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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파스테르나크 『닥터 지바고』Ⅱ

by 답설재 2010. 1. 9.

 

 

 

『닥터 지바고』 음반 뒤표지, 눈 내리는 장면이 없어서 유감이지만...

 

 

 

 

 

B. 파스테르나크 『닥터 지바고』

김재경 옮김, 혜원출판사 2007

 

 

 

 

혹한과 폭설이 이어지다가 모처럼 포근한 토요일 낮입니다. 오후에 여의도 금융감독원에서 우리 학교에서 제일 아름다운 여 선생님 한 분의 결혼식 주례를 하고 들어왔습니다. 또 눈이 옵니다.

 

지난 3일 일요일 밤에는 눈이 참 많이도 왔습니다. 그 눈은 월요일에도 그칠 줄 모르고 내려 그날 출근을 하려던 우리 학교 교직원들 중에는 한 곳에 서 있는 버스 안에서 두 시간을 기다리다가 어쩔 수 없이 되돌아가기도 했습니다. 아이들이 학교에 오지 않는 기간이어서 다행이었습니다. 기상 관측사상 제일 많이 내렸기 때문에 칠십 몇 년 만에 가장 많이 내렸다고 하더니 이어서 백 몇 년 만이라고도 했습니다. 

뉴스에서는 8일에도 아직 전철이 미어터질 지경이어서 시민들이 불평을 늘어놓았다고 했고, 이곳저곳 소나무들이 두꺼운 눈을 이고 서 있는 모습이 처연해 보이기도 했습니다.

 

『닥터 지바고』에는 눈 오는 모습이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집니다. 지난번에『닥터 지바고 Ⅰ』에서도 유라가 어머니의 장례식날 밤에 눈 내리는 모습을 내다보는, 이 소설의 첫 장면을 읽어봤지만, 각 장(章)에서 몇 개의 절(節)을 살펴보면 당장 눈 이야기로 시작되는 곳을 찾을 수 있습니다.

  

제7장 ‘우랄행 기차’ 중에서 몇 곳입니다.

 

 

출발 전날은 눈보라가 불어왔다. 잿빛 구름이 눈을 토하면서 하늘로 치달아 올라갔다간 하얀 회오리바람이 되어 땅에 되돌아서 깊고 어두운 거리로 사라지며 흰 보자기처럼 뒤덮였다.(233)

 

기차를 타고 사흘이 지났지만 아직도 모스크바에서 그다지 멀리 가지 못했다. 창밖은 여전히 쓸쓸하고 을씨년스러운 겨울 풍경이었다. 선로, 들, 숲, 마을의 지붕, 모든 것이 하얗게 눈에 덮였다.(237)

 

기관사로 보이는 앞장선 그림자가 기관차 끝머리까지 가더니 완충기를 뛰어넘어 마치 땅속으로 꺼져 들어간 것처럼 사라져버렸다. 뒤쫓아 가던 수병도 공중에 떠올라갔다가 사라져버렸다.

지바고와 몇 사람이 호기심에서 그쪽으로 가보았다.

그들은 완충기 앞에 뻗어 있는 선로에서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되었다. 기관사는 허리춤까지 눈에 파묻혀 있었다. 그를 뒤쫓던 수병들은 마치 짐승을 잡으려는 사냥꾼처럼 기관사를 가운데 두고 삥 둘러 에워싸고 있었는데 그들도 허리춤까지 눈에 파묻힌 상태였다.(247)

 

다음날, 몰아친 눈보라가 그대로 덮여 있는 철도에서 탈선하지 않도록 기차는 느릿느릿 조심스럽게 달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기차는 살아 있는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 곳을 지나 폐허가 된 역에 멈춰 섰다. 화재로 검게 그을린 역사(驛舍) 전면에서 니즈니 켈메스라는 역 이름을 겨우 알아볼 수가 있었다. 비단 화재의 흔적은 역 건물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역 뒤쪽으로는 눈에 덮인 황폐한 마을이 보였는데, 그 마을도 역시 화재의 피해를 입은 것 같았다.(248)

 

 

다음은 저 뒤의 제13장 ‘여신상 맞은편 집’입니다.

