었습니다. 기상 관측사상 제일 많이 내렸기 때문에 칠십 몇 년 만에 가장 많이 내렸다고 하더니 이어서 백 몇 년 만이라고도 했습니다. 뉴스에서는 8일에도 아직 전철이 미어터질 지경이어서 .. 2010. 1. 9.
실존 Ⅰ: 2009년 12월 25일 저녁에 내리는 눈 눈이 내린다. 기가 막힌다. - 이 밤, 수용소 같은 곳에서 '담배를 피며' 바라보는 눈은 어떤 눈일까…… 2009. 12. 25.
김수영 「눈」 눈 『거대한 뿌리』(김수영 시선, 민음사, 1997, 개정판 4쇄)를 꺼내어 「눈」을 찾았습니다. 눈은 살아있다 떨어진 눈은 살아있다 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 눈더러 보라고 마음놓고 마음놓고 기침을 하자 눈은 살아있다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 눈은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 마흔일곱에 버스에 치여 죽은 詩人 김수영(1921~1968)은, 웬 일일까요, 자꾸 가슴을 앓다가 죽은 시인으로 여겨집니다. 그래서인지 시인은 새벽에 본 하얀 눈 위에 기침을 하다가 나온 가래를 뱉을 수도 있겠다 싶어집니다. ‘마음놓고’. 쿨룩쿨룩 하다가 .. 2009. 10. 24.
강우식 「종이학」 종이학 강우식 오대산 월정사에서 상원사 사이 전나무들은 부처님의 허리처럼 곧추 서 있고 월정사 석탑과 상원사 동종 사이 하늘을 찌르다 비스듬히 휘어진 탑 끝과 천 년 묵은 놋쇠자궁의 동종 사이 방한암 선사의 결과부좌 비슷한 한길과 경 읽다 다 닳은 팔꿈치의 굽이 길 사이 한순간 개명(開明)하듯 눈 내려 환하다. 사이사이 산들은 모조지로 접은 종이학이다. 그대가 곁에 있어 옛날에는 마음을 모아 밤새도록 정갈히 접고 만들었던 종이학. 지금은 종이학 접어 빌어줄 그리운 사람도, 사람도 아주, 아주 소식줄 끊겨 만드는 법도 까마득히 잊은 무명(無明)같이 칠흑의 흰 바탕뿐인 마음눈이 내린다. 오대산 월정사에서 상원사 사이 유리병 안에 천마리 학이 갇혔구나. 그저 하얗게 저무는 경전의 말씀. 하실 말씀 더 없으신 .. 2009. 6.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