 

 

그는 긴 여행의 반 이상을 철길을 따라 걸어왔다. 철길은 어디서나 죽은 듯이 눈 속에 묻혀 있었다. 도처에 백위군의 열차가 내버려져 있었다. 눈더미에 막혀 움직일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콜차크 군의 전면적인 패배 때문에, 또는 연료가 떨어졌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포기한 열차들이었다. 이렇게 눈 속에 묻혀버린 열차들은 마치 기다란 리본처럼 수십 리에 걸쳐 잇달아 늘어서 있었다. 그것은 주변에 날뛰는 무장 강도단의 거점이 되었고, 그 당시 본의 아닌 떠돌이 생활을 하던 범법자나 정치범들의 은신처로 이용되기도 했지만, 그보다도 철도선 주변의 수많은 부락을 무자비하게 휩쓴 티푸스의 희생자들과 동사자(凍死者)들의 공동묘지 구실을 하고 있었다.(411)

 

지바고는 말할 수 없는 비탄과 고뇌 때문에 눈물조차 말라버린 빛 잃은 눈을 편지에서 떼었다. 주위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아무것도 의식하지 못했다.

창밖에선 눈이 내리고 있었다. 바람이 눈송이를 점점 더 빨리 점점 더 많이 실어다 퍼부었다. 무언가 잃어버린 것을 되찾으려고 서두르거나 하듯이, 지바고는 눈을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토냐의 편지를 읽는 중이었다. 지바고의 시야에 명멸되는 것은 건조한 별 부스러기 같은 눈송이가 아니라 검고 조그만 글씨로 빽빽이 메운 흰 종이였다.(451)

 

제14장 ‘다시 바르이키노로’의 제1절 첫머리도 눈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라라와 함께 지내는 짧은 기간에 어두운 그림자가 비치는 장면입니다. 지바고의 아버지를 죽인 코마로프스키, 라라가 어렸을 때 여린 육체를 유린하고 소설이 끝날 때까지 아름다운 그 영혼을 끊임없이 갉아먹는 그 코마로프스키가 바로 어두운 그림자입니다.

 

 

겨울로 접어들었다. 함박눈이 내렸다. 지바고는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왔다. 현관에서 라라를 만났다.

“코마로프스키가 왔어요.”

그를 맞으러 나온 라라가 목쉰 것 같은 낮은 소리로 말했다. 그들은 현관에 그대로 서 있었다. 라라는 얼이 빠진 사람처럼 멍하니 그를 쳐다보았다.

“어디에? 누굴 찾아온 거지? 지금 여기 와 있다는 거요?”(453)

 

헛간 앞 눈 위에는 지금까지 지바고가 다녀간 썰매 자국이 몇 줄로 그대로 남아 있었다. 문지방의 눈은 엊그제 장작을 실어낼 때의 발자국으로 더럽혀져 있었다.

아침부터 잔뜩 찡그렸던 하늘이 맑게 개었다. 날씨는 훨씬 더 추워졌다. 이 일대를 가깝고 또 멀리 에워싼 모습이 지바고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그에게 어떤 생각을 불러일으키려는 듯이 보였다. 이해 겨울은 유달리 눈이 많이 와서 헛간 문지방보다 더 놓게 쌓였다. 마치 문설주가 내려앉고 헛간의 키가 낮아진 것 같았다. 지붕 위에는 바람에 날린 눈이 큰 버섯처럼 지바고의 머리 위에 드리워져 있었다. 그 지붕 위에 한쪽 끝을 찔러 넣은 듯 초생달이 잿빛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아직 이른 오후이고 밖은 훤했지만, 지바고는 밤늦게 인생의 어둡고 울창한 숲속에 홀로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막막하고 처량한 심정이었다. 거의 얼굴 높이에서 타오르고 있는 초생달은 이별의 전조(前兆)였으며 고독의 상징이기도 했다.(478)

 

영화 『닥터 지바고』는 데이비드 린의 작품으로, 그가 감독한 『아라비아의 로렌스』 『콰이강의 다리』와 함께 미국 영화평론 사이트 '로튼토마토닷컴(rottentomato.com)'에서 100점 만점을 받았답니다